소공蘇公이 往往有此一段曠達處하나 却於진태수陳太守에 少回護하니라
이요 而
이라 以至近
으로 求最高
면 其勢必得
이어늘 而
태수太守之居
에 未嘗知有
종남산山焉
하니
雖非事之所以損益이나 而物理有不當然者하니 此凌虛之所爲築也라
見山之出於林木之上者 纍纍如人之旅行於墻外而見其髻也하고 曰 是必有異라하고
使工鑿其前하야 爲方池하고 以其土築臺하야 高出於屋之簷而止하니
然後에 人之至於其上者 怳然不知臺之高하고 而以爲山之踊躍奮迅而出也라
公曰 是宜名凌虛라하고 以告其종사관從事蘇軾하야 而求文以爲記하니라
昔者에 荒草野田이 霜露之所蒙翳요狐虺之所竄伏이니 方是時에 豈知有凌虛臺耶리오
廢興成毁 相尋於無窮하니 則臺之復爲荒草野田을 皆不可知也라
嘗試與公登臺而望
하니 其東則
也
요 其南則
이요 而其北則
也
라
計其一時之盛컨댄 宏傑詭麗하고 堅固而不可動者 豈特百倍於臺而已哉리오
然而數世之後에 欲求其髣髴이나 而破屋頹垣이 無復存者하야 旣已化爲禾黍荊棘과 丘墟隴畝矣어든 而況於此臺歟잇가
夫臺猶不足恃以長久어든 而況於人事之得喪이 忽往而忽來者歟잇가
소공蘇公이 이처럼 광달曠達한 부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진태수陳太守에게는 회호回護(비호庇護)함이 적었다.
남산南山의 아래에 대臺를 지으니, 기거起居하고 먹고 마심에 마치 산山과 접할 듯하였다.
사방의 산山 중에 종남산終南山보다 더 높은 산山이 없고, 도읍 중에 산山과 근접해 있기로는 부풍扶風보다 더 가까운 곳이 없으니, 지극히 가까운 것으로 가장 높은 산山을 구하면 그 형세가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인데, 태수太守가 거처할 적에 일찍이 산山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는 비록 일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사물의 이치에 당연하지 않은 점이 있으니, 이것이 능허대凌虛臺를 쌓은 이유이다.
능허대凌虛臺를 쌓기 전에 태수 진공太守 陳公이 그 아래에서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고 소요하다가,
산山이 숲 위로 우뚝하게 나온 것이 마치 사람들이 담 밖으로 지나갈 적에 옹기종기 상투가 보이는 것과 같음을 보고는 “반드시 특이한 볼거리가 있을 것이다.”라 생각하고,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그 앞을 파서 네모진 못을 만들고, 여기에서 나온 흙을 가지고 대臺를 쌓아 대臺의 높이가 지붕의 처마를 벗어나게 하고 그쳤다.
이렇게 한 뒤에는 이곳에 오르는 자들이 어리둥절하여 대臺가 높아진 것은 알지 못하고 산山이 솟구쳐 달려 나왔다고 여겼다.
공公은 “이것은 마땅히 능허대凌虛臺라고 이름하여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종사관從事官인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고 하였다.
“물건이 폐하고 흥하고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황폐한 풀과 들밭이 서리와 이슬에 덮여 있었고 여우와 뱀이 숨어 있던 곳이었으니, 이때에 어찌 능허대凌虛臺가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폐하고 흥하고 이루어지고 허물어짐이 서로 이어져 무궁하게 순환하니, 이 대臺가 다시 황폐한 풀과 들밭이 될지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내 일찍이 공公과 누대에 올라가 바라보니, 동쪽은 진 목공秦 穆公의 기년궁祈年宮과 탁천궁槖泉宮이요, 남쪽은 한 무제漢 武帝의 장양궁長楊宮과 오작궁五柞宮이며, 북쪽은 수隋나라의 인수궁仁壽宮이요 당唐나라의 구성궁九成宮이 있었습니다.
그 한때의 성함을 헤아려보면 크고 웅장하고 화려하고 견고하여 동요할 수 없음이 어찌 다만 이 대臺보다 백배만 될 뿐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몇 대가 지난 후에 대충 비슷한 모습이라도 찾고자 하나, 깨진 기왓장과 무너진 담도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이미 기장밭과 가시덩굴과 폐허와 밭두둑이 되었으니, 하물며 이 대臺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대臺도 장구함을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갑자기 갔다가 갑자기 오는 인사人事의 득실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런데도 혹자들은 이것(부귀영화)을 세상에 과시하고 스스로 만족하고자 하니, 이는 잘못입니다.
세상에 믿을 만한 것이 있으나 대臺의 있고 없음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공公에게 말씀드리고 나서 물러나와 이것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