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첨子瞻本色은 與능허대기凌虛臺記로 竝本之장생莊生하니라
餔糟啜漓라도 皆可以醉요 果蔬草木도 皆可以飽니 推此類也면 吾安往而不樂이리오
人之所欲은 無窮이요 而物之可以足吾欲者는 有盡이라
美惡之辨이 戰乎中하고 而去取之擇이 交乎前이면 則可樂者常少하고 而可悲者常多하니 是謂求禍而辭福이라
彼挾其高大以臨我면 則我常眩亂反覆하야 如隙中之觀鬪하니 又烏知勝負之所在리오
是以로 美惡橫生하야 而憂樂出焉하니 可不大哀乎아
하야 釋舟楫之安
하고 而服車馬之勞
하며 去雕牆之美
하고 而蔽采(棌)椽之居
하며 背湖山之觀
하고 而行桑麻之野
라
始至之日에 歲比不登하야 盜賊滿野하고 獄訟充斥하며 而齋廚索然하야 日食杞菊하니 人固疑余之不樂也라
處之朞年에 而貌加豐하고 髮之白者 日以反黑하니 余旣樂其風俗之淳하고 而其吏民이 亦安余之拙也라
於是
에 治其園圃
하고 潔其庭宇
하며 伐
之木
하야 以修補破敗
하야 爲苟完之計
하고 而園之北
에 因城以爲臺者 舊矣
라 稍葺而新之
하고
南望
하면 出沒隱見
하야 若近若遠
하니 庶幾有隱君子乎
인저
雨雪之朝와 風月之夕에 余未嘗不在하고 客未嘗不從이라
擷園蔬하고 取池魚하며 釀秫酒하고瀹脫粟하야 而食之하고 曰 樂哉라 游乎여
方是時
에 이라하야 以見余之無所往而不樂者 蓋遊於物之外也
하니라
前發超然之意하고 後段敍事하니 解意에 兼敍事格하니라
자첨子瞻의 본색은 〈능허대기凌虛臺記〉와 함께 모두 장생莊生(장주莊周)에게서 근본하였다.
진실로 볼 만한 것이 있으면 모두 다 즐거워할 만한 것이 있는 것이니, 반드시 괴이하고 장엄하고 화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술지게미를 마시고 탁주를 마셔도 취할 수 있고, 과실과 채소와 풀과 나무를 먹어도 배부를 수 있으니, 이것을 미루어 유추해본다면 내 어디 간들 즐겁지 않겠는가?
이른바 복福을 구하고 화禍를 사양한다는 것은 복福은 기쁘고 화禍는 슬프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는 무궁무진하고, 물건이 내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에 아름답게 여기고 싫어하는 분별이 마음속에서 싸우고, 버리고 취하는 선택이 목전에서 사귀게 되면, 즐거워할 만한 것이 항상 적고 슬퍼할 만한 것이 항상 많으니, 이것을 일러 ‘화禍를 구하고 복福을 사양한다.’고 하는 것이다.
화禍를 구하고 복福을 사양하는 것이 어찌 인지상정人之常情이겠는가?
저들은 물건의 안에서만 노닐고 물건의 밖에서는 노닐지 못한다.
물건에게 크고 작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내면에서 관찰하면 높고 또 크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저들이 높고 큰 물건을 가지고서 나에게 임하면, 나는 항상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서 마치 좁은 틈 사이로 싸움을 구경하는 것과 같으니, 또 어찌 승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겠는가?
이 때문에 아름답게 여기고 미워하는 마음이 멋대로 생겨서 근심과 즐거움이 나오는 것이니, 크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전당錢塘으로부터 교서膠西의 태수로 옮겨와서 배와 노의 편안함을 버리고 수레와 말의 수고로움을 따르며, 조각한 담의 아름다움을 버리고 떡갈나무 서까래로 만든 오두막에 거처하여 몸만 가리며, 아름다운 호수와 산山의 구경거리를 등지고 뽕나무와 삼이 자라는 들로 왔다.
처음 부임하던 때에 이 지방은 해마다 연이어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들에 가득하고 옥송獄訟이 매우 많았으며 주방이 궁핍하여 날마다 구기자와 국화만을 먹고 있으니, 사람들은 진실로 내가 즐겁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 온 지 1년에 얼굴에 살이 오르고 흰 머리털이 다시 검어지니, 나는 이 지방의 순박한 풍속을 즐거워하고, 관리와 백성들도 나의 졸렬함을 편안히 여겨서였다.
이에 원포園圃(채전)를 만들고 동헌의 뜰과 집을 깨끗이 청소하였으며, 안구安丘와 고밀高密의 나무를 베어다가 무너지고 부서진 것을 보수하여 그런대로 완전하게 하는 계책을 하였고, 또 원포園圃의 북쪽에 성城을 따라 축조한 오래된 대臺를 보수하여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서 때때로 사람들과 함께 이 대臺에 올라가서 마음을 펴고 뜻을 풀곤 하였다.
남쪽으로 마이산馬耳山과 상산常山을 바라보면, 산山의 모습이 나왔다 없어졌다 숨었다 나타났다 해서 가까운 듯하다가 다시 먼 듯하니, 어쩌면 여기에 은군자隱君子가 있는가 보다.
그 동쪽은 노산盧山이니 진秦나라 사람 노오盧敖가 따라 은둔한 곳이요, 서쪽으로 목릉穆陵을 바라보니 우뚝하여 성곽과 같은데 스승 상보尙父와 제 환공齊 桓公의 유열遺烈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북쪽으로 유수濰水를 굽어보고 서글피 탄식하면서 회음후淮陰侯(한신韓信)의 공功을 생각하고 제대로 끝마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이 대臺가 높은데도 편안하고 깊은데도 밝으며,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였다.
함박눈 내리는 아침과 시원한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비추는 저녁에, 내 일찍이 이 대臺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고, 객客도 일찍이 나를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원포園圃의 푸성귀를 채취하고 못의 물고기를 잡으며, 수수로 술을 빚고 껍질을 벗긴 곡식을 씻어 밥을 지어 먹으면서 말하기를 “즐겁다, 내 놀이여!”라고 하였다.
이때에 나의 아우 자유子由가 마침 제남濟南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는 부賦를 짓고 또 이 대臺를 초연대超然臺라 이름하여, ‘내가 가는 곳마다 즐거워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바로 물건의 밖에서 노니는 것’임을 나타내었다.
“앞에서는 초연한 뜻을 설명하고 뒷단락에서는 일을 사실대로 서술하였으니, 해의解意에 서사敍事의 격格을 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