予覽此文은 不是창려昌黎本色이니 前後議論이 多漫然이라
은 是皆有以參天地之化
하고 關盛衰之運
하야 其生也有自來
하고 其逝也有所爲矣
라
其必有不依形而立하고 不恃力而行하고 不待生而存하고 不隨死而亡者矣라
故로 在天에 爲星辰하고 在地에 爲河嶽하고 幽則爲鬼神하고 而明則復爲人하나니 此理之常이니 無足怪者니라
自
동한東漢以來
로 道喪
한문공文弊
하야 異端竝起
하니 하야 輔以
이로되 而不能救
러니 獨
한문공韓文公이 起布衣
하야 談笑而麾之
하니 天下靡然從
한문공公하야 復歸于正
이 蓋三百年於此矣
라
하고 而道濟天下之溺
하며 하고 而
하니 豈非參天地, 關盛衰
하야 浩然而獨存者乎
아
蓋嘗論天人之辨하야 以謂 人無所不至로되 惟天은 不容僞라
智可以欺王公
이로되 요 力可以得天下
로되 不可以得匹夫匹婦之心
이라
故
로 하고 하고 能信於
남해南海之民
하야 廟食百世
로되 而不能使其身一日安於朝廷之上
하니 蓋公之所能者
는 天也
요 其所不能者
는 人也
라
始
에 조주潮人
이 未知學
이러니 하야 爲之師
하니 自是
로 조주潮之士 皆篤於文行
하야 延及
하야
조주潮人之事公也
에 하며 水旱疾疫凡有求
에 必禱焉
이로되 而廟在刺史公堂之後
하야 民以出入爲艱
이라
원우元祐五年
에 이 來守是邦
할새 凡所以養士治民者
를 一以公爲師
하니 民旣悅服
이라
則出令曰 願新왕공公廟者면 聽이라하니 民讙趨之하야 卜地於州城之南七里하야 朞年而廟成하니라
或曰 公去國萬里而謫於
조주潮하야 하니 沒而有知
면 其不眷戀于
조주潮也審矣
라하니
公之神在天下者 如水之在地中
하야 無所往而不在也
어늘 而
조주潮人
이 獨信之深
하고 思之至
하야 하야 若或見之
하니
譬如鑿井得泉하고 而曰水專在是라하면 豈理也哉리오
원풍元豐七年
에 詔封公
창려백昌黎伯이라 故
로 라하니라
조주潮人이 請書其事于石하니 因作詩以遺之하야 使歌以祀公하노라
04. 조주 한문공묘潮州 韓文公廟에 대한 비碑
내가 보건대 이 글은 창려昌黎(한유韓愈)의 본색이 아니니, 전후의 의논이 산만한 것이 많다.
그러나 소장공蘇長公의 평생 기격氣格이 유독 여기에 보존되어 있다.
필부匹夫로서 백세百世의 스승이 되고 한마디 말씀으로 천하의 법이 되는 것은 모두 천지天地의 조화에 참여되고 성쇠盛衰의 시운에 관계되어, 태어남은 말미암아 온 곳이 있고 서거逝去함은 다시 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백申伯과 여후呂侯가 산악으로부터 내려오고 부열傅說이 열성列星이 되었으니, 고금古今에 전하는 바를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라고 하셨으니,
이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심상尋常한 가운데 붙여 있고 천지天地의 사이에 꽉 차 있어서,
갑자기 만날 적에 왕王(천자天子)과 공公(제후諸侯)이 그 귀함을 잃고, 진晉나라와 초楚나라가 그 부유함을 잃고,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그 지혜를 잃고,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 그 용맹을 잃고,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그 언변을 잃으니, 이는 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아마도 반드시 형체를 의지하여 서지 않고, 힘을 믿어 행하지 않고, 삶을 기다려 존재하지 않고, 죽음을 따라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성신星辰이 되고 땅에서는 하河․악嶽이 되며, 그윽하면 귀신이 되고 밝으면 다시 사람이 되는 것이니, 이는 떳떳한 이치로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동한東漢(후한後漢) 이래로 도道가 망하고 문文이 피폐하여 이단異端이 아울러 일어나니, 당唐나라 정관貞觀․개원開元 연간의 전성기를 지나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와 요숭姚崇․송경宋璟 같은 어진 재상이 보필하였으나 이것을 바로잡지 못하였는데, 홀로 한문공韓文公이 포의布衣로 일어나 담소하면서 지휘하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공公을 따라서 다시 정도正道로 돌아온 지 이제 3백 년이 되었다.
문풍文風은 8대代의 쇠함을 일으키고 도道는 천하天下의 빠짐을 구제하였으며, 충성은 인주人主의 노여움을 범하고 용맹은 삼군三軍의 장수를 빼앗았으니, 이 어찌 천지天地에 참여되고 성쇠盛衰의 시운에 관계되어 호연浩然히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일찍이 하늘과 사람의 분별을 논하여 이르기를 “사람은 이르지 못하는 것(못하는 짓)이 없으나 오직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혜가 왕王과 공公을 속일 수 있으나 돼지와 물고기를 속이지는 못하고, 힘이 천하를 얻을 수 있으나 필부匹夫와 필부匹婦의 마음은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公의 정성이 형산衡山의 구름을 걷히게 하였으나 헌종憲宗의 미혹됨을 돌리지는 못하였고, 악어의 포악함을 길들였으나 황보박皇甫鎛과 이봉길李逢吉의 비방을 그치게 하지는 못하였고, 남해南海의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아 사당에서 백세토록 제향을 받고 있으나 그 몸을 하루도 조정에서 편안히 있게 하지는 못하였으니, 공公이 능한 것은 하늘의 일이요 능하지 못한 것은 인간의 일이었다.
처음에 조주潮州 사람들은 학문을 할 줄 몰랐는데, 공公이 진사 조덕進士 趙德에게 명하여 스승이 되게 하니, 이로부터 조주潮州 선비들이 모두 문학文學과 행실行實에 독실하여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뻗쳐나갔다.
그리하여 조주潮州가 지금까지 다스리기 쉽다고 알려져 있으니, 참으로 옳다!
“군자君子가 도道를 배우면 백성을 사랑하고 소인小人이 도道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하신 공자孔子의 말씀이여!
조주潮州 사람들은 공公을 섬김에 있어 음식을 먹을 적에 반드시 공公에게 제祭를 올렸으며, 수해와 한해와 질병이 있어 소망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기도하였는데, 사당이 자사 공관刺史 公館의 뒤에 있어 백성들이 출입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지난번 태수太守가 조정에 요청하여 새 사당을 지으려 하다가 결행하지 못하였다.
원우元祐 5년(1090)에 조산랑 왕군朝散郞 王君 척滌이 와서 이 고을을 맡으면서 선비를 양성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모든 방법을 한결같이 공公을 모범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기뻐하고 복종하였다.
왕공王公은 명령을 내기를 “공公의 사당을 새로 짓기를 원한다면 들어주겠다.”라고 하니, 백성들이 기꺼이 달려와서 주성州城의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터를 잡아 1년 만에 사당이 이루어졌다.
혹자는 말하기를 “공公이 도성都城에서 만 리나 되는 조주潮州로 귀양 와서(좌천되어) 한 해가 안 되어 돌아갔으니, 죽어서 〈영혼이 있어〉 앎이 있다면 조주潮州를 돌아보고 연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공公의 신령이 천하에 있는 것은 물이 땅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가는 곳마다 있지 않은 곳이 없는데, 조주潮州 사람들이 특히 공公을 깊이 믿고 지극히 생각하여 쑥을 태워 올리면서 서글픈 마음을 품고 혹시라도 뵈올 듯이 여긴다.
비유하면 우물을 파서 샘물을 얻고는 물이 오로지 이곳에만 있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 어찌 이치이겠는가?”
원풍元豐 7년(1084)에 조칙을 내려 공公을 창려백昌黎伯으로 봉하였기 때문에, 방榜에 “창려백 한문공昌黎伯 韓文公의 사당”이라고 써 붙였다.
조주潮州 사람들이 이 사실을 비석에 써줄 것을 청하니, 인하여 시詩를 지어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노래하여 공公을 제사하게 하였다.
공公이 옛날 백운향白雲鄕에서 용을 타고 손으로 운한雲漢을 열어 천장天章을 나누니, 천손天孫이 운금雲錦의 치마를 짜주었네.
표연飄然히 바람을 타고 상제上帝의 곁에 와서 아래로 탁세濁世의 비강粃糠을 쓸어주었네.
서쪽으로 함지咸池에 노닐고 부상扶桑을 스쳐가니, 초목草木들도 모두 밝은 광채를 입었네.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따라 함께 날아오르니, 장적張籍과 황보식皇甫湜 등은 땀 흘리며 달리다가 넘어져 가물가물 사라지는 햇빛처럼 바랄 수가 없었네.
글을 지어 부처를 비방하고 군왕君王을 비판하였으니,
이는 남해南海를 구경하고 형상衡湘을 엿보며 순舜임금의 묘가 있는 구의산九疑山을 지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에게 조문하려 해서였네.
축융祝融이 앞에서 몰고 해약海若이 숨으니, 악어를 단속하기를 양 떼를 몰듯이 하였네.
균천鈞天에 사람 없어 상제上帝가 슬퍼하니, 노래 읊으며 공公을 불러오라고 아래로 무양巫陽을 보내왔네.
들소의 희생을 올리고 닭 뼈로 점을 치며 우리 술잔 올리니, 아! 찬란한 붉은 여지荔枝와 황금색 향초香蕉라오.
공公이 조금도 머물지 않아 우리들 눈물 흘리니, 편연翩然히 머리 풀어 산발하고 대황大荒에 내려오시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