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篇이 以疏爲序事之文하니 絶是史사마천遷風旨니라
十年十月戊子
에 資政殿大(太)學士右諫議大夫
은 言
하노이다
故
墳墓
와 及其父祖妃夫人子孫之墳
이 在
者 二十有六
이요 在
者 十有一
이로되 皆蕪廢不治
하니 父老過之
에 有流涕者
하니이다
하고 復以八都兵
으로 討
하고 幷
월주越州하야 以奉
而自居於
항주杭이러니 及
동창昌以
월주越叛
에 則誅
동창昌而幷
월주越하야 盡有
절동浙東절서西之地
하야
傳其子
하고 至其孫忠顯王
인좌仁佐하야 遂
하고 而
인좌仁佐之弟忠懿王俶
이 又大出兵攻
이경景하야 以迎周世宗之師
러니 其後
에 卒以國入覲
하야 三世四王
이 與五代
로 相終始
하니이다
天下大亂
에 豪傑蜂起
라 러니 旣覆其族
하고 延及于無辜之民
하야 罔有孑遺
어늘
而
오월吳越은 地方千里
요 帶甲十萬
이요 鑄山煮海
하고 象犀珠玉之富
가 甲於天下
라 然
이나 라
是以로 其民이 至於老死히 不識兵革하고 四時嬉遊하야 歌鼓之聲이 相聞하야 至于今不廢하니 其有德於斯民이 甚厚니이다
獨오월吳越은 不待告命하고 封府庫, 籍郡縣하야 請吏于朝하야 眎去其國을 如去傳舍하니 其有功於朝廷이 甚大니이다
今전씨錢氏功德이 殆過於두융融이어늘 而未及百年에 墳墓不治하야 行道嗟傷하니 甚非所以勸獎忠臣, 慰答民心之義也니이다
臣
은 願以
廢佛寺曰妙因院者
로 爲觀
하고 使
전씨錢氏之孫爲道士曰自然者
로 居之
하야
凡墳墓之在
전당錢塘者
는 以付
하고 其在
임안臨安者
는 以付其
임안현縣之
정토사淨土寺僧曰
도미道微하야 歲各度其徒一人
하야 使世掌之
하고
籍其地之所入하야 以時修其祠宇하며 封殖其草木호되 有不治者어든 현령縣令승丞이 察之하야 甚者는 易其人이면 庶幾永終不墜하야 以稱朝廷待전씨錢氏之意리이다
制曰可라하고 其妙因院을 改賜名曰표충관表忠觀이라하니라
篤生異人하야 絶類離群하니 奮挺大呼에 從者如雲이라
旣獲所歸하니 弗謀弗咨하고 先王之志를 我維行之라
天祚忠孝하야 世有爵邑하니 允文允武하야 子孫千億이라
帝謂守臣하사되 治其祠墳하야 毋俾樵牧하야 愧我後昆하라
용산龍山之陽에巋焉新宮이니 匪私于전씨錢이라 惟以勸忠이니라
非忠無君이요 非孝無親이니 凡百有位는 視此刻文하라
전편이 상소문上疏文으로 서사序事하는 글을 삼았으니, 틀림없이 사마천司馬遷의 풍격이다.
희령熙寧 10년(1077) 10월 무자일戊子日에 자정전태학사 우간의대부資政殿太學士 右諫議大夫 지항주군주사知杭州軍州事인 신 조변臣 趙抃은 아룁니다.
고 오월국왕故 吳越國王 전씨錢氏의 분묘墳墓와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 비妃와 부인夫人, 자손子孫의 분묘로서 전당錢塘에 있는 것이 26개소이고 임안臨安에 있는 것이 11개소인데, 모두 황폐하여 다스려지지 않아서 부로父老들이 이곳을 지날 적에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 무숙왕故 武肅王 전류錢鏐는 처음에 지방의 병사들을 이끌고 황소黃巢를 패주시켜 명성이 강회江淮 지방에 알려졌으며, 다시 8개 도都의 병력으로 유한굉劉漢宏을 토벌하여 월주越州를 겸병하고 동창董昌을 받들면서 자신은 항주杭州에 거주하였는데, 동창董昌이 월주越州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자, 동창董昌을 토벌하고 월주越州를 겸병하여 절동浙東과 절서浙西의 땅을 모두 소유하였습니다.
그 아들 문목왕 원관文穆王 元瓘에게 전하고, 그 손자인 충현왕 인좌忠顯王 仁佐에 이르러 마침내 이경李景의 군대를 격파하여 복주福州를 점령하였으며, 인좌仁佐의 아우 충의왕 숙忠懿王 俶이 또다시 크게 군대를 내어 이경李景을 공격하고는 후주 세종後周 世宗의 군대를 맞이하였는데, 그 후 끝내 나라를 바치고 우리 조정에 입근入覲하여 3대의 네 왕이 오대시대五代時代와 서로 시종을 같이하였습니다.
천하가 크게 혼란하자 호걸들이 봉기하였으니, 이때에 몇 주州의 땅을 가지고 황제皇帝라는 이름을 도둑질한 자들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는데, 그들은 집안을 전복시키고 화가 죄 없는 백성들에게까지 미쳐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월吳越은 영토의 넓이가 천 리이고 무장한 군사가 10만 명이나 되며 산에서 구리를 주조하고 바다에서 소금을 구웠으며, 코끼리와 물소와 주옥珠玉의 풍부함이 천하에 으뜸이었는데도 끝내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아서 바치는 공물이 길에 이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그 백성들이 늙어 죽음에 이르도록 전쟁을 알지 못하고 사시四時에 즐겁게 놀아 노래하고 북 치는 소리가 서로 들려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니, 그 백성들에게 은덕이 있음이 매우 두텁습니다.
황송皇宋이 천명을 받으시자, 사방에 참람하게 난을 일으킨 자들이 차례로 평정되었는데, 촉蜀과 강남江南은 지역이 험하고 거리가 먼 것을 믿고는 우리 군대가 그들의 성 밑에 이르러 힘이 꺾이고 형세가 곤궁한 뒤에야 손을 묶고 항복하였으며, 하동河東의 유씨劉氏는 백 번 싸우며 죽음으로 지켜 왕사王師에 항거해서 해골이 쌓여 성이 되고 피가 흘러 못이 되어서, 천하의 힘을 다하고서야 겨우 이겼습니다.
그런데 홀로 오월吳越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함봉하고 군현郡縣의 호구를 적어서 조정에 관리를 청하여 나라 버리기를 전사傳舍(여관방)를 떠나듯이 하였으니, 조정에 공功이 있음이 매우 큽니다.
옛날에 두융竇融이 하서河西 지방을 가지고 한漢나라로 귀순하자, 광무제光武帝는 우부풍右扶風에게 조칙을 내려 그 부조父祖의 분묘를 수리하게 하고 태뢰太牢로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전씨錢氏의 공덕이 두융竇融보다 큰데도 백 년이 되기 전에 분묘가 다스려지지 아니하여 길 가는 사람들이 한숨 쉬며 서글퍼하니, 충신을 권장하며 민심을 위로하고 보답하는 의리가 절대로 아닙니다.
신臣은 원하옵건대, 용산龍山의 폐지된 불사佛寺 중에 묘인원妙因院이라는 절을 도관道觀으로 만들고 전씨錢氏의 후손 중에 도사道士가 된 자연自然이라는 자를 이곳에 거주하게 하소서.
그래서 전당錢塘에 있는 분묘는 자연自然에게 맡기고, 임안臨安에 있는 것은 임안현臨安縣의 정토사淨土寺에 있는 중 도미道微에게 맡겨서, 해마다 각각 승려 한 사람을 도度하여(출가시켜서) 대대로 관장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 토지의 수입을 기록하여 수시로 사우祠宇를 보수하며 초목을 봉식하도록 하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현령縣令과 승丞이 살펴, 심한 자는 사람을 바꾸도록 한다면, 거의 영원히 실추하지 않아 조정에서 전씨錢氏를 대우하는 뜻에 걸맞게 될 것입니다.
신 조변臣 趙抃은 죽을죄를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제制에 “가可하다.”고 하시고, 묘인원妙因院을 고쳐 표충관表忠觀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천목산天目山에서 초수苕水가 나오니, 산세山勢가 용龍이 나는 듯 봉鳳이 춤추는 듯 임안臨安에 모였네.
정기가 모여 특이한 사람 내어서 무리 중에 뛰어나니, 떨치고 일어나 크게 고함침에 따르는 자가 구름처럼 많았네.
하늘을 우러러 강물에 맹세하니 달과 별이 어두워졌고, 강한 쇠뇌로 조수를 쏘니 강해江海가 동쪽으로 흘렀네.
유한굉劉漢宏을 죽이고 동창董昌을 베어 곧바로 오월吳越 지방을 소유하니, 금권金券과 옥책玉冊이요 범을 그린 병부兵符와 용을 그린 깃발이었네.
거처하는 곳에 크게 축성하여 산천을 포락包絡(연락)하니, 왼쪽에는 전당강錢塘江이고 오른쪽에는 서호西湖가 있어 섬의 오랑캐들을 견제하였네.
세시歲時로 돌아와 쉬며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베푸니, 신인神人처럼 빛나는 분이 옥띠를 두르고 말을 탔네.
41년 동안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광주리에 조공하는 물건이 이어지니, 큰 자개와 남쪽 지방에서 나오는 좋은 금이었네.
다섯 조정이 혼란하여 나라를 맡길 수 없기에 삼대三代의 왕이 계승하여 서로 후덕한 분 기다렸는데,
이미 돌아갈 곳을 얻으니 모의하지 않고 묻지 않고 선왕의 뜻 자신이 행하였네.
하늘이 충효忠孝한 분 도와서 대대로 관작官爵과 읍邑을 소유하게 하니, 진실로 문무文武 겸전하여 자손들이 천억이나 되었네.
황제께서 이 지역을 지키는 신하에게 이르시되 그의 사당과 분묘를 다스려 여기에서 나무하고 짐승을 방목해서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라 하시었네.
용산龍山의 남쪽에 새 사당 드높이 솟으니, 전씨錢氏에게 사사로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충신을 표하려고 해서이네.
충忠이 아니면 군주가 없고 효孝가 아니면 어버이가 없으니, 모든 지위에 있는 자들은 이 새겨놓은 글을 볼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