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주周之盛也엔 鼎爲宗廟之觀美而已러니 及其衰也엔 爲주周之患을 有不可勝言者라
然이나 三國之君이 未嘗一日而忘주周者는 以寶在焉故也라
得鼎者 未必能存주周로되 而不得者는 必碎之하니 此九鼎之所以亡也니라
夫
주周有鼎
이면 한漢亦有鼎
이니 니 豈三趾兩耳之謂哉
리오
惟五帝三代及진秦漢以來로 受命之君은 靡不有玆鼎하니 鼎存而昌하고 鼎亡而亡이라
蓋鼎必先壞면 而國隨之하니 豈有易姓而鼎猶傳者乎아
不寶此器하고 而拳拳於一物은 孺子之智요 婦人之仁이니 嗚呼悲夫라
우禹임금이 구정九鼎을 주조한 것은 기물로 사용하려는 것이었고 애당초 보물로 여긴 것이 아니며, 물건을 형상하여 꾸민 것 또한 백성들로 하여금 상서롭지 못한 물건을 멀리하게 한 것이 아니었으니, 무왕武王이 이것을 낙읍洛邑으로 옮기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게 이미 비웃음을 당하였다.
주周나라가 한창 흥성할 적에는 이 솥이 종묘의 아름다운 구경거리가 될 뿐이었는데, 쇠망함에 이르러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주周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필부匹夫는 죄가 없고 구슬을 품고 있는 것이 죄이니, 주周나라가 쇠망할 적에 주周나라의 천자天子가 필부匹夫와 무엇이 달랐겠는가?
누가 저 구정九鼎이 주周나라를 다투는 뿔과 이빨이 될 줄 알았겠는가?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초 장왕楚 莊王이 처음으로 구정九鼎의 무게와 크기를 물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진秦․제齊․초楚의 세 나라가 모두 이것을 욕심내니, 주周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해서 마치 호랑이 세 마리가 침을 흘리면서 자신을 노려보는 것처럼 여겼다.
주周나라 종묘宗廟의 제사를 끊더라도 다른 나라의 침공을 불러들일 수 없고, 주周나라의 땅을 다 나누어 갖더라도 나라를 살지게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세 나라의 군주君主가 일찍이 단 하루도 주周나라를 잊지 못했던 것은 이 보물이 주周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 나라가 이것을 서로 다투니, 주周나라가 어느 나라에 주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솥을 얻은 나라는 반드시 주周나라를 보존시키지는 못하는데, 얻지 못한 나라는 반드시 주周나라를 쳐부술 것이니, 이것이 구정九鼎이 없어지게 된 이유이다.
주 현왕周 顯王 42년에 송宋나라 태구太丘의 사社가 망하자 구정九鼎이 사수泗水로 매몰되니, 이것은 주周나라 사람들이 구정九鼎을 훼손하여 화를 늦추고는 신神의 요망한 말에다가 가탁해서 변명한 것이다.
그런데 진 시황秦 始皇과 한 무제漢 武帝는 처음으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구정九鼎을 끌어냈으니, 이는 아이들의 식견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분음汾陰(분수汾水 남쪽)의 솥은 한漢나라 정鼎이고, 주周나라 정鼎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주周나라에 정鼎이 있으면 한漢나라에도 정鼎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주역周易》에서 말한 “자리를 바르게 하여 명령命令을 엄중嚴重하게 내린다.”는 것이니, 어찌 다리 셋에 귀가 둘인 그 솥을 말한 것이겠는가?
한스럽게도 오구수왕吾丘壽王은 소자小子여서 아첨으로 등용되어 그 뜻을 끝까지 규명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한정명漢鼎銘〉을 지어서 후세의 군자君子에게 남겨주는 것이다.
오제五帝와 삼대三代와 진秦․한漢 이래로 천명天命을 받은 군주는 이 정鼎(괘상卦象으로 천자의 상징)을 소유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정鼎이 보존되면 나라가 창성하고 정鼎이 없어지면 나라가 망하였다.
만일 정鼎이 먼저 무너지면 나라도 따라서 망하였으니, 어찌 성姓이 바뀌면서 정鼎이 그대로 전해지는 경우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 정鼎을 보물로 여기지 않고 우禹임금의 구정九鼎 한 물건에만 연연해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지혜요 부인의 인仁이니, 아!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