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
에 하고 謝遣諸將
한대 과 이 建遣
하야 行邊飭武備
하다
유사웅師雄이 許之
한대 하야 以獻
하니 百官皆賀
하고 하다
時에 西域貢馬하니 首高八尺이요 龍顱而鳳膺하고 虎脊而豹章이라
할새 振鬣長鳴
하니 萬馬皆瘖
이요 父老縱觀
하고 以爲未始見也
라하니라
明年
에 羌
이 有良馬
로되 不敢進
하고 請於邊吏
하야 願以餽
이어늘 詔許之
하다
爲
희하熙河帥
하니 서번西蕃에 有貢
者
어늘 有司以非入貢歲月
이라하야 留其使與馬於邊
하니 장지기之奇爲請
호되 乞不以時入
이라
事下禮部
하니 軾時爲
하야 判狀云 朝廷
이 方却走馬以糞
이어늘 正復汗血
을 亦何所用
이리오하야 事遂寢
하다
于時에 兵革不用하야 海內小康하니 馬則不遇矣어니와 而人少安이라
軾嘗私請於承議郞
하야 畫當時三駿馬之狀
하고 而使
귀장청의결鬼章靑宜結校之
하야 藏於家
하다
四年三月十四日
에 軾在
혜주惠州할새 謫居無事
어늘 閱舊書畫
라가 追思一時之事
하고 而歎三馬之神駿
하야 乃爲之贊
하노라 曰
명마名馬를 찬贊하였으나, 그 뜻은 온전히 본 조정에서 명마名馬를 물리는 데 있다.
원우元祐 초년에 성상聖上이 옥문관玉門關을 폐쇄하고 제장諸將을 파견하는 것을 사절하자, 태사 문언박太師 文彦博과 재상 여대방宰相 呂大防, 범순인范純仁이 건의하여 제생諸生인 유사웅游師雄을 보내어 변방을 순행하면서 무비武備를 감독하게 하였다.
유사웅游師雄이 희하熙河에 이르니, 번관 포순蕃官 包順이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숙호熟戶를 가지고 변방의 근심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다.
유사웅游師雄이 이를 허락하자, 마침내 교활한 오랑캐의 큰 수령 귀장청의결鬼章靑宜結을 사로잡아 바치니, 백관百官들이 모두 축하하고 사자를 보내어 영유릉永裕陵(신종神宗의 능陵)에 고告하였다.
이때 서역에서 말을 바치니, 머리 높이가 8척이고 용龍의 머리에 봉황의 가슴이었으며 호랑이 등마루에 표범의 무늬였다.
이 말이 동화문東華門을 나서서 천사감天駟監으로 들어갈 적에 갈기를 떨치고 길게 우니, 수많은 말들이 모두 울지 못하였고, 부로父老들은 한껏 구경하고는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황상皇上은 이때 공손하고 침묵하여 도道를 생각해서 팔준마八駿馬가 조정에 있었으나 일찍이 한 번도 돌아보지 않으셨다.
그 뒤에 어인圉人이 제때에 기거起居하게 하지 못해서 말 중에 죽은 것이 있었으나 황상皇上은 그의 죄를 묻지 않으셨다.
다음 해에 오랑캐인 온계심溫溪心이 좋은 말이 있었으나 감히 황제皇帝에게 올리지 못하고, 변방 관리에게 청해서 태사 노국공太師 潞國公(문언박文彦搏)에게 선물하려고 하였는데, 황제께서 이것을 허락하였다.
장지기蔣之奇가 희하熙河의 장수가 되었는데, 서번西蕃에서 준마인 한혈마汗血馬를 바치는 자가 있었으나 유사有司가 입공入貢하는 해와 달이 아니라고 하여 그 사자와 말을 변방에 체류시키니, 장지기蔣之奇가 조정에 제철이 아니라도 받아줄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이 일을 예부禮部에 내렸는데, 내가 당시 대종백大宗伯이 되어서 판결하는 글에 이르기를 “현재 조정이 잘 달리는 말을 물려서 똥처럼 여기는데, 바로 다시 한혈마汗血馬를 또한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이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때 병기와 갑옷을 사용하지 않아서 해내海內가 다소 편안하니, 말에게는 불우하였으나 인민人民들은 다소 편안하였다.
내 일찍이 승의랑 이공린承議郞 李公麟에게 사사로이 청하여 당시 세 준마駿馬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귀장청의결鬼章靑宜結로 하여금 교정하게 해서 이것을 집에 보관하였다.
소성紹聖 4년(1097) 3월 14일에 내가 혜주惠州에 있을 적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 일이 없으므로 옛날 서화書畫를 보다가 한때의 일을 추억하고 세 마리 말의 신준神駿함을 탄식하여 마침내 찬贊을 짓는다.
대대로 사납고 교만해서 이사장군貳師將軍(이광리李廣利)을 도망하게 하고 표요장군嫖姚將軍(곽거병霍去病)을 패주하게 하였네.
지금 조정에서 호피虎皮와 초피貂皮 옷을 입고 천기天驥를 바치고 궁정에 서 있네.
8척의 용마龍馬 정신이 아주 뛰어나서 장차 서쪽으로 달려가 곤륜산崑崙山의 요지瑤池에서 잔치할 듯하네.
상제上帝께서 백성을 염려하여 마침내 아래로 내려와 부르니, 돌아가는 구름을 밟고서 방요房妖의 별자리로 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