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俗之患은 患在悲樂不以其正하니 非不以其正이요 其所取以爲正者非也니 請借子以明其正호리라
子之所以悲者는 惑於得也요 父兄妻子之所以悲者는 惑於愛也니 惟不與於己者는 則不惑하고 亦不悲하나니라
夫惑則悲하고 不惑則不悲하나니 人宜以惑者爲正歟아
然이나 子亦有所樂者하야 曰 吾之所以爲吾者 豈以是哉리오
雖失是나 其所以爲吾者猶存이면 則吾猶可樂焉已어늘
而不樂하고 又從而悲之는 則亦不忍夫天下之凡愛我者之悲하고 而不釋夫天下之凡惡我者之喜也니라
夫愛我而悲하고 惡我而喜는 是知我之粗也요 樂其所以爲吾者存은 是自知之深也어늘 人不以自知之深爲正하고 而以知我之粗者爲正이면 是得爲正也歟아
09. 바름을 밝힘 벼슬을 잃고 동쪽으로 돌아가는 우급于伋을 전송하다
세속世俗의 병통은 슬픔과 즐거움을 바름으로써 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바름으로써 하지 않는 것이 아니요 취하여 바르다고 여기는 것이 잘못된 것이니, 청컨대 그대를 빌어서 바름을 밝혀보겠다.
그대가 관직을 잃었을 적에 그대를 위해서 슬퍼하기를 그대가 스스로 슬퍼하는 것과 같이 하는 자가 있는가?
또 그대의 부형과 처자가 그대를 위해서 슬퍼하는 것과 같이 하는 자가 있는가?
그대가 슬퍼하는 이유는 얻음에 미혹된 것이요, 부형과 처자가 슬퍼하는 이유는 사랑에 미혹된 것이니, 오직 자기와 상관이 없으면 미혹되지도 않고 또한 슬퍼하지도 않는 것이다.
미혹되면 슬퍼하고 미혹되지 않으면 슬퍼하지 않으니, 사람은 마땅히 미혹된 것을 바름으로 삼아야 하는가?
아니면 장차 미혹되지 않은 것을 바름으로 삼아야 하는가?
미혹되지 않은 것을 바름으로 삼는다면 슬퍼하지 않는 것이 바른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또한 즐거워하는 것이 있어서 말하기를 “내가 내가 된 이유가 어찌 이 관직 때문이겠는가?
비록 이 관직을 잃었으나 내가 된 이유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내 오히려 즐거울 수 있다.”라고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이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또 따라서 슬퍼하는 것은 천하에 그대를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내(그대)가 관직을 잃은 것을 슬퍼함을 차마 버릴 수 없고, 저 천하에 그대를 미워하는 자들이 모두 내(그대)가 관직을 잃은 것을 기뻐함을 그대로 두지 못해서이다.
나를 사랑하여 슬퍼하고 나를 미워하여 기뻐하는 것은 나를 대강 아는 것이요, 내가 된 이유가 그대로 남아 있음을 즐거워하는 것은 나를 깊이 아는 것인데, 사람들이 자기를 깊이 아는 것을 바름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를 대강 아는 것을 바름으로 여긴다면, 이것을 바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원컨대 그대를 위하여 그 바름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알면 그대는 장차 종신토록 즐거워하고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한가롭고 한가롭게 노닐어서, 그대로 한 해를 마친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