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장생莊生齊物我見解로되 而篇末은 類滑稽하야 可愛라
소자蘇子曰 居士는 可謂有道者也니라 或曰 居士는 非有道者也라
有道者
는 無所挾而安
이어늘 居士之於
에 捐世俗之所爭
하고 而拾其所棄者也
니 烏得爲有道乎
아
挾五物而後安者는 惑也요 釋五物而後安者도 又惑也라
且物
은 未始能累人也
니 도 且不能爲累
어든 而況此五物乎
아
吾與物이 俱不得已而受形於天地之間하니 其孰能有之리오
而或者以爲己有하야 得之則喜하고 喪之則悲하나니라
今육일거사居士 自謂육일거사六一하니 是其身이 均與五物爲육일거사一也니 不知로라 其有物耶아
居士與物이 均爲不能有하니 其孰能致得喪於其間이리오
雖然이나 自一觀五하면 居士猶可見也어니와 與五爲六이면 居士不可見也니 居士殆將隱矣리라
이 글은 장생莊生(장주莊周)의 물物과 아我가 똑같다는 견해見解에 근본하였는데, 편篇 끝에서는 골계滑稽와 유사하여 사랑스럽다.
내(소자蘇子)가 말하기를 “거사居士(육일거사六一居士)는 도道가 있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자, 혹자가 이르기를 “거사居士는 도道가 있는 자가 아니다.
도道가 있는 자는 간직한 바가 없이 편안한데, 거사居士는 다섯 가지 물건에 있어서, 세속世俗이 다투는 것은 버리고 세속世俗이 버리는 것은 주웠으니, 어찌 도道가 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섯 가지 물건을 소유한 뒤에 편안한 것은 미혹된 것이요, 다섯 가지 물건을 버린 뒤에 편안한 것도 미혹된 것이다.
또 물건은 애당초 사람을 얽맬 수 없으니, 높은 수레와 관복과 홀과 인끈도 누累가 될 수 없는데, 하물며 이 다섯 가지 물건이겠는가?
물건이 사람을 얽맬 수 있는 것은 자기가 그것을 소유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기와 물건이 모두 부득이不得已하여 천지天地의 사이에서 형체를 받고 태어났으니, 그 누가 이것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혹자는 자기 것이라고 생각해서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슬퍼한다.
지금 거사居士는 스스로 자신을 육일거사六一居士라 하였는데, 이는 자기 몸이 다섯 물건과 하나가 된 것이니, 알지 못하겠다, 이것은 거사가 물건을 소유한 것인가?
거사와 물건이 똑같이 소유할 수 없으니, 그 누가 그 사이에 득실을 두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거사居士는 도道가 있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입장에서 다섯 가지를 보면 거사居士를 오히려 볼 수 있지만, 다섯 가지와 더불어 여섯이 되면 거사居士를 볼 수 없으니, 거사居士는 아마도 장차 다섯 가지 물건과 하나가 되어 은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