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下之勢 未有可以必成者也로되 而英雄之士는 常因其隙而入于其間하여 堅忍而不變하니 是以로 天下之勢 遂成而不可解니라
强者는 不能以相幷이요 而弱者는 不能以相服이니 其德이 不足以相君臣이요 而其兵이 不足以相呑滅일새니라
天下大亂
하여 離而爲
하고 북조北又自離而爲
동위東서위西하며 其君臣
이 又自相簒取而爲七代
라가 至於
而後
에 合而爲一
이니라
蓋其間百有餘年之中에 其賢君名臣累累而出者 不爲少矣니라
然而南不能渡황하河하여 以有北之民하고 而北不能過양자강江하여 以侵南之地하니 豈其百年之間에 南無間之足乘이요 而北無隙之可入哉아
取之
진晉하고 取之
송宋하고 取之
제齊하고 取之
양梁하고 而
取之
니라
其間非小也
로되 而其四隣
이 拱手遠望
하고 而莫敢入
하니 也
니라
北方之人은 其力不足以幷南이요 而南方之勢는 又固不可以爭衡於中國이니 則七代之際엔 天下將不可合耶야
嘗試論之
컨대 송宋무제武之際
는 天下將合之際也
니라
旣死
에 而
후진秦地大亂
이어늘 무제武帝擧
하여 長
以攻
후진秦한대 兵不勞而
관중關中定
하니 此天下之一時也
니라
席不及煖
하고 兵不及息
하여 而奔走以防
강남江南之亂
하고 留
하여 以抗四方强悍之
하니 則天下之勢 已遂去矣
니라
且此惟不能因天下之勢而遂成之也니 則夫天下之勢 亦隨去之而已矣니라
조조曹操之不能過江以攻
손권孫權은 力有所未足也
요 而
손권孫權終莫肯求逞於
중국中國은 蓋其志將以僥倖乎北方大亂然後
에 요 而非以爲其地之足以抗衡於
중국中原也
리라
使
무제武帝旣入
관중關에 因而居之
하여 以鎭撫其人民
하며 강남南漕
강회江淮之資
하고 西引
파한巴漢之粟
하며 而內因
관중關中之盛
하여 厲兵秣馬
하고 以問四方之
인댄 當此之時
에 天下可以指麾而遂定矣
어늘 而何
강남江南之足以芥蔕夫吾心哉
아
故
로 夫有可以取天下之勢而不顧
하고 以求
하여 而遂失之者
는 송宋무제武之罪也
니라
所惜者
는 송宋무제武志在於
이요 而不在於一天下
니라
大略조조曹操之不能力獎王室하고 而卒貽조비曹丕하여 以稱帝業하니 病亦在此니라
유독 송宋 무제武帝의 실착한 부분만을 거론하였으니, 또한 천고에 특별한 식견을 보인 것이다.
영웅英雄은 천하의 허술한 틈새를 잘 이용하여 천하의 형세를 이룬다.
천하의 형세가 꼭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데도, 영웅은 항상 그 틈새를 이용하여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서 꾹 참고 견디어 변개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천하의 형세가 결국 이루어져서 해체할 수 없게 된다.
진晉나라 이하의 세대는 천하가 어찌 그리도 어지러웠는지?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병합하지 못하고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니, 그 덕德이 〈요순堯舜처럼〉 서로 군신 노릇하기에 부족하고 그 병력이 서로 탄멸呑滅하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운 나머지 갈라져 남조南朝와 북조北朝가 되고, 북조北朝(北魏)가 또 갈라져서 동위東魏와 서위西魏가 되었으며, 그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찬탈하여 칠대七代가 되었다가 수隋나라에 이르러서야 일곱 나라가 합하여 한 나라가 되었다.
대략 그 사이 백여 년 동안에 현군賢君과 명신名臣이 끊임없이 출현한 것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쪽은 황하黃河를 건너가서 북쪽의 인민을 소유하지 못했고, 북쪽은 양자강揚子江을 지나가서 남쪽의 땅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백 년 사이에 남쪽에는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북쪽에는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었던 것이겠는가?
칠대七代의 시대에는 천하에 늘 변란이 있었다.
송宋나라는 진晉나라에서 취하고, 제齊나라는 송宋나라에서 취하고, 양梁나라는 제齊나라에서 취하고, 진陳나라는 양梁나라에서 취하고, 주周나라와 제齊나라는 후위後魏에서 취하였다.
이과 같은 다섯 차례 허술한 틈이 있던 시대에는 쉴 새 없이 교전이 벌어지고 내란이 일어나 구제할 수 없었다.
그 빈 틈새가 적지 않았으나 사방에 있는 이웃 나라들은 팔짱을 낀 채 멀리서 바라만 보고 감히 그 틈새로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아마 나라를 취득한 것은 원래 나라를 세울 만한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고 창졸간에 일어난 비상사변의 기회를 탄 것이 아니리라.
북방의 사람은 그 힘이 남쪽을 병합하기에 부족하고 남방의 형세는 또 진실로 중국과 겨룰 수 없었으니, 칠대七代의 시대에는 천하가 장차 합할 수 없었던 것인가?
일찍이 시험 삼아 논해보건대, 요홍姚泓과 송宋 무제武帝 때는 천하가 장차 통합될 수 있는 시기였다.
요흥姚興이 죽자 후진後秦의 지역이 크게 어지럽거늘 무제武帝가 강남江南의 군사를 이끌고 길이 휘몰아 가서 후진後秦을 쳤는데, 군사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도 관중關中이 평정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천하가 한 번 통합되는 시기였다.
유목지劉穆之가 죽자 관중關中이 조용하지 못했다.
앉은 자리가 미처 따스해질 겨를도 없고 군사가 미처 쉴 시간도 없이 바삐 달려가서 강남江南의 난亂을 막고, 어린 자식과 잔약한 장수를 머물러두어 사방의 강한强悍한 노적虜敵을 막았으니 천하天下의 형세가 이미 떠나버렸다.
이는 천하의 형세에 순응하여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하의 형세 또한 따라서 떠난 것일 따름이다.
또한 손권孫權과 조조曹操의 사례에서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조曹操가 양자강을 지나가서 손권孫權을 치지 못한 것은 힘이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고, 손권孫權이 끝내 중국中國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마 그의 뜻이 장차 북방北方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그런 연후에 위魏나라가 피폐해진 시기를 타서 군사를 일으켜 달려가 치려고 했던 것이지, 그 땅이 족히 중원中原에 대항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 아니었으리라.
가령 무제武帝가 이미 관중關中에 들어간 뒤에, 그대로 거기서 살면서 그곳 인민人民을 진무鎭撫하며, 남쪽으로는 강회江淮의 물자를 실어오고 서쪽으로는 파한巴漢의 곡식을 실어들이며, 안으로 관중關中의 풍성함을 인하여 군사를 양성하고 말을 먹이며 사방에서 〈신복臣服하지 않는 사람들의〉 죄를 물었더라면, 이때에 천하天下를 잘 지휘하여 평정할 수 있었거늘, 어찌 강남江南의 일이 나의 마음에 걸렸겠는가?
그 마음은 장차 진晉나라를 취할 일에 두어 그 사람들이 남쪽에서 배반할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 마음이 두렵고 불안하여 천하의 형세를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급히 서두르지 말고, 작은 이익에 정신을 팔지 말아야 한다.
급히 서두르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정신을 팔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천하의 형세를 취할 수 있었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임금의 자리를 옮겨와서 결국 잃은 것은 송宋 무제武帝의 죄이다.
송宋 무제武帝가 후진後秦으로 쳐들어간 하나의 실착을 논한 것은 확론確論이라 할 수 있겠다.
애석한 것은 송宋 무제武帝의 뜻이 구석九錫에 있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에 있지 않은 점이다.
대략 조조曹操는 왕실王室을 힘써 돕지 않고 끝내는 조비曹丕에게 주어 제업帝業을 칭하게 하였으니, 그 병통 또한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