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之學者 未嘗求仕
로되 學成則
하니 蓋仕者
는 이요 非爲己也
라
今世則不然
하여 以科擧取人
하여 雖有
,
이라도 非科擧
면 無由進於行道之位
라
故
로 父敎其子
하고 兄勉其弟
하여 科擧之外
엔 하니 라
今爲士者 多爲父母之望, 門戶之計
하여 不免
이나 亦當
其
, 俟其時
하여 을 이요 不可貪躁
하여 以喪其志也
니라
古人養親
에 有躬耕者
하며 有
者
하며 有負米者
하니 夫躬耕, 行傭, 負米之時
에 勤苦甚矣
니 何暇讀書乎
아
惟其
하여 旣修子職
하고 而餘力學文
이로되 亦可進德
이어든 今日之爲士者
는 不見爲親任勞
를 如古人者
하고 只是科業一事 是親情之所欲
이라하여 今旣不免做功
하니 則科業
이 雖與
不同
이나 亦是坐而讀書作文
이라 其便
躬耕, 行傭, 負米 不翅百倍
라
故
로 先賢曰 不患妨功
이요 惟患奪志
라하니 若能爲
而不喪其守
면 則科業理學
이 可以竝行不悖矣
리라
今人
은 名爲做擧業而實不著功
하고 名爲做理學而實不
하여 若責以科業
이면 則曰 我志於理學
하여 不能
於此
라하고
若責以理學이면 則曰 我爲科業所累하여 不能用功於實地라하여
如是兩占便宜
하여 度日
이라가 卒至於科業理學
이 兩無所成
하니 老大之後
에 雖悔
인들 何追
리오
人於未仕時엔 惟仕是急하고 旣仕後엔 又恐失之하나니 如是汨沒하여 喪其本心者 多矣라
位高者
는 하니 道不可行
이면 則可以退矣
요 若家貧
하여 未免
면 則須
하고 辭尊居卑
하여 以免飢寒而已
라
雖曰祿仕
나 亦當廉勤奉公
하여 盡其職務
요 不可
而餔啜也
니라
옛날의 학자學者들은 일찍이 벼슬을 구하지 않았으되 학문學問이 이루어지면 윗사람이 된 자가 천거해서 등용하였으니, 벼슬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이요,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세상은 그렇지 아니하여, 과거科擧로써 사람을 뽑아, 비록 하늘의 이치를 통달한 학문과 남보다 빼어난 행실이 있더라도 과거가 아니면 치도治道를 실천할 수 있는 지위에 나아갈 길이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과거공부를〉 시키고 형은 아우에게 〈과거공부를〉 권하여, 과거 이외에는 다시 다른 방법이 없으니, 선비들의 습관이 각박해지는 것은 오로지 이에 연유한다.
다만 요즘 선비가 된 자들은 대부분 부모의 바람과 가문의 계책을 위하여 과거공부를 함을 피할 수 없으나, 또한 마땅히 그 기구를 갈고 닦으며 그때를 기다려, 급제와 낙방을 천명에 맡길 것이요, 벼슬을 탐하고 조급해 하고 마음을 끓어오르게 해서 자신의 뜻을 손상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전] ○ 學成則爲上者 擧而用之 :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사有司에게 먼저 시키고 작은 허물을 용서해 주며, 어진 이와 유능한 이를 등용해야 한다.[子曰 先有司 赦小過 擧賢才]”라고 하였는데, 이곳의 주註에 주자朱子의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현賢은 덕德이 있는 자요, 재才는 재능이 있는 자이니, 이들을 등용하여 쓰면 유사有司가 모두 적임자를 얻어 정사가 더욱 닦여지게 될 것이다.[賢 有德者 才 有能者 擧而用之 則有司皆得其人 而政益修矣]”
○ 爲人 非爲己也 :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子曰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
○ 利其器 : 《논어論語》 〈위영공衛靈公〉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자공이 인仁을 행함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공인이 그 일을 잘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기구를 예리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니, 이 고을에 삶에 그 대부의 어진 자를 섬기며, 그 선비의 인한 자를 벗 삼아야 한다.’[子貢問爲仁 子曰 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居是邦也 事其大夫之賢者 友其士之仁者]”
[해설] 과거科擧의 본래 의미는 시험 종류인 과목科目에 따라 거용擧用한다는 뜻이다. 이는 전근대시대에 관리로 채용할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실시한 시험이다. 관리를 채용할 때 시험을 보게 된 것은 중국의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한국은 신라 원성왕 4년(788)에 실시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시초이다. 당시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전원 관리로 채용되지는 못하고 보조적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점차 관리 채용 제도가 보완 정비되어, 중국에서는 수隋나라 때 본격적인 과거제가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광종 9년(958)에 후주後周의 귀화인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실시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제가 시행되는 가운데에도 상류층에게 특혜를 주는 음서제蔭敍制가 병행되기도 하여 과거제의 불완전성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과거는 문인을 중시하여 무과는 없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는 문‧무 양과가 있었다. 이 가운데 문과를 중시하였는데, 생원‧진사과와 잡과로서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등이 있었다. 생원‧진사과는 소과라 하여 15세 이상인 자가 응시할 수 있었고, 합격하면 성균관 입학 자격을 주고 하급 관리로 채용할 수 있었다. 고급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대과에 응시해야 했다. 대과에는 성균관 출신과 소과 합격생이 응시할 수 있었다. 시험은 3단계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초시初試(한성시;서울에서 실시, 관시;성균관에서 실시, 향시;각 도별로 지방에서 실시)와 복시覆試(초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이듬해 봄에 서울에서 보는 2차 시험), 어전시御殿試(복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궁정에서 실시하는 3차 시험)가 있었다. 시험 시기는 일반적으로 식년시式年試라 하여 3년에 한 번(자子, 묘卯, 오午, 유酉 - 복시를 기준으로 하고, 초시는 그 전년도에 실시)씩 실시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증광시, 알성시, 별시 등 점차 임시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과거제의 실시는 그 동안 혈연적, 정치적 편파성이 강했던 인재 등용의 관행을 탈피하여 보다 공정하게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또한 학문에 근거한 인재 거용으로 철학적 정치를 펼 수 있었다. 이는 문명국가에서 매우 모범적인 제도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과거공부에 매여서 학문을 할 수 없다.”고 하니 이 또한 미루어 핑계 대는 말이요 성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옛날 사람은 부모를 봉양함에 몸소 밭을 갈았던 이도 있었으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품팔이한 이도 있었으며, 쌀가마니 지는 일을 한 이도 있었으니, 몸소 밭 갈고, 다니며 품팔이하고, 쌀가마니를 질 때에 근고勤苦가 심하였을 것이니, 어느 겨를에 글을 읽었겠는가.
오직 그 부모를 위해 수고로움을 자임自任하여 이미 자식의 직분을 닦고 남은 여가에 글을 배웠는데도, 또한 덕에 나아갈 수가 있었거든, 요즈음 선비된 자들은 어버이를 위하여 수고로움을 맡기를 옛날 사람과 같이 하는 자를 보지 못하겠고, 다만 과거공부 한 가지 일이 곧 어버이의 마음이 바라는 것이라 하여 이제 이미 과거공부함을 면하지 못하니, 그렇다면 과거공부가 비록 이학理學과는 같지 않으나 역시 앉아서 책을 읽고 글을 짓는 것이어서 몸소 밭 갈고, 다니며 품팔이하고, 쌀가마니를 지는 일보다 편함이 백배일 뿐만이 아니다.
하물며 남은 여가에 성리性理에 관한 책을 읽을 수 있음에랴.
다만 과거공부를 하는 자들은 으레 과거에 급제하느냐 낙방하느냐에 동요되어 마음이 항상 조급하고 다투어, 도리어 수고롭게 일함이 마음을 수양하는 공부를 해치지 않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선현의 말씀에 “〈과거공부가〉 공부에 방해될까를 걱정하지 말고, 오로지 뜻을 빼앗길까를 걱정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만약 과거공부하는 일을 하면서도 지켜야 할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과거공부와 이학공부를 병행해도 서로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말로는 과거공부科擧工夫를 한다 하나 실제로는 과거공부를 하지 않고, 말로는 이학공부理學工夫를 한다 하나 실제로는 착수하지 아니하여, 만약 과거공부로써 질책하면 말하기를 “나는 이학에 뜻을 두고 있어서 이런 데에 연연해 할 수 없다.”고 하며,
만약 이학공부로써 질책하면 말하기를 “나는 과거공부에 얽매여서 실지에 힘을 쓸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양쪽으로 편리한 처지를 차지하여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 세월만 보내다가 마침내는 과거공부와 이학공부 두 가지 다 이루는 바가 없음에 이르니, 늙은 뒤에 비록 뉘우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출전] ○ 旣修子職 而餘力學文 :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 不患妨功 惟患奪志 : 《근사록近思錄》 〈출처出處〉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사람이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과거에 뜻을 두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공부가 학문하는 일을 방해할까 걱정하지 말고 뜻을 빼앗을까 걱정해야 한다.[人不志于此 必志于彼 故科擧之事 不患妨功 惟患奪志]”
[해설] 공자孔子 이래로 유학사상儒學思想은 그 중심 문제를 항상 인간과 현실 문제에 두고 인간 스스로 주체적인 각성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내재해 있는 도덕적 본질을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미루어 우주 만물의 본질인 천덕天德을 인식하고, 천덕天德이 인간 내적으로 구현된 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 즉 성性임을 규명해 낼 것을 학문의 주된 목표로 삼고 있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인간의 도덕 본질인 성性을 회복함으로써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이루어 내는 것이 유학에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인간에게는 궁극적인 경지[天人合一]를 이룰 수 있는 단서인 천天으로부터 부여받은 성性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유학儒學은 현실 상황 속에서 그 시대적 문제의 해결을 통한 이상의 실현을 목표로 삼기도 한다.
그러므로 옛날의 학자들은 공부의 목표를 일찍이 벼슬을 구하는 데 두지 않았으며, 인재 역시 학문이 이루어지면 윗사람이 된 자가 천거해서 등용하였다. 그러다가 과거제가 실시되면서부터는 과거를 가지고 인재를 뽑으므로, 비록 학문과 행실이 남보다 뛰어나다 하더라도 과거가 아니면 이상理想과 도道를 실현할 수 있는 지위에 나아갈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이 과거공부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습관이 나빠지는 경향이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유학儒學은 일반적으로 내성외왕지도內聖外王之道, 혹은 내외합일지도內外合一之道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성외왕內聖外王, 내외합일內外合一을 이루는 것이 유학儒學에서 추구하는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따라서 유학 사상에 있어서의 학문은 단순히 ‘체계화된 지식’에 그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지식의 탐구를 주장했을 뿐 아니라,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 및 인간과 우주의 본질에 대해서도 알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관통해서 존재하는 이치를 탐구하여 궁극적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천인합일을 이루는 공부는 모두 실천實踐과 철저한 수양修養을 동반하는 공부이며, 뼈를 깎는 듯한 노력이 요구되는 공부이다. 그러므로 많은 선비들이 도학道學을 가지고 독려하게 되면 집안의 기대 때문에 과거공부에 전념하느라 학문에 힘쓸 겨를이 없다고 핑계 대기도 하고, 또 과거공부를 가지고 독려하면, 오히려 도학에 뜻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핑계 대기도 하면서 세월만 보내다가 결국은 과거든 도학이든 아무것도 이룰 수 없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공부이든 도학이든 결국 성현의 경전經典을 읽고 글을 짓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도 있다. 다만 사람이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과거에 뜻을 두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공부가 공부에 방해될까를 걱정하지 말고, 오로지 뜻을 빼앗길까를 걱정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과거는 과정으로서의 공부이므로 과거공부를 하면서도 늘 학문의 본래 의미와 목표를 염두에 두고 그 뜻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과거공부와 이학공부 두 가지를 모두 이루는 데 있어 크게 잘못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아직 벼슬하지 않을 때에는 오직 벼슬하는 것을 급무急務로 여기고, 이미 벼슬에 오른 뒤에는 또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니, 이와 같이 골몰하여 그 본심을 잃는 자가 많다.
지위가 높은 자는 도道를 베푸는 것을 중심으로 삼아야 하니, 도가 베풀어질 수 없으면 물러나야 할 것이요, 만일 집이 가난하여 녹봉을 받기 위한 벼슬을 면치 못한다면, 모름지기 내직內職을 사양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며,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머물러서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뿐이다.
비록 녹봉을 받기 위한 벼슬이라고 하나 또한 마땅히 청렴하고 부지런히 공무를 받들어 행하여 그 직무를 다해야 할 것이요, 직분을 버려두고 먹고 마시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출전] ○ 辭內就外 辭尊居卑 : 《맹자孟子》 〈만장하萬章下〉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셨다. ‘벼슬함은 가난을 위해서가 아니지만, 때로는 가난을 위한 경우가 있으며, 아내를 얻음은 봉양을 위해서가 아니지만, 때로는 봉양을 위한 경우가 있다. 가난을 위해서 벼슬하는 자는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처하며, 녹봉祿俸이 많은 것을 사양하고 적은 데에 처해야 한다.’[孟子曰 仕非爲貧也 而有時乎爲貧 娶妻非爲養也 而有時乎爲養 爲貧者 辭尊居卑 辭富居貧]”
○ 餔啜 : 《맹자孟子》 〈이루상離婁上〉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맹자께서 악정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네가 자오를 따라 〈제나라에〉 온 것은 한갓 먹고 마시기 위해서이네. 나는 자네가 옛 도道를 배우면서 먹고 마시는 것에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네.’[孟子謂樂正子曰 子之從於子敖來 徒餔啜也 我不意子學古之道而以餔啜也]”
[해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왕손가王孫賈가 물었다. ‘아랫목 신神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부엌 신神에게 잘 보이라 하니, 무슨 말입니까?’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王孫賈問曰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子曰 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
이 말에는 위衛나라의 실력자 왕손가王孫賈가 위衛나라 전체의 정치를 관장하는 위衛나라 제후인 영공靈公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자신에게 로비하고 청탁해서 잘 보이는 것이 벼슬하는 데 더 쉬우므로 자기에게 잘 보이라고 공자孔子에게 넌지시 귀띔해 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나 공자孔子가 벼슬하려는 것은 공자의 도道를 실현하여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지, 벼슬 그 자체나 출세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孔子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천명天命을 실천하고 세상에 도道를 펴는 것이었으므로 벼슬을 하기 위해 로비를 하거나 의롭지 못한 청탁을 하는 것은 천명天命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고 한 것이다.
군자의 관심은, 남과 하나가 되는 본마음[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서, 전체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집중된다. 그러므로 높은 벼슬을 하거나 유명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결과 저절로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거기에 집착하지 아니한다. 오직 벼슬을 하거나 유명해지는 바탕이 되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공자께서 칠조개漆雕開에게 벼슬을 하게 권하시자, 그는 대답하기를 ‘저는 벼슬하는 것에 대해 아직 자신할 수 없습니다.’ 하니, 공자孔子께서 기뻐하셨다.[子使漆雕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공자의 가르침의 목적은 개인적 인격 완성에 있는 것인데 많은 제자들은 학문에 진력하지 않고 벼슬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공자孔子를 실망시키곤 하였다. 그런데 칠조개漆雕開는 공자孔子가 벼슬하도록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인격이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정치를 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함으로써 다른 제자들과 다른 면을 보여 주었으므로 공자가 기뻐한 것이다.
결국 군자가 벼슬함이란 자신의 도를 실현하기 위함이지 녹봉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따라서 만약 도를 실현할 수 없다면 마땅히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는 것이 도리이다. 그러나 만약 집안이 가난하여 녹봉을 받기 위한 벼슬을 해야 할 경우라면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으로 나가며,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머물러서 근면‧성실과 청렴한 태도로 공무를 수행하여 그 직무를 다 해야지, 직분을 버려두고 먹고 마시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1
처세장 제10
532
2
처세장 제10
566
3
처세장 제10
491
4
처세장 제10
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