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自謂立志
하되 而
하고 는 나 而實無向學之誠故也
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뜻을 세우되, 반드시 성인聖人이 되겠다고 스스로 기약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자신을 작게 여겨서 핑계 대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보통 사람이나 성인이나 그 본성은 마찬가지이다.
비록 기질은 맑고 흐림과 순수하고 잡됨의 차이가 없을 수 없지만, 만약 참되게 알고 실천하여 옛날에 물든 나쁜 습관을 버리고 그 본성의 처음을 회복한다면 털끝만큼도 보태지 않고서 온갖 선이 넉넉히 갖추어질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 어찌 성인을 스스로 기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때문에 맹자께서는 모든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주장하시되 반드시 요임금과 순임금을 일컬어 실증하시며 “사람은 모두 요임금이나 순임금처럼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어찌 나를 속이셨겠는가?
[출전] ○ 孟子道性善 而必稱堯舜 : 《맹자孟子》 〈등문공상滕文公上〉에 나온다. “등문공이 세자가 되어 초나라로 갈 때 송나라에 들러 맹자를 만났다. 맹자께서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말씀하셨고 말씀하실 때마다 요임금과 순임금을 칭술하셨다.[滕文公爲世子 將之楚 過宋而見孟子 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
○ 人皆可以爲堯舜 : 《맹자孟子》 〈고자하告子下〉에서 조교와 맹자의 대화에서 나오는 말이다. “조교가 여쭈었다. ‘사람들은 모두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曹交問曰 人皆可以爲堯舜 有諸 孟子曰 然]”
[해설] 학문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유학의 가르침은 남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경쟁력 강한 사람을 기르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다. 오히려 경쟁보다는 협력을 통해서 전체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존립할 수 있는 조화로운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 그 때문에 처음 배움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에게 학문의 이로움이나 실용성이 어디에 있다고 유용성을 알려 주기보다는 학문을 통해 최종적으로 이루어야 할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강조한다. 그 때문에 율곡은 초학자들을 위한 입문서인 이 책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뜻을 세우되 반드시 성인을 스스로 기약해야 한다.”는 말로 시작한 것이다.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는 말은 일견 무모할 정도로 이상적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오해는 유학에서 이상적 인간상으로 설정한 성인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인은 본래 타고나는 것이며 배움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공자는 스스로 자신은 ‘나면서부터 도리를 안 생지자生知者가 아니며 옛것을 좋아해서 재빨리 그것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 제자였던 안연은 “순임금이나 나나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도 훌륭한 행동을 하면 순임금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송宋나라 때의 주돈이周敦頤는 제자가 배움을 통해서 성인이 될 수 있느냐고 묻자, 배워서 될 수 있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유학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은 말할 것도 없이 성인이며 그 성인은 누구나 배움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현실 속의 인간이다. 곧 유학의 성인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움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인간상임을 밝힌 것이다.
마땅히 항상 스스로 분발하여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善하여 옛날과 지금 지혜롭고 어리석은 차이가 없거늘, 성인은 무슨 연고로 홀로 성인이 되었으며, 나는 무슨 연고로 홀로 중인衆人이 되었는가?
이는 진실로 뜻을 확립하지 못하고 아는 것이 분명하지 못하고 행실을 독실하게 하지 못함을 말미암은 것일 뿐이다.
뜻을 확립하고 아는 것을 분명히 하고 행실을 독실하게 하는 것은 모두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데서 구하겠는가?
안연顔淵은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훌륭한 행동을 하는 자는 또한 순임금과 같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나 또한 마땅히 안연이 순임금이 되기를 바란 마음가짐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출전] ○ 顔淵曰~亦若是 : 《맹자孟子》 〈등문공상滕文公上〉에서 맹자가 안연이 한 말을 인용한 구절이다.
[해설] 이 부분은 사람은 누구나 성인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유학의 인간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본문의 성性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본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성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을 막론하고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이 타고나는 것이다. 《중용中庸》에서는 ‘하늘이 명령한 것을 성性이라고 한다.[天命之謂性]’라고 표현했다. 이는 인간 본성의 근거가 천天에 있음을 밝히면서 동시에 그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 완전하다는 것을 규정한 것이다. 곧 인간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개조하거나 외부의 강제를 통해서 구속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내가 비록 범인에 머무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본성을 이루어 성인이 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므로 성인이 되려는 노력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성인이 되는 길은 무엇보다 앎을 분명히 하는 데 있다. 이 내용은 대학에서 인간이 본래 밝은 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인간을 파악한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배고프면 먹고 싶어하고 추우면 따뜻하고 싶어하고 졸리면 자고 싶어하는 여러 가지 욕망과 함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노여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중용中庸》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모두 절도에 맞는 것[中節]이 화和라고 한 것처럼 이와 같은 세속적인 감정이나 욕망 자체를 부정적으로 파악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그런 욕망이 절제를 잃고[不中節] 방종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할 뿐이다. 본래 완전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이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추구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유학에서는 그런 부작용이 모두 기질의 영향으로 인해 타고난 착한 본성이 가려졌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기질이 아무리 본성의 완전성을 가린다 하더라도 본성 그 자체는 타고난 그대로 밝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기질만 변화시키면 본래의 성을 회복하여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사람의 용모는 추한 것을 바꾸어 예쁘게 만들 수 없으며, 체력은 약한 것을 바꾸어 강하게 할 수 없으며, 신체는 짧은 것을 바꾸어 길게 할 수 없다.
이것들은 〈타고나면서부터〉 이미 결정된 분수인지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심지心志만은 어리석은 것을 바꾸어 슬기롭게 할 수 있으며, 불초한 것을 바꾸어 어질게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음의 허령虛靈한 지각능력은 태어날 때 부여받은 기질에 구애되지 않기 때문이다.
슬기로움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으며, 어짊보다 귀한 것이 없거늘 무엇이 괴로워서 어짊과 지혜로움을 실천하지 아니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훼손하는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뜻을 마음속에 보존하여 굳게 지켜 물러서지 않는다면 거의 도에 가까울 수 있을 것이다.
[해설] 이 문단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자학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이기론理氣論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사람의 본성은 이理를 받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파악하기 때문에 본성을 두고 말하자면 요순堯舜이나 일반인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이理는 천지 만물의 동일성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의 재능이나 신체적인 능력 따위는 기질을 받음으로써 형성된다고 파악하는데 기氣는 차별성을 설명하기 위한 범주이다. 그 때문에 사람마다 청탁淸濁의 정도가 다르다. 청기를 받은 사람은 현명하고 탁기를 받은 사람은 어리석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氣는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있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있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타고난 용모나 신체의 길이 등으로 대부분의 육체적인 능력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적인 능력에 해당하는 심心은 본래 허령불매虛靈不昧한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고난 기질의 영향에 완전히 구속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비록 탁기를 타고났다 하더라도 개인의 수양에 따라서 얼마든지 심心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데 이것이 바로 변화기질론變化氣質論이다. 이 문단의 내용은 바로 이와 같은 주자학적 인간관에 근거하여 변화 기질의 가능성을 밝힘으로써 개인적 수양의 논리적 근거를 확보한 것이다.
무릇 사람들이 스스로 뜻을 세웠다고 말하되, 곧바로 공부하지 않고 미적거리면서 뒷날을 기다리는 까닭은 말로는 뜻을 세웠다고 하나 실제로는 배움을 향한 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나의 뜻으로 하여금 진실로 배움에 있게 한다면 인仁을 실천하는 일은 자기에게 말미암는 것이어서 〈인을 실천〉하고자 하면 〈인이 곧바로〉 이르게 되니, 어찌 남에게서 구하며 어찌 후일을 기다리겠는가?
입지立志를 중시하는 까닭은 〈입지를 확고히 하면〉 곧바로 공부에 착수하여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해서 항상 공부할 것을 생각하여 물러서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혹시라도 뜻이 성실하고 독실하지 못하여 그럭저럭 옛 습관을 답습하면서 세월만 보낸다면 수명을 다하여 세상을 마친들 어찌 성취하는 바가 있겠는가?
[출전] ○ 爲仁由己 欲之則至 : 《논어論語》 〈안연顔淵〉에서 “인을 실천하는 것은 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겠는가![爲仁由己 而由人乎哉]”라고 한 대목과, 《논어論語》 〈술이述而〉에서 “인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바라면 인이 이른다[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고 한 대목을 합쳐서 만든 문장이다. 또 《논어집주論語集註》에도 “정자가 말했다. ‘인仁을 실천하는 것은 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니 내가 그것을 바라면 인이 이른다. 그러니 어찌 멂이 있겠는가!’[程子曰 爲仁由己 欲之則至 何遠之有]”라고 한 대목이 보인다.
[해설] 이 문단은 도덕관념과 인간 주체의 관계를 밝히는 내용이다. 인仁이란 유학儒學 사상思想에서 최고의 가치를 가진 개념이다. 공자孔子의 도道를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그것은 곧 인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공자는 평생 동안 인仁 하나만을 주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인仁과 같은 최고의 가치도 개인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 내면화될 때 비로소 가치가 드러날 수 있다. 개인의 성찰과 수양을 강조하는 유학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인을 기대하는 소극적 태도로는 인을 이룰 수 없다고 본다.
유가에서 추구하는 인仁은 사람의 본질, 곧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근거로 인을 실천하는 것은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맹자는 “인仁이란 사람의 본질이며 이것을 합쳐서 말하면 도道이다.[仁也者 人也 合而言之 道也] 《맹자孟子》 〈진심하盡心下〉”라고 하였다. 곧 사람[人]이 사람다움[仁]을 실천하는 것이 유학의 도道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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