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광아소증(廣雅疏證)》은 청(淸)나라 왕념손(王念孫)이 위(魏)나라 장읍(張揖)이 편찬한 《광아(廣雅)》에 소증(疏證)한 책이다. 《광아》는 《이아(爾雅)》를 증보(增補)한 책으로 총 19편으로 나누어 2,343조의 동의사(同義詞)를 수록하였다.
2. 저자
(1) 성명:왕념손(王念孫)(1744~1832)
(2) 자(字)·별호(別號):왕념손의 자는 회조(懷祖), 호는 석구(石臞)이다.
(3) 출생지역:강소(江蘇) 고우(高郵)
(4) 주요활동과 생애
왕념손은 그 조부(祖父)가 손자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여 그 이름을 ‘념손(念孫)’으로 지었는데, 왕념손이 태어났을 때 조부는 이미 별세하여 자를 ‘회조(懷祖)’로 하여 조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왕념손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수척하여 그 호를 ‘석구(石臞)’라 하였다. 부친인 왕안국(王安國)은 관직이 이부상서(吏部上書)까지 올랐고, 아들인 왕인지(王引之)는 예부상서(禮部上書)까지 올랐는데, 아들 왕인지는 《경의술문(經義述聞)》·《경전석사(經傳釋詞)》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이 때문에 《청사고(淸史稿)》 〈유림열전(儒林列傳)〉에서 “왕씨 일가가 3대에 걸쳐 경전을 연구하였다.”라고 칭송하였다. 왕념손은 10세에 이미 십삼경(十三經)을 모두 읽었는데, 특히 12세에 그의 부친은 대진(戴震)을 청해 스승으로 삼게 하였다. 나중에 두 사람은 양주(揚州)에서 같이 살며 사제관계를 지속하였는데, 대진의 학문은 왕념손에게 평생 큰 영향을 주었다. 건륭(乾隆) 22년(1757)에 부친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와 집에 머물며 독서에 전념하였다. 건륭 30년(1765)에는 황제가 남쪽 지방을 순시할 때 대신(大臣)의 자손 신분으로 황제를 영접하고 시부(詩賦)를 바쳐 거인(擧人) 신분을 하사받았다. 이후 건륭 40년(1775)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이후 왕념손은 한림원(翰林院)에서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을 맡았고 수차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역임하였는데 《광아소증》은 이 시기의 저술이다. 견륭 황제가 죽고 가경(嘉慶) 황제가 즉위한 후 관청렴(官淸廉)이 맡아 당시 대학사(大學士) 화신(和珅)의 비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조정과 재야 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에게 ‘조양명봉(朝陽鳴鳳)’으로 칭송받았다. 가경 연간에 영정(永定)의 하도수리(河道水利)에 몇 년간 종사하면서 《독서잡지(讀書雜志)》를 썼다. 왕념손은 경전뿐만 아니라 수리에 관한 지식에도 정통하여 《도하의(導河議)》·《하원기략(河源紀略)》 등의 서적도 편찬하였다. 가경 15년(1810)에는 영정의 하도가 범람하여 관직에서 물러났고 가경 16년(1811) 이후에는 아들 왕인지와 함께 집에 기거하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에 전념하였다.
(5) 주요저작:《광아소증》, 《독서잡지》, 《도하의》, 《하원기략》, 《방언소증보(方言疏證補)》, 《석대(釋大)》, 《모시군경초사고운보(毛詩群經楚辭古韻譜)》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광아소증》은 위나라 장읍이 편찬한 《광아》에 소증(疏證)한 책이다. 건륭·가정 연간은 소학(小學)이 성행한 시기이다. 당시 대진이 《방언소증(方言疏證)》을 지었고, 단옥재(段玉裁)가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를 지었으며, 소진함(邵晉涵)이 《이아정의(爾雅正義)》를 지었는데, 왕념손은 일찍부터 이러한 책들을 참고하여 《설문고이(說文考异)》, 《방언소증보》를 쓰고 《방언(方言)》을 교감하였으나 모두 출간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왕념손은 원래 《이아》를 소증(疏證)할 계획이었는데, 소진함의 《이아정의》가 먼저 출간되어 《광아》에 소증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고 한다. 《광아소증》은 그의 나이 43세인 건륭 52년(1787) 가을부터 쓰기 시작하여 건륭 60년(1795) 겨울 9권의 원고를 완성한 후, 그의 아들 왕인지의 원고인 제10권을 합쳐 가경 원년(1796) 정월에 완성하였다. 《광아소증》을 완성한 이후에도 말년까지 계속 보충 수정하여 나중에 또 《광아소증보(廣雅疏證補)》를 썼는데, 그가 《독서잡지》를 쓸 때 《광아소증》의 일부 주소(注疏)를 보충하고 수정하였다. 판본으로는 가경 원년(1796) 왕씨가각본(王氏家刻本), 도광(道光) 9년(1829) 학해당(學海堂) 《황청경해(皇清經解)》본, 1984년 강소고적출판사영인가각본(江蘇古籍出版社影印家刻本), 2004년 중화서국(中華書局) 《광아소증 부색인(廣雅疏證 附索引)》 등이 있다.
4. 내용
《광아소증》은 《광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설명한 책이다. 왕념손은 이 책의 소증(疏證)을 통해 그의 음운(音韻)·문자(文字)·훈고(訓詁)에 관한 지식을 집대성하였다. 예를 들어 장읍의 《광아》 〈석고일(釋詁一)〉에서는 “고(古)·석(昔)·선(先)·창(創)·방(方)·작(作)·조(造)·삭(朔)·맹(萌)·아(芽)·본(本)·근(根)·얼(櫱)·와(鼃)·률(䔞)·창(昌)·맹(孟)·비(鼻)·업(業)” 등의 글자들에 대해 ‘시야(始也)’로 풀이하였다. 이러한 글자들은 모두 ‘시작하다’의 뜻이 있는데, 왕념손은 《광아소증》에서 이 글자들에 대해 소증(疏證)하면서 “곡식에서 싹이 나온 것을 ‘얼(糱)’이라 하고, 재앙이 시작하는 것을 ‘얼(孼)’이라 하는데, 그 뜻이 모두 ‘얼(櫱)’과 같다.”, “‘율(律)’은 ‘률(䔞)’과 통한다.”, “‘율(聿)’의 소리는 ‘률(䔞)’과 비슷하고 뜻이 같다.”, “‘창(昌)’은 ‘창(倡)’과 통한다.”라고 하여, 뜻과 소리가 통하는 글자들을 밝혔다.
5. 가치와 영향
호기명(胡繼明)은 〈《광아소증》중적동원사연구(廣雅疏證中的同源詞硏究)〉에서 “《광아소증》은 청대(清代) 건륭·가정 연간의 학자 왕념손의 대표작으로, ‘소리에 근본을 두어 훈고(訓詁)의 뜻을 구한다.’와 ‘형체에 제약을 받지 않고, 소리에 따라 뜻을 구한다.’는 이론적 원칙을 매우 명확히 제시하였고, 특히 중국어 동원사(同源詞)의 ‘명명(命名)의 뜻’을 탐구하고, 대량의 동원사 관계를 탐구하여 동원사 연구가 사원학(詞源學) 연구 범주에 진입하여 과학적 연구의 길로 올라 설 수 있게 하였다. 《광아소증(廣雅疏證)》은 비단 훈고학(訓詁學)의 중요 저작일 뿐만 아니라 동원사 연구 자료의 보고이다.”(395면)라고 평가하였는데, 이를 통해 왕념손의 《광아소증》이 동원사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높은 가치가 있는 저술임을 알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훈고(訓詁)의 뜻은 소리에 근본이 있다. 이 때문에 소리가 같은데 글자가 다르거나, 소리가 비슷한데 뜻이 같은 글자들이 비록 다르게 나누어져 있어도 실제로는 같이 묶을 수 있는 것이다.[竊以詁訓之旨 本於聲音 故有聲同字異 聲近義同 雖或類聚羣分 實亦同條共貫]” 〈광아소증서(廣雅疏證序)〉
• “갖옷을 털 때는 반드시 그 옷깃을 잡고, 그물을 들어 올릴 때는 반드시 그 벼리를 잡는 것과 같이 해야 근본이 서고 도가 생기게 된다.[譬如振裘必提其領 舉網必摯其綱 故曰本立而道生]” 〈광아소증서〉
• “글자에는 따로 음이 있고 음에는 따로 뜻이 있어 글자만 보고서 멋대로 지어내면 옛 뜻에 어긋나게 되고, 옛 뜻에 얽매여 깨닫기 어려워질 것인데, 쉽고 간단한 이치를 잃어버린다면 도에서 멀어질 것이다.[有字別為音 音別為義 或望文虛造而違古義 或墨守成訓而鮮會通 易簡之理既失 而大道多歧矣]” 〈광아소증서〉
(2) 색인어:왕념손(王念孫), 광아소증(廣雅疏證), 장읍(張揖), 광아(廣雅), 왕인지(王引之), 음운(音韻), 문자(文字), 훈고(訓詁)
(3) 참고문헌
• 〈청 왕염손 《광아소증》의 연면사에 대한 관념〉(최남규, 《인문논총》21)
• 〈청 왕염손 《광아소증》 첩어 연구〉(최남규, 《중국어문학》29)
• 《廣雅疏證》(王念孫, 江蘇古籍出版社)
• 〈《廣雅疏證》同源詞硏究〉(胡繼明, 巴蜀書社)
• 〈《廣雅疏證》‘轉’類術語考〉(張其昀, 《중국어문학논집》59)
• 〈《廣雅疏證》의 ‘取’義字 疏證에 대한 고찰〉(서한용, 《중국연구》70)
• 〈《廣雅疏證》의 ‘視’義字 訓詁에 대한 고찰〉(서한용, 《중국문화연구》36)
• 〈訓詁에 보이는 ‘始’義 同源字에 대한 고찰〉(서한용, 《중국학연구》80)
• 〈《廣雅疏證》의 ‘滿’義字 訓詁에 보이는 聲同聲近字에 대한 고찰〉(서한용, 《중국연구》74)
• 〈《廣雅疏證》의 ‘行’義字 訓詁에 보이는 聲同聲近字에 대한 고찰〉(서한용, 《중국연구》78)
【서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