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군경평의(群經平議)》는 총 15종의 경전류 문헌을 대상으로, 해당 문헌 가운데 훈고(訓詁)・음운(音韻)・고증(考證)・교감(校勘) 등 여러 측면에서 논의의 여지가 있는 구절을 선별하여 자신의 견해를 35권의 분량으로 정리한 찰기(札記)[차기(箚記)] 형식의 주석서이다.
2. 저자
(1) 성명:유월(兪樾(1821~1907))
(2) 자(字)·호(號):자(字)는 음보(蔭甫), 호(號)는 곡원(曲園)이다.
(3) 출생지역:절강(浙江) 덕청(德淸)
(4) 주요활동과 생애
도광(道光) 30년(1850) 회시(會試)의 복시(覆試)에서 제출한 “花落春仍在(꽃은 떨어졌지만 봄은 여전하네)”라는 시구(詩句)를 당시 시험관이었던 증국번(曾國藩(1811~1872))이 높게 평가하여 진사(進士) 1등으로 선발하였다. 유월은 감사의 의미로 이후 전집(全集)을 내었을 때, “춘재당전서(春在堂全書)”라고 이름 지었다. 진사가 되어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를 지내다가 함풍(咸豐) 2년(1852) 산관(散館)하여 편수(編修)를 제수받았다. 함풍 5년(1855) 하남학정(河南學政)으로 부임하였는데, 출제한 과거(科擧) 시제(試題)가 “경전의 의미를 찢어발겼다[割裂經義]”는 혐의로 어사(御史) 조등용(曹登庸)에게 탄핵을 받아 2년 만에 관직에서 파면당한다.
당시 태평천국(太平天國) 전란의 와중에 특별한 직무가 없었던 유월은 고전문헌을 다시 읽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유월이 학문적으로 각성하는 데에 큰 계기가 되었다. 특히 왕념손(王念孫(1744~1832)), 왕인지(王引之(1766~1834)) 부자의 《독서잡지(讀書雜志)》, 《경의술문(經義述聞)》, 《광아소증(廣雅疏證)》 등의 저작을 접하게 되면서 학문을 향한 뜻을 굳게 다지게 되었고, 왕씨 부자의 관점과 방법을 원용하여 자신이 직접 저술에 착수하게 된다. 이후 저술에 매진하며, 소주(蘇州) 운간서원(雲間書院), 자양서원(紫陽書院), 상해(上海) 구지서원(求志書院), 항주(杭州) 고경정사(詁經精舍) 등 여러 서원의 주강(主講)을 지내면서, 장병린(章炳麟), 대망(戴望), 황이주(黃以周), 주일신(朱一新), 시보화(施補華), 왕이수(王詒壽), 풍일매(馮一梅), 오경지(吳慶坻), 오승지(吳承志), 원창(袁昶)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증국번, 이홍장(李鴻章(1823~1901)) 등과 깊이 교류하였는데, 유월이 자신의 저술을 출판할 때 이들에게 많은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손자 유폐운(兪陛雲(1868~1950))은 학자, 시인 등으로 이름을 알렸다. 증손자 유평백(兪平伯(1900~1990))은 신문학운동 초기 시인으로 중국백화시창작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며, 청화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5) 주요저작:분량으로는 청조에서 가장 많다는 평가를 받는 유월(兪樾)의 저술은 《춘재당전서(春在堂全書)》 491권에 수록되어 있다. 대표 저술로는 유가경전 주석서인 《군경평의》, 제자서 주석서인 《제자평의(諸子平議)》, 그리고 《고서의의거례(古書疑義擧例)》가 있다.
3. 서지사항
함풍(咸豊) 8년(1858) 《제자평의》와 동시에 집필을 시작하여 동치(同治) 3년(1864)에 완성하고, 동치 6년(1867) 전체 판각을 마친 《군경평의》는 연구의 대상・관점・방법・형식・취지 등 많은 부분에서 왕인지의 《경의술문》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았다.
《군경평의》의 내용을 전통적인 주석의 형태로 분류하면 ‘평의(評議)’[평의(平議)], 즉 ‘정(訂)’이다. ‘정(訂)’은 대상 저서의 득실을 파악하여 오류를 수정하고 대상저서를 비평한다는 뜻에서 이름 지어진 주석의 명칭이다. 《군경평의》의 외면적 형식은 청대 유행한 ‘찰기(札記)[차기(箚記)]’이다. 본래 찰기는 저서가 아니라 읽은 책의 자료를 모아놓는 일종의 독서노트로, 사람들이 책을 읽다가 느낀 점이나 참고할 것들을 그때그때 적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청대에는 이 ‘찰기’의 용도가 매우 확대되어 쓰이게 된다. 청대의 찰기는 단순한 메모가 아니라, 초고를 작성한 후에 여러 번 다듬고 수정한 독서노트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저서의 형태였다. 역사적으로 이미 고전문헌에 관한 많은 주석서들이 축적되어 있던 청대 상황에서 주석을 행할 때 유용하게 이용한 형식이다. 찰기 형식의 주석서는 원전의 전체적인 체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국지적이고 산발적인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데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군경평의》에서 주석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경전에서 의심스러운 부분 혹은 이전 주석이 잘못되었거나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구절들을 표제로 뽑고, (2) 이전 주석들을 나열한 후, (3)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다. (4) 가능한 방대한 증거들을 연쇄적으로 나열하는 고증을 덧붙인다. (5) 다시 자신의 생각을 결론으로 제시하며, (6) 잘못된 지점을 역사적으로 고찰하여 어느 부분에서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한다. (7)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주석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설명하면서 마무리한다.
《황청경해속편(皇淸經解續篇)》본과 《춘재당전서(春在堂全書)》본, 1975년 대만 하락도서출판사에서 간행한 《하학총서(夏學叢書)》본, 1984년 대만 세계서국 《유월차기오종(兪樾箚記五種)》본, 2011년부터 2020년까지 고적정리출판사업의 하나로 교점하고 정리하여 봉황출판사에서 출간한 《유월전집(兪樾全集)》본 등이 있다.
4. 내용
《주역(周易)》, 《상서(尙書)》, 《주서(周書)》, 《모시(毛詩)》, 《주례(周禮)》, 《의례(儀禮)》, 《대대례(大戴禮)》, 《예기(禮記)》,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좌전(左傳)》, 《국어(國語)》, 《논어(論語)》, 《맹자(孟子)》, 《이아(爾雅)》 등 총 15종의 경전에 대한 주석으로, 전체 35권이다. 구두(句讀)를 바로잡고, 글자나 문장의 의미를 해설하거나 바로잡으며, 특수한 어법과 표현들에 대해 분석하는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청대 뛰어난 성과를 보인 ‘인성구의(因聲求義)’의 방법, 즉, ‘글자의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고음(古音)을 통해 의미를 탐구하던’ 방법으로 이전 주석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이 많다. 유교는 성리학을 거침으로써 그동안 유교에 결여되어 있던 우주론과 존재론・인성론 등 치밀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논리적 정합성(整合性)의 추구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사색과 비판적 정신을 억압하고 사상적 독단과 권위주의, 형식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러한 문제점은 경전을 해석하는 데서도 나타나는데, 경전의 개념들을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상위개념들로 설명하면서 경직화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유월(兪樾)의 주석은 이러한 성리학적 입장과는 달리 경전의 개념들에 대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입장을 취하고 그에 따라 의미를 해석한다. 상식적・실용적 시각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의미를 파악하여, 그에 타당한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유월은 청대 고증학의 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 왕념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로 이어지는 정통파(正統派)의 마지막 주자라고 할 수 있다. 왕씨 부자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정통파 선배들의 학술방법을 많은 부분 계승하고 있다. 유월은 200여 년의 청대 고증학의 흐름과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교감학・주석학・어법학・수사학 등의 방면에서 비교적 큰 성과를 거두었고, 청대 마지막 국학대사(國學大師)로 만청 학계 발전에 공헌한 바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새로운 설을 세우기를 좋아하며, 견강부회하여 무리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측면이 있으며, 언어학적 문제를 설명하면서 통가(通假)를 남용하는 등 학문적 엄밀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때문에 유월 자신이 따르고 모방했던 왕씨 부자의 저술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기존의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경서 연구의 주요한 참고자료로 자주 호출된다. 또한 이후 《고서의의거례(古書疑義擧例)》를 저술하는데, 주요한 자료가 된다.
6. 참고사항
(1) 명언
• “(禮之用和爲貴)”(《논어(論語)》 〈학이(學而)〉):“내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이(以)’와 ‘용(用)’ 두 글자는 통하였다. 《주역(周易)》 정괘(井卦) 구삼(九三)에서 ‘(可用汲)(물을 퍼낼 만하다.)’이라 하였는데, 《사기(史記)》 〈굴원전(屈原傳)〉에서는 이를 인용하여 ‘可以汲’이라 하였다. 《상서(尙書)》 〈여형편(呂刑篇)〉에서는 ‘報虐以威(사나움에 위엄으로 갚다.)’라 하였는데, 《논형(論衡)》 〈견고편(譴告篇)〉에서는 이를 인용하여 ‘報虐用威’라 하였다. 《시경(詩經)》 〈판편(板篇)〉에서 ‘勿以爲笑(비웃지 말라.)’라고 했는데, 《순자(荀子)》 〈대략편(大略篇)〉에서는 이를 인용하여 ‘勿用爲笑’라 하였으니, 모두 그 증거가 된다. ‘禮之用和爲貴’는 《예기(禮記)》 〈유행편(儒行篇)〉에서 ‘禮之以和爲貴’라 했는데, 이 문장의 뜻은 바로 본문과 동일하다. 단지 여기서는 ‘용(用)’자가 ‘이(以)’자로 쓰였을 뿐이다. 해석할 때 마땅히 여섯 글자로 구두(句讀)를 해야 하는데, 근래에 체용(體用)의 용(用)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樾謹按 古以用二字 通 周易井九三 可用汲 史記屈原傳 引作可以汲 尙書呂刑篇 報虐以威 論衡譴告篇 引作報虐用威 詩板篇曰 勿以爲笑 荀子大略篇 引作勿用爲笑 竝其證也 禮之用和爲貴 與禮記儒行篇曰 禮之以和爲貴 文義正同 此用字 止作以字 解當以六字爲句 近解多以體用爲言 失之矣]” 권31 〈논어평의(論語平議)〉
• “褻裘長 短右袂”(《논어(論語)》 〈향당(鄕黨)〉):“공안국(孔安國)은 ‘오른쪽 소매를 짧게 한 것은 일을 하는데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삼가 생각건대, 좌우의 두 소매에서 한 쪽은 길게 하고 한 쪽은 짧게 하는 이치는 없다. ‘短右袂’란 말아서 짧게 만드는 것이다. 평상시에 입는 갖옷이 길다면, 소매 또한 길게 되니, 일을 하는데 있어서 불편하다. 그러므로 오른쪽 소매를 말아서 짧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短右袂’라고 한다.[孔曰 短右袂 便作事 樾謹按 左右兩袂必無一長一短之理 短右袂者 卷之使短也 褻裘長則袂亦長 於作事不便 故卷右袂使短 是謂短右袂]” 권31 〈논어평의〉
(2) 색인어:군경평의(群經平議), 제자평의(諸子平議), 고서의의거례(古書疑義擧例), 유월(兪樾), 왕념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독서잡지(讀書雜志), 경의술문(經義述聞), 찰기(札記)[차기(箚記)]
(3) 참고문헌
• 清史稿・俞樾傳(趙爾巽 等, 中華書局)
• 德淸兪氏(兪潤民・陳煦, 新華書店)
• 花落春仍在(張欣, 廣東敎育出版社)
• 兪先生傳(章太炎, 《章太炎全集》, 上海人民出版社)
• 兪樾全集(汪少華・王華寶 等 整理, 鳳凰出版社)
• 兪樾訓詁硏究(王其和, 齊魯書社)
• 〈兪樾의 경전주석에 대한 연구〉(김효신,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효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