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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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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제의 칙(勅)을 받아 반고(班固)・유진(劉珍)・채옹(蔡邕) 등이 저술한 기전체(紀傳體) 사서이다. 초대 황제인 광무제(光武帝)에서 열두 번째 황제인 영제(靈帝) 시기까지를 기술한 후한(後漢) 단대사(斷代史)로 여러 차례의 가필(加筆)을 거쳐 영제 희평(熹平) 연간(172~178)에 일단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서는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는 물론이고 7가(家)(사승(謝承)・설영(薛營)・사마표(司馬彪)・화교(華嶠)・사침(謝沈)・원산송(袁山松)・장번(張璠))가 《후한서》를 서술할 때 많은 재료를 제공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동시대 제일급 사료라고 할 수 있다. 후한 말 이후로 《사기(史記》) 《한서(漢書)》와 함께 ‘삼사(三史)’라고 불렸다. 그러나 범엽의 《후한서》가 찬술되고 당(唐)의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이 여기에 주를 붙이게 되자 범엽의 것이 성행하였고, 본서는 차츰 쇠퇴하여 마침내 산일(散逸)되었다.

2. 저자

(1) 성명:반고(班固)(32~92), 긴 시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작된 까닭에 여기서는 대표 저자인 반고(班固)에 대해 살펴보겠다.
(2) 자(字)・별호(別號):자는 맹견(孟堅)
(3) 출생지역:부풍(扶風) 안릉현(安陵縣)(현 중국 섬서성(陝西省) 함양시(咸陽市))
(4) 주요활동과 생애
반고는 후한의 저명한 역사가인 반표(班彪)의 아들로, 서역(西域) 개척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장군이자 외교관인 반초(班超)의 형이다. 일찍이 부친으로부터 교육을 받아 9세에는 능히 부(賦)를 읊을 줄 알았다고 한다. 16세 때 태학(太學)에 입학하였으나 23세에 부친의 상(喪)을 당해 귀향한다. 명제(明帝) 영평(永平) 5년(62) 《한서(漢書)》 편찬과 관련하여 국사(國史)를 사사로이 개작한다는 무고를 받고 하옥된다. 그러나 명제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풀려난 후 난대령사(蘭臺令史)가 되고 명을 받들어 역사 편찬에 종사하게 된다. 장제(章帝) 시기에는 오경(五經)의 차이를 논의한 백호관회의(白虎觀會議)에 참석하고 황제의 명에 따라 그 시말(始末)을 정리한 《백호통의(白虎通義)》를 저술하였다. 20년 가까이 저술했던 《한서》는 관찬사서(官撰史書)의 전범으로 의미를 갖지만 한(漢) 왕조를 신격화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역사 외에도 문학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화제(和帝) 때 대장군 두헌(竇憲)을 따라 흉노 정벌에 종군했지만 실패한 후 투옥되었다가 옥에서 사망하였다.
(5) 주요저작:〈양도부(兩都賦)〉, 《백호통의(白虎通義)》, 〈답빈희(答賓戲)〉, 〈유통부(幽通賦)〉 등

3. 서지사항

본서의 명칭 중 ‘동관(東觀)’은 낙양성(洛陽城) 남궁(南宮) 수사관(修史館)이 위치한 건물로, 주로 이곳에서 편찬되어 동관이란 이름이 붙었다. 최초에는 난대(蘭臺)에서 시작했으나 장제(章帝)・화제(和帝) 이후 국가의 도서 관리와 문서 보관, 저작 등의 일이 동관으로 이전되면서 대부분의 작업은 동관에서 진행되었다.
우선 반고와 진종(陳宗)・윤민(尹敏)・맹이(孟異) 등이 명제의 명을 받고 난대에서 〈세조본기世祖本紀〉 및 광무제의 공신들과 지방 세력인 평림(平林)과 신시(新市)의 인물들 및 공손술(公孫述) 등의 일을 열전(列傳), 재기(載記) 등으로 편찬하였는데 모두 28편이었다. 그 후 알자복야(謁者僕射) 유진(劉珍) 등이 안제(安帝) 영녕(永寧) 연간(120~121) 등태후(鄧太后)의 명을 받아 건무(建武)・영초(永初) 시기의 기(紀)・표(表) 및 〈명신(名臣)〉・〈절사(節士)〉・〈유림(儒林)〉・〈외척(外戚)〉의 4전(傳)을 속수(續修)하면서 비로서 《동관한기(東觀漢記)》는 국사(國史)로서의 체례와 규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유진의 애초 계획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그의 사후 시중(侍中) 복무기(伏無忌)가 명을 받들어 〈제왕표(諸王表)〉・〈왕자표(王子表)〉・〈공신표(功臣表)〉・〈은택후표(恩澤侯表)〉와 〈서강전(西羌傳)〉 및 〈지리지(地理志)〉를 더하였다. 〈지리지〉는 지(志)로서는 가장 먼저 작성되었다. 환제(桓帝) 즉위 후 원가(元嘉) 연간(151-152)에 태중대부(太中大夫) 변소(邊韶)・대장군사마(大將軍司馬) 최식(崔寔) 등에게 명을 내려 〈효목제기(孝穆帝紀)〉・〈숭제기(崇帝紀)〉・〈순열제기(順烈帝紀)〉, 〈황후전(皇后傳)〉, 〈백관표(百官表)〉, 〈순제공신표(順帝功臣表)〉 등 다수를 저작하였고, 《한기(漢紀)》(114편)라고 명명하였다. 이 때 작업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열전이 증가한 것과 최식과 의랑(議郞) 조수(曹壽)에 의해 〈백관표〉가 새롭게 찬술된 것이다.
《동관한기》가 마지막으로 속수된 것은 영제・헌제(獻帝) 시기다. 우선 영제 희평(熹平) 연간(172~178)에 광록대부(光祿大夫) 마일제(馬日磾), 의랑 채옹(蔡邕) 등이 동관에서 〈영제기(靈帝紀)〉 및 10지・24전 등 42편을 더하여 거의 완성하였다. 헌제 시기 최후의 수찬(修撰)은 허도(許都)에서 양표(楊彪)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 후한 말의 혼란과 전란으로 인해 산일된 내용을 보충하였다. 그 결과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총 143권으로 저록(著錄)되게 된다.
그러나 북송(北宋) 시기에는 43권이 되었고 남송(南宋)에 이르러서는 8권만이 전해지게 되었다. 청(淸) 요지인(姚之駰)이 일문(佚文)을 모아 8권으로 편재하였고, 후에 이 집본(輯本)을 저본으로 하고 《영락대전(永樂大典)》 중의 유문(遺文) 등을 집록(集錄)하여 제기(帝記) 3권, 연표(年表) 1권, 지(志) 1권, 열전(列傳) 17권, 재기(載記) 1권, 일문(逸文) 1권 총 24권이 편성되었다. 《무영전취진판(武英殿聚珍版)》 《국학기본총서(國學基本叢書)》 《총서집성초편(叢書集成初編)》 《사부비요(四部備要)》 등에 수록되어 있다. 또 《문선(文選)》의 이선(李善) 주(注)에서 집출(輯出)한 도동(陶棟)의 《동관한기습유(東觀漢紀拾遺)》(《집일총간(輯佚叢刊)》에 수록) 2권도 있다. 1987년 중주고적출판사(中州古籍出版社)에서 출간한 오수평(吳樹平)의 《동관한기교주(東觀漢記校注)》를 참고할 만하다(이 책은 2008년 북경 중화서국에서 재판이 출간되었다).

4. 내용

현존하는 본서는 집일에 의한 것이라 최초의 편재가 어떠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확정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오수평의 《동관한기교주》를 저본으로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총 22권인 본서는 《사통(史通)》, 《후한서》 이현(李賢) 주(注), 《속한서》 유소(劉昭) 주(注), 《북당서초(北堂書鈔)》 등을 참조하여 기(3권), 표(1권), 지(1권), 전(15권), 재기(載記)(1권), 산구(散句)(1권)로 구성되었다.
이 중 재기는 정통이 아닌 정권의 전기를 말하는데, 이를 열전이 아닌 재기로 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당대(唐代) 편찬된 《진서(晉書)》에서 호족(胡族) 왕조의 일들을 재기로 서술한 것은 《동관한기》를 계승한 것이다. 표는 〈제왕표〉, 〈왕자후표〉, 〈공신표〉, 〈은택후표〉, 〈백관표〉 등으로 이 중 〈백관표〉는 본서에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지는 모두 〈율력(律曆)〉, 〈예(禮)〉, 〈악(樂)〉, 〈교사(郊祀)〉, 〈천문(天文)〉, 〈지리(地理)〉, 〈조회(朝會)〉, 〈거복(車服)〉으로, 채옹이 10지를 편찬했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지의 배열은 《후한서〉 〈채옹전〉 유소의 주와 사마표의 《속한서》 8지의 순서를 참조하였다. 기와 전은 시간 순으로 기술하였는데, 전의 경우 황후와 동성왕(同姓王)이 제일 먼저 나온다. 이외에는 대체로 시대에 따라 안배하였는데, 동족이거나 유관 인물인 경우 시대를 뛰어넘어 묶어 배열하기도 하였다.

5. 가치와 영향

후한 시기 몇 대에 걸쳐 많은 유학자들에 의해 편찬된 본서는 기전체 형식에 의해 후한 일대의 역사를 서술한 단대사다. 《사기》, 《한서》와 더불어 삼사라고 불릴 정도로 후한대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여겨졌다. 그러나 대표적인 봉칙찬(奉勅撰)의 결과물로 후한 정권의 입장에서 역사가 기술되었다는 한계는 뚜렷하다. 또한 여러 사람에 의해, 긴 시간에 걸쳐 편찬된 까닭에 이미 후한 시기부터 기술의 객관성과 체계성을 비판받았고, 유지기(劉知幾)는 사서 편찬의 조례(條例)와 규장(規章)에 맞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번잡한 서술은 사마표로 하여금 새로운 후한사 저술에 나서게 하였다. 그러나 《한서》에 두드러졌던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과 같은 비합리적 태도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역사관에 의해 역사를 저술하는 새로운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본서의 미덕일 것이다. 특히 이러한 입장은 채옹에게서 현저하게 드러나는데, 채옹의 10지를 계승한 사마표의 《속한서(續漢書)》가 “후한사 저술에서 으뜸이다.”라는 평가를 받는 것 역시 본서가 가진 합리적 서술태도의 영향일 것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오직 《동관한기》만이 평림과 하강 관련 인물들을 〈재기〉에 배열하였다. (그러나) 후세 사가들은 아무도 이를 본받지 않았다. 《신진서》를 편찬하면서 비로소 16국 군주에 대한 사실을 〈재기〉에 기재하고 있으니, 좋은 것을 택하여 행하고 옛 가르침을 본받아 따르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唯東觀以平林下江諸人列爲載記 顧後來作者莫之遵效 逮新晉始以十六國主持載記表名 可謂擇善而行 巧於師古者矣].” 《사통(史通)》(유지기(劉知幾))
• “오직 후한의 동관만이 여러 유생들을 모아 《동관한기》를 편찬하였으나, 저술의 주관자가 없었고 (사서편찬의) 조례와 규장 또한 세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법(李法)은 이 책의 내용이 사실에 어긋난다고 비난하였고, 중장통(仲長統)은 마땅히 모두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唯後漢東觀 大集羣儒著述 無主條章靡立 由是伯度譏其不實 公理以爲可焚].”《사통》(유지기)
• “《동관한기》의 작자들은 혹 자기 왕조에 아첨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후일 사서를 편찬할 경우 당연히 바르게 고쳐야 한다[夫東觀秉筆容或諂於當時 後來所修理 當刋革者也].” 《사통》(유지기)
(2) 색인어:동관한기(東觀漢記), 동관(東觀), 반고(班固), 유진(劉珍), 채옹(蔡邕), 재기(載記), 삼사(三史)
(3) 참고문헌
• 東觀漢紀校注(吳樹平 校注, 中州古籍出版社)
• 東觀漢記・七家後漢書・後漢書の史料問題(齋藤実郎, 《中國正史の基礎的研究》, 早稲田大學出版部)
• 東洋の学藝 『東觀漢記』再考(相田満, 《東洋文化》 92)
• 東觀漢記逐字索引(香港中文大學中國文化研究所, 商務印書館)
• 東觀漢記(吳慶峰 點校, 超星數字圖書館)

【홍승현】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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