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본서는 홍무(洪武) 원년(1358)에서부터 숭정(崇禎) 17년(1644)까지 277년간의 명(明) 왕조 일대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 체례(體例)로 묶어 정리한 정사(正史)이다. 청(淸)나라의 장정옥(張廷玉) 등이 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건륭(乾隆) 4년(1739)에 본기(本紀) 24권, 지(志) 75권, 표(表) 13권, 열전(列傳) 220권, 목록(目錄) 4권으로 편찬을 완성하였다.
2. 편저자
(1) 성명:장정옥(張廷玉)(1672~1755)
(2) 자(字)·별호(別號):장정옥은 자(字)는 형신(衡臣), 또는 연재(硯齋).
(3) 출생지역 : 장정옥은 안휘성(安徽省) 동성(桐城) 사람,
본서 편찬의 총재관(總裁官)을 맡은 장정옥은 대학사(大學士) 장영(張英)의 둘째 아들이다. 강희(康熙) 39년(1700) 진사(進士)가 된 후 서길사(庶吉士), 검토(檢討), 시강학사(侍講學士), 내각학사(內閣學士), 형부시랑(刑部侍郎)을 역임했다. 옹정(雍正) 연간에는 예부상서(禮部尙書)에 발탁되고, 이어서 보화전대학사(保和殿大學士)로 승진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겸하였으며, 이후 군기대신(軍機大臣)에 올랐다. 그러나 건륭 연간 만주족 출신 군기대신인 악이태(鄂爾泰)와의 분쟁으로 사직(辭職)을 하고 고향에 내려와 지내다가 건륭 14년(1749)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諡號)는 문화(文和)이다.
(4) 주요저작:≪명사(明史)≫를 비롯해서 ≪대청회전(大淸會典)≫,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총재관을 맡았으며, ≪장회원문존(張懷園文存)≫, ≪전경당집(傳經堂集)≫ 등의 저서를 남겼다.
3. 서지사항
본서의 편찬은 청(淸)나라 순치(順治) 2년(1625)에 명사관(明史館)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대학사 풍전(馮銓)을 총재(總裁)로 임명하여 편찬을 시작했지만 당시는 아직 정세가 아직 안정되지 못하여 정상적인 편찬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후 강희 4년(1665)에 명사관의 업무가 재개되었지만 이때에도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찬수하게 됨에 따라 별다른 성과 없이 다시 중단되었다.
이후 삼번(三藩)의 난이 진압되어가는 강희 18년(1679)에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서원문(徐元文)을 감수(監修)로, 한림원(翰林院) 장원학사(掌院學士) 섭방애(葉方藹)와 우서자(右庶子) 장옥서(張玉書)를 총재로 삼아 찬수가 다시 진행되어 이때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편찬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본서를 편찬하는 데에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등 명말(明末)의 대유(大儒)까지는 망라하지 못했지만 황종희의 제자 만사동(萬斯同)과 아들 황백가(黃百家), 고염무의 제자 반뢰(潘耒) 등 저명한 학자를 비롯하여 박학홍유(博學鴻儒)로 뽑힌 수많은 인재들을 참여시켰다.
이들의 노력으로 ≪명사≫의 고본(稿本)이 마련되었으며, 강희 60년(1722)과 옹정 원년(1723)에 당시 총재를 맡은 왕홍서(王鴻緖)에 의해 두 차례 진정(進呈)되었다. 이때 올려진 ≪명사고(明史稿)≫는 수미(首尾)가 대략 갖추어지고 사실이 상당히 상세했기에, 이후 총재를 맡은 장정옥은 이를 초고로 삼아 옹정 13년(1735)에 본기 24권, 지 75권, 표 13권, 열전 220권, 목록 4권으로 ≪명사≫ 편찬을 완성하였으며, 건륭(乾隆) 4년(1739)에 이를 판목에 새겨 간행·공포하였다.
이처럼 ≪명사≫는 처음 명사관이 설치된 순치 2년부터 헤아린다면 전후 94년, 본격적으로 편찬이 이루어진 강희 18년부터 헤아려도 60년이란 긴 세월이 소요되어 편찬되었다. 실로 중국 정사 가운데 가장 오랜 세월을 거쳐 완성되었다.
4. 내용
본서는 기전체의 정사로서 본기, 지, 표, 열전으로 그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본기는 〈태조(太祖本紀)〉를 비롯하여 16본기 24권으로 되어 있고, 지는 〈천문지(天文志)〉를 비롯해서 15지 75권으로, 표는 〈제왕세표(諸王世表)〉를 비롯해서 5표 13권으로, 열전은 후비(后妃)에 대한 열전을 비롯해서 180열전 2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서의 편찬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그러는 동안 세 차례의 정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원고가 확정되었다. 때문에 내용상에서 상당히 풍부한 사실을 담고 있거니와 체례(體例)에 있어서도 이전의 정사에 비해 매우 타당하게 구성되었다. 즉, 대부분 ≪명실록(明實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실록에 없는 내용까지도 포괄하고 있고, 열전의 배열도 적절하게 분리하거나 통합하여 서술하였다. 또한 명 시대 나름의 특징적인 상황에 따라 〈엄당전(閹黨傳)〉, 〈유적전(流賊傳)〉을 새로 만들기도 했고, 외국전을 분리해서 〈토사전(土司傳)〉과 〈서역전(西域傳)〉을 만들어 배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우수한 점에도 불구하고 서술상 중복되고 모순된 점도 없지 않으며, 청조의 관찬(官撰) 사서인 관계로 건주여진(建州女眞)이나 남명(南明)의 역사사실을 기재하지 않거나 축소시키는 등의 회호(回護)도 보이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명사≫는 명 일대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여 수록한 정사로서, 명대사(明代史)를 공부하고 연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료이다. 따라서 본서는 지금까지 명대의 역사상황을 밝히는데 수도 없이 이용되어 왔지만 앞으로도 많이 이용될 수밖에 없는 대표적 사서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근대의 여러 사서는 구양공의 ≪오대사(五代史)≫ 외에 ≪요사(遼史)≫는 간략하고, ≪송사(宋史)≫는 번잡하고 어지러우며, ≪원사(元史)≫는 조략하고, 오로지 ≪금사(金史)≫만이 문장이 고상하고 서술이 간결하여 조금 볼만하다. 그렇지만 ≪명사(明史)≫의 나무랄 데 없음에는 미치지 못한다.[近代諸史 自歐陽公五代史 遼史簡略 宋史繁蕪 元史草率 惟金史行文雅潔 敍事簡括 稍爲可觀 然未有如明史之完善者]”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
• “〈≪명사(明史)≫는〉 수십 년이 걸려 참고하고 정정했으며, 첨가하거나 삭제하고 분리하거나 합침으로 사실은 더욱 상세해지고 문장은 더욱 간결해졌다. 또 옳고 그름은 오랜 후에 확정되고 집필자가 그 사이에 은폐함이 없으니 더욱 믿을 수가 있다.[經數十年參考訂正 或增或刪 或離或合 故事益詳而文益簡 且是非久而後定 執筆者無所徇隱於其間 益可徵信]”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
(2) 색인어: 명사(明史), 장정옥(張廷玉), 명사고(明史稿), 기전체(紀傳體), 본기(本紀), 지(志), 표(表), 열전(列傳)
(3) 참고문헌
• 明史全譯(二十四史全譯, 漢語大詞典出版社)
• 明史 標點校勘本(中華書局)
• 明史考證(黃雲眉, 中華書局)
• 明史考證攟逸(王頌蔚, 學生書局)
• 明史考證攟逸補遺(王季烈, 學生書局)
• 明史 外國傳 譯註(동북아역사재단)
【송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