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수서》는 당(唐) 초에 수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이다. 중국에서는 지속적으로 이전의 왕조사를 정리해 왔는데, 그 중 기전체로 쓰인 공신력 있는 서적을 보통 정사(正史)라고 불렀다. 《수서》는 바로 이 정사의 하나로서 수대(隋代)에 관한 가장 체계적이고 중요한 역사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 《수서》 총 85권은 제기(帝紀)·지(志)·열전(列傳)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기실 이 책은 동시에 편찬되지 않았다. 수대의 황제와 인물에 관한 제기와 열전은 태종(太宗) 정관10년(636)에 만들어졌고, 수만이 아니라 양(梁)·진(陳)과 북제(北齊)·북주(北周)의 제도까지 포함한 지의 경우 고종(高宗) 현경1년(656)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상이한 편찬 과정을 거친 이 두 서적을 합친 것이 바로 지금의 《수서》이다.
2. 저자
(1) 성명:위징(魏徵)(580~643) 등
《수서》의 저자는 사실 한두 명으로 국한할 수 없다. 당대에 전문적인 관청 혹은 관료들을 두어 사서를 수찬(修撰)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는데, 《수서》는 바로 이 ‘설관수사(設館)(官)修史’의 방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의 정사들은 대개 이와 같이 편찬되었고, 《수서》가 이러한 사서 편찬 방식의 효시(嚆矢)라고 해도 좋다.
《수서》의 구체적인 수찬 과정 설명은 문헌에 따라 조금 다르다. 《구당서(舊唐書)》가 남북조시대 말 다섯 왕조의 역사 편찬을 아래의 표처럼 분담시켰다고 한(권73, 〈영호덕분(令狐德棻)〉) 반면, 《사통(史通)》은 기(紀)·전(傳) 55권의 《수서》는 안사고(顔師古)(581~645)·공영달(孔穎達)(547~648)이 썼고 위징은 위의 남북조시대 말 사서 5책 전부의 총괄 책임자였다는 것이다(권12, 〈고금정사(古今正史)〉). 하지만 《사통》의 기록에 의거하더라도, 위징이 《수서》의 수찬에 큰 역할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을 비롯한 많은 책들이 《수서》의 대표 찬자로 그를 지목한 것은 이 때문일 터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위징을 중심으로 저자를 설명하겠다.
〈!--표--〉왕조
북제
북주
양
진
수
사서 편찬 책임자
이백약(李百藥)
영호덕분, 잠문본(岑文本)
요사렴(姚思廉)
요사렴
위징
(2) 자(字):현성(玄成)
(3) 출생지역:거록군(鉅鹿郡) 하곡양(下曲陽)(현 중국 하북성(河北省) 진주시(晉州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위징은 원래 수 말의 혼란 속에서 이밀(李密)(582~619)과 두건덕(竇建德)(573~621) 아래 있던 반당(反唐) 세력의 일원이었다. 뿐더러 당조에 투항한 뒤에도 태자 이건성(李建成)(589~626)을 섬겨 이세민(李世民)(598?~649)과 적대적(敵對的)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이세민이 태종으로 즉위한 후 비록 중용되었을지라도 그의 정치적 지위가 그렇게 공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징은 황제에게 직간(直諫)을 서슴지 않을 만큼 매우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의 주관 하에 편찬된 《수서》가 사실에 충실한 기탄없는 서술로 높이 평가 받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5) 주요저작
《신당서》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위징은 《위징집(魏徵集)》·《상서록(祥瑞錄)》을 비롯한 개인 저작이 적지 않았으며, 많은 도서의 정리·수찬에도 관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집은 일찍 사라져버렸고, 현존하는 것은 후대에 새로 만든 책이다. 근래에 위징의 글을 다시 대규모로 수습한 《신편위징집(新編魏徵集)》이 나왔다.
3. 서지사항
수대에 이미 《수서》라는 이름의 책이 있었으나, 당조는 새로운 사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앞서 보았듯이 약간의 이동(異同)이 존재하는데, 《당회요(唐會要)》에 전하는 편찬 과정은 다음과 같다(권63, 〈사관상(史館上) 수전대사(修前代史)〉). 고조가 영호덕분의 주청으로 양·진·북제·북주·수 오대(五代)의 역사를 정리하려 했으나, 이 첫 시도는 무위(無爲)로 끝났다. 이 작업은 태종 정관3년(629) 중서성(中書省)에 비서내성(秘書內省)을 두면서 재개되어 정관10년에 일단 종료되었다.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수서》는 기·전뿐이었으므로, 얼마 뒤 지의 편찬 사업이 속행되었다. 그 성과가 고종 현경1년에 《오대사(지)五代史志》란 이름으로 나왔으며, 후대에 이 책과 먼저 나온 《수서》를 합간(合刊)한 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이 흔히 보는 《수서》이다.
《수서》가 이처럼 복잡한 내원(來源)을 가진 탓에 사실상 이질적인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전은 수대의 사실만을 기록하였지만, 지의 경우 수는 물론 그 직전 남조(南朝)·북조(北朝)의 상황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수 왕조의 역사일뿐더러 남북조시대의 제도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다. 단 수대의 황제와 인물에 관한 기록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인 이연수(李延壽)(?~?)의 《북사(北史)》에도 나오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사실을 검토하려 할 때 두 책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수서》는 여느 정사와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여러 차례 판각(板刻)되었고,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이들 중 예전에 가장 중시되었던 것은 1927~1937년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발행한 백납본(百衲本)24사(史)였다. 하지만 1959~1977년에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표점(標點)·교감(校勘)한 25사(24사에 《청사고(淸史稿)》 포함)가 나온 뒤, 대부분 이 책을 사용하고 있다. 중화서국본 《수서》는 1973년에 간행되었고, 현재 그 수정·보완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4. 내용
《수서》는 제기 5권, 지 30권, 열전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술하였듯이 지에 앞선 왕조 관련 사실이 일부 포함되었을지라도, 수나라의 짧은 조명(祚命)(581~618)을 생각하면 이 책은 여타 정사에 비해 분량이 많은 편이다. 따라서 그만큼 내용도 충실하다. 좋은 예가 3명의 황제에게 할당된 5권의 제기인데, 이 부분은 단지 2권에 불과한 《북사》의 수 본기(本紀)와 달리 왕조의 편년사(編年史)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와 같은 《수서》의 장점은 그 기록 대상 시기와 편찬 시점의 근접성 덕택이기도 하다. 수대의 문헌이 당시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으므로, 이 책의 제기나 열전은 많은 조서나 상주문의 원문을 풍부하게 수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매우 후하다. 물론 《수서》의 편찬을 주도한 위징의 강직성과 집필 참여자들의 해박한 지식도 당연히 여기에 일조하였다. 예컨대, 《수서》의 천문(天文)·율력(律曆)·오행(五行)의 지(志)를 “모두” 썼다는 이순풍(李淳風)(602~670)은 당시 최고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다(《구당서》 권79, 〈이순풍〉).
그러나 수나라가 망한 직후 편찬된 탓에 초래된 《수서》의 단점도 존재한다. 수와 당의 교체 과정에 직접 관여한 인물이나 그 친인척이 다수 생존해 있어 공정한 역사 서술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연(李淵)(56~635)과 천하의 패권을 다투었던 수 말의 군웅들 대부분을 입전(立傳)하지 않은 반면 당시 재상 방현령(房玄齡)(579~648)의 아버지에게 매우 긴 열전을 할애한(권66, 〈방언겸(房彥謙)〉) 것이 단적인 예이다. 수 양제(煬帝)가 문제(文帝)를 시해했을 가능성을 암시하여(38, 〈후비(后妃) 선화부인진씨(宣華夫人陳氏)〉) 그 부도덕성을 강조한 기록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어떤 정사나 왕조 말기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수서》의 경우 이러한 양상이 유난히 두드러진 것이다.
5. 가치와 영향
《수서》가 수나라의 역사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믿을 만한 문헌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서로서 《수서》의 가치는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예의(禮儀)(7권)·음악(音樂)(3권)·율력(3권)·천문(3권)·오행(2권)·식화(食貨)(1권)·형법(刑法)(1권)·백관(百官)(3권)·지리(地理)(3권)·경적(經籍)(4권)으로 구분된 지가 남북조시대 이래 다양한 제도의 변천 과정을 잘 정리해 두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지의 내용은 매우 정밀하여 유관 분야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하나의 예를 들면, 《수서》 경적지는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이후 정사에서 사라졌던 도서 관련 기록을 부활시켰다. 후한(後漢)~수대의 서적들에 대한 후대의 지식은 거개 이 글에 의존하고 있다. 더욱이 이 글은 도서를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범주로 구분함으로써 전통적인 도서 분류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러므로 《수서》 경적지가 중국의 서지학이나 학술사 방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에서도 일찍부터 《수서》에 관심이 많아 스스로 간행까지 하였던 듯하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문종(文宗) 13년(1059) 2월에 지경산부사전중내급사(知京山府事殿中內給事) 이성미(李成美)(?~?)가 새로 만든 《수서》 680판(板)을 바쳤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연산군(燕山君) 5년(1499) 10월과 중종(中宗) 10년(1515) 11월에 《수서》의 인쇄 필요성을 논의한 기록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 출판으로 이어졌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6. 참고사항
(1) 《수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기록
‧ “지금 〈낙양(洛陽)에 있었던 수대의 책들 가운데〉 현존하는 도서를 살펴서 4부(部)로 나누니, 모두 합쳐 14,466 종류에 89,666권이다. 옛 목록에 있더라도 글의 뜻이 비속하고 교화와 다스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다 없애고, 옛 목록에서 빠졌더라도 글의 뜻이 취할 만하여 〈교화와 다스림을〉 넓히고 유익한 것은 전부 여기에 수록하였다.[今考見存 分爲四部 合條爲一萬四千四百六十六部 有八萬九千六百六十六卷 其舊錄所取 文義淺俗無益教理者 並刪去之 其舊錄所遺 辭義可采有所弘益者 咸附入之]” 〈권32, 〈경적1〉〉
‧ “〈양제는 이반자(離反者)의 증가 상황에서 백성이 아무리 많아도 쓸데없다고 여겨〉 조서(詔書)를 내려 지방에서 관련자들을 생매장해 버리게 하니,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도처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일어났다. 천하 사람들 중 10분의 9가 도적이 되어서, 이들 모두 군마를 훔치고 긴 창을 만들어 성읍(城邑)을 공격해 함락시켰다.[詔郡縣坑殺之 死者不可勝數 所在驚駭 擧天下之人十分 九爲盜賊 皆盜武馬 始作長槍 攻陷城邑.]” 〈권24, 〈식화〉〉
(2) 색인어:수서(隋書), 위징(魏徵), 이순풍(李淳風), 안사고(顔師古), 공영달(孔穎達), 오대사지(五代史志), 설관수사(設館)(官)修史, 경적지(經籍志), 사통(史通), 북사(北史)
(3) 참고문헌
‧ 隋書 標點校勘本(中華書局)
‧ 중국정사조선전2(국사편찬위원회, 신서원)
‧ 역주 중국정사외국전8(김유철 등, 동북아역사재단)
‧ 史通通釋(劉知幾·浦起龍 通釋, 이윤화 역주, 소명출판)
‧ 二十二史箚記(趙翼, 박한제 역주, 소명출판)
‧ 二十四史全譯·隋書(許嘉璐 주편, 漢語大詞典出版社)
‧ 隋書經籍志詳攷(興膳宏 등, 汲古書院)
‧ 魏書食貨志·隋書食貨志譯注(渡邊信一郞, 汲古書院)
‧ 隋書音樂志譯注(六朝樂府の會, 和泉書院)
‧ 新編魏徵集(吕效祖 注編, 三秦出版社)
【하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