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왕명성(王鳴盛)은 청대(淸代) 건륭(乾隆) 연간의 관료이자 오파(吳派)의 고증학자(考證學者)이다. 1787년 100권으로 완성된 본서는 고거(考據)의 방법론을 사학(史學)에 적용하여 ≪사기(史記)≫부터 ≪신오대사(新五代史)≫까지의 역대 정사(正史)를 교감 고증하고 평가한 것으로 삼대(三大) 고증사학(考證史學)의 하나이다.
2. 저자
(1) 성명 : 왕명성(王鳴盛)(1722~1797)
(2) 자(字)·별호(別號) : 자가 봉개(鳳喈)·예당(禮堂), 호가 서장(西莊)·서지(西沚)
(3) 출생지역:강소성(江蘇省) 소주부(蘇州府) 가정현(嘉定縣)(현, 중국 강소성(江蘇省) 상해시(上海市) 가정구(嘉定區))
(4) 주요 활동과 생애
왕명성은, 1754년 진사(進士)로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시강학사(侍講學士)를 역임하고 내각학사 겸예부시랑(內閣學士兼禮部侍郎)에 올랐으나 복건(福建) 향시(鄕試) 정고관(正考官) 때에 역마(驛馬)의 남용 때문에 광록시경(光祿寺卿)으로 좌천되었다. 1763년 모친상으로 사직하고 소주(蘇州)로 낙향한 뒤, 학술에 전심하며 여생을 보냈다. 심덕잠(沈徳潜)에게 시문(詩文)을 배웠고, 혜동(惠棟)에게 경학을 배워 오파의 중진이 되어 전대흔(錢大昕), 왕창(王昶) 등 오중칠자(五中七子)와 친밀하였고, 조익(趙翼), 저인량(諸寅亮), 대진(戴震), 요내(姚鼐) 등과도 교류하였다. 시문·경사(經史)·제자(諸子)·금석(金石)·목록(目錄)에 밝았고, 정현(鄭玄)·마융(馬融)·허신(許愼) 등 한유(漢儒)의 학설과 실증적(實證的) 고거법(考據法)을 강조한 반면에 송학(宋學)을 비판하였다.
(5) 주요 저작
그 밖에 ≪상서후안(尙書後案)≫, ≪아술편(我術編)≫, ≪주례군부설(周禮軍賦說)≫, ≪서장시존고(西莊始存稿)≫, ≪서지거사집(西沚居士集)≫ 등이 있다. 모두 ≪가정왕명성전집(嘉定王鳴盛全集)≫(1~11, 中華書局)에 들어있다.
3. 서지사항
본서는 42세이던 그가 1763년 낙향하면서 저술에 착수하여 20여 년 만인 1787년에 완성한 고증사서(考證史書)이다. 본서는 ≪사기≫에서 ≪신오대사≫까지의 19사가 대상이었지만‚ 17사란 오대(五代)까지의 정사 가운데 ≪신당서≫와 ≪신오대사≫를 제외하고 명명한 송대(宋代)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상각(商榷)이란 살피고 헤아려 요점을 파악하는 것, 구체적으로 와문(譌文)·연문(衍文)·탈문(脫文)의 등의 교감뿐만 아니라 전제(典制)와 사적(事蹟)을 거론하면서 막힌 부분을 해석하고 뒤섞인 내용을 바로 잡은 것이다. 편차는 권수(卷首)에 서문과 목차가 있고, 왕조에 따라 사서를 순차적으로 나누어 권1∼98로 배열하였고, 권99와 100은 〈철언(綴言)〉으로 구성되어 있다.
4. 내용
권1∼권6은 ≪사기(史記)≫‚ 권7∼28은 ≪한서(漢書)≫‚ 권29∼38은 ≪후한서(後漢書)≫‚ 권39∼42는 ≪삼국지(三國志)≫‚ 권43∼52는 ≪진서(晉書)≫‚ 권53∼64는 ≪남사(南史)≫와 남조(南朝)의 정사‚ 권65∼68은 ≪북사(北史)≫ 및 북조(北朝)의 정사‚ 권69∼92는 ≪신구당서(新舊唐書)≫‚ 권93∼98은 ≪신구오대사(新舊五代史)≫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99와 100은 〈철언(綴言)〉이다.
권1∼98의 중요 내용은 각각 정사에 대해 와문(譌文)의 수정, 연문(衍文)의 제거, 탈문(脫文)의 보완 등 문자의 교감, 지리·관직·제도·명물 등의 비교와 고증, 역사의 사건이나 인물, 사적 등의 평가이다. 말미의 〈철언(綴言)〉은 사학상의 일반 논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는 패사(稗史), 소설(小說), 잡저(雜著), 제자(諸子), 보첩(譜牒), 금석(金石) 등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5. 가치와 영향
본서는 청 건륭 중후기에 유행한 고거학의 유행이 사학에 반영된 것으로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조익(趙翼)의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와 함께 3대 고증사서으로 거론된다. 왕명성의 학술과 사상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청나라의 왕희손(汪喜孫) 등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되었고, 권돈인(權敦仁), 이규경(李圭景), 이유원(李裕元)에게도 전해졌지만, 그의 ≪상서후안(尙書後案)≫이 보다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국내에 본서의 번역서는 없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대개 학문(學問)의 도(道)는 허(虛)에서 구하는 것이 실(實)에서 구하는 것만 같지 않으니, 의론(議論)과 포폄(褒貶)은 모두 허문(虛文)일 뿐이다. 사서를 만드는 자가 기록한 바와 사서를 읽는 자가 고핵(考核)하는 바는 모두 능히 그 실을 얻기를 기약할 뿐이다.……비로소 사서를 읽는 방법과 경전을 읽는 방법이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무엇 때문에 그리 말하는가? 경전은 도를 밝힌 것이지만 도를 구하는 자는 반드시 공허하게 의리를 고집하여 도를 구할 필요가 없고, 다만 마땅히 문자를 바루고 음독을 분변하며 훈고를 해석하고 전주(傳注)를 통하면, 의리가 저절로 드러나고 도는 그 가운데에 있다.……사서를 읽는 자는 반드시 논의로 법계(法戒)를 구하지 말고 단지 마땅히 그 전제(典制)의 실상을 살피며, 굳이 포폄으로 여탈(與奪)을 삼지 말고 단지 그 사적의 실제를 살펴야 한다.……요컨대 경학과 사학은 비록 조금 다르지만 아마도 모두 절실(切實)을 힘써 구하려는 뜻으로 귀결되는 것은 동일하다.[蓋學問之道, 求於虛不如求於實, 議論褒貶皆虛文耳. 作史者之所記錄, 讀史者之所考核, 總期於能得其實焉而已矣.……始悟讀史之法與讀經, 小異而大同, 何以言之? 經以明道, 而求道者, 不必空執義理以求之也, 但當正文字·辨音讀·釋訓詁·通傳注, 則義理自見而道在其中矣.……讀史者, 不必以議論求法戒, 而但當考其典制之實, 不必以褒貶爲與奪, 而但當考其事迹之實,……要之, 二者雖有小異, 其總歸於務求切實之意則一也.]” 〈서(序)〉
• “의제(義帝)를 위하여 발상하면서 단복(袒服)하고 크게 곡하니, 이것은 그래도 괜찮다. 항우(項羽)를 죽여 노공(魯公)의 예로 장사를 지내고 〈그를〉 위하여 애도의 예를 표하고 눈물을 흘린 다음에 떠나가니, 천하에 어찌 내가 죽이고 바로 내가 곡하는 경우가 있겠는가?……[爲義帝發喪, 袒而大哭, 此猶自可. 殺項羽, 以魯公禮葬, 爲發哀泣之而去, 天下豈有我殺之卽我哭之者?……]” 〈권2 위우발애(爲羽發哀)〉
• “건무(建武) 8년(32)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살펴보건대, 왕망(王莽)이 고구려왕을 하구려후(下句驪侯)로 고쳐 불렀다가 이에 이르러 예전〈의 작위를〉 회복하였다.[建武八年, 高句驪王遣使奉貢. 按, 王莽更名高句麗王爲下句麗侯, 至是復故.]” 〈권30 고구려(高句驪)〉
• “≪구당서(舊唐書)≫ 〈태종본기(太宗本紀)〉에서 태종이 시신(侍臣)에게 군주가 자주 사면할 수 없는 까닭을 말하면서 ‘夫小人者大人之賊’이라고 하였는데, 두 ‘人’ 자는 모두 ‘仁’으로 고쳐야 한다.[舊紀太宗語侍臣以人君不可數赦, 而云‘夫小人者大人之賊.’ 二人幷當作仁.]” 〈권70 소인대인(小人大人)〉
• “≪예기(禮記)≫ 〈옥조(玉藻)〉에서 ‘천자의 움직임은 좌사(左史)가 기록하고, 천자의 말은 우사(右史)가 기록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그 처음에는 비록 〈언행을〉 나누어서 기록하였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합하여 편술하였다. 그러므로 ≪상서(尙書)≫는 〈천자의〉 말을 기록하면서도 사이에 〈천자의〉 움직임이 언급되어 있고, ≪춘추≫는 〈천자의〉 움직임을 기록하였지만, ≪춘추좌전≫은 〈천자의〉 말을 기록하여 붙여놓았다.[禮記玉藻篇云, 天子動則左史書之, 言則 右史書之. 要之, 其始雖分書, 其後必合編. 故尙書記言而亦間及於記動, 春秋記動, 左傳記言以附益之.]” 〈권99 기언기동(記言記動)〉
(2) 색인어:왕명성(王鳴盛), 십칠사상각(十七史商榷), 오파(吳派), 오중칠자(吳中七子), 고증사학(考證史學), 한학(漢學), 건륭(乾隆)
(3) 참고문헌
• 嘉定王鳴盛全集(錢大昕, 中華書局)
• 王鳴盛及其≪十七史商榷≫(劉玲, 中國礦業大學出版社)
• 王鳴盛學術硏究(施建雄, 中國社會科學出版社)
• 淸代乾嘉歷史考證學硏究(羅炳良, 北京圖書館出版社)
【이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