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유향(劉向)은 중국 서한시대(西漢時代) 말기의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경학(經學)·목록학(目錄學)·문학(文學)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선제(宣帝)·원제(元帝)·성제(成帝) 등 세 명의 군주를 보필하였고, 30여 년 동안 높은 관직을 지키면서 시속과 사직을 걱정하는 수많은 간언과 상소문을 올리는 데에 그의 충정을 한껏 발휘하였다. 《열녀전(列女傳)》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편찬된 여성열전(女性列傳)이다. 작자는 자신의 충간지심(忠諫之心)을 표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진시대 이전의 고적(古籍) 중에서 역대 부녀의 미담선행(美談善行)과 망국패신(亡國敗身)한 행적만을 발췌하여 편찬하고서, 이를 황제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2. 저자
(1)성명:유향(劉向)(B.C.77~B.C.6)
(2)자(字)·본명(本名):자(字)는 자정(子政), 본명(本名)은 갱생(更生).
(3)출생지역:강소성(江蘇省) 패현(沛縣)
(4)중요활동과 생애
유향은 한나라 고조(高祖)의 동부소제(同父少弟)인 초원왕(楚元王)(유교(劉交))의 현손(玄孫)으로, 12세에 연랑(輦郞)에 임명되고 20세가 넘어서는 간의관(諫議官)에 발탁되었고, 황실의 서책을 소장하고 있는 석거각(石渠閣)에서 오경(五經)을 강론하였으며 산기간의대부급사중(散騎諫議大夫給事中) 자리에 올랐다. 원제(元帝) 초기에 산기중정급사중(散騎中正給事中)에 발탁되었다가, 성제(成帝) 때에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중루교위(中壘校尉)를 맡았다.
그는 오랫동안 황실에서 경학연구(經學硏究)에 종사하였고, 수많은 경전(經傳)·제자(諸子)·시부류(詩賦類) 등의 고적(古籍)을 교리(校理)·편집(編輯)하면서 소위 교수(校讎)의 방법으로 황실도서를 정리함으로써 중국 학술문화사업의 발전에 탁월한 공헌을 남겼다. 그의 사후에 아들 유흠(劉歆)이 부친의 《별록(別祿)》의 기초 위에서 《칠략(七略)》을 완성하였다.
서한시대 말기의 혼란스런 왕실 상황을 살펴보면, 성제(成帝) 당시에 태후왕씨(太后王氏)의 형제인 왕봉(王鳳)·왕숭(王崇) 등 일곱 사람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성제는 음주황음(飮酒荒淫)에 빠져 있었다. 또한 빼어난 미모와 출중한 가무 솜씨를 지닌 장안(長安)의 관비(官婢) 출신인 조비연(趙飛燕)이 입궁 이후 성제의 총애를 받아 허황후(許皇后)를 축출하고 황후의 자리에 올라서 사치와 음탕한 일을 자행하였고 황자(皇子)를 낳은 후궁들을 잔악하게 살해하는 일도 저질렀다. 외척 왕씨의 강력한 정치세력 형성과 전횡, 궁중 귀인들 사이의 혼란한 쟁총(爭寵)의 사태를 목격한 유향은 왕실의 법도와 안녕을 회복하고자 간언과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린 바 있으며, 《열녀전》·《신서(新序)》·《설원(說苑)》 등을 통하여 군왕을 보필하며 사직을 수호하려는 충성심을 아끼지 않았다.
(5)중요 저작
《홍범오행전론(洪範五行傳論)》·《오경통의(五經通義)》·《세설(世說)》·《설노자(說老子)》 등의 저술과 사부(辭賦) 33편을 지었다고 하지만, 대부분 소실된 상황이다. 또한 《열선전(列仙傳)》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서(漢書)》 중의 예문지(藝文志)와 본전(本傳)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대 사람의 위작(僞作)으로 추정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저서로는 《열녀전》 이외에, 《신서》·《설원》 등이 비교적 학술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서지사항
현전하는 《열녀전》은 총 7권으로, 총 104편의 일화를 주인공 여성의 행적 유형에 따라 〈모의전(母儀傳)〉(제1권)·〈현명전(賢明傳)〉(제2권)·〈인지전(仁智傳)〉(제3권)·〈정순전(貞順傳)〉(제4권)·〈절의전(節義傳)〉(제5권)·〈변통전(辯通傳)〉(제6권)·〈얼폐전(孽嬖傳)〉(제7권) 등 7부류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모의전〉에서는 14인을 수록하였고, 나머지에서는 각 권마다 15인을 기준으로 수록하였다. 본서의 특징으로는 권의 첫머리마다 송찬(頌讚) 4자(字) 10구(句)를 붙였는데 대체로 각 권 총서(總序)의 의미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고, 모든 일화의 끝부분에는 “군자위(君子謂)”의 평단어(評斷語)와 《시경(詩經)》 중에서 단장취의(斷章取義)의 방식으로 두 구절을 인용하여 포폄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한서(漢書)》 〈초원왕전(楚元王傳)〉에서는 유향이 《열녀전》 8편을 편찬하여 황제에게 헌서하였음을 밝히고 있고, 그 이후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등에서는 유향이 《열녀전》 15권을 편찬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에서는 《고열녀전(古列女傳)》 9권을 편찬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볼 때 《열녀전》 원서(原書)의 실전(失傳)이 오래되어 그 진면목을 밝히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유향은 그의 《칠략별록(七略別錄)》에서 종류상종(種類相從)을 수록기준으로 삼아 7편으로 만들고 열녀도(列女圖)를 병풍에 그려서 일화 속의 교훈을 되새기도록 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중국에 현전하는 《열녀전》의 대표적인 판본으로는 대만(臺灣)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발행한 사부총간정편(四部叢刊正編) 중의 ‘장사섭씨관고당장명간본(長沙葉氏觀古堂藏明刊本)’, 대만 중앙도서관 소장의 ‘가정간오군황씨간본(嘉靖間吳郡黃氏刊本)’과 ‘황노증간본(黃魯曾刊本)’, 대만 광문서국(廣文書局)에서 발행한 ‘구십주회도고열녀전(仇十洲繪圖古列女傳)’,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의 ‘고지규방송각본(顧之逵仿宋刻本)’,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도광간완복모각송본(道光間阮福模刻宋本)’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교주본(校注本)으로는 양단(梁端)의 《교주열녀전(校注列女傳)》, 왕조원(王照圓)의 《보주열녀전(補注列女傳)》 등이 있다. 수록된 일화의 차례는 몇몇 판본에서 다소 다른 면모를 보이지만, 그 내용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열녀전》의 한반도 유입에 대해서는 정확한 고증을 할 수 없지만, 문헌상으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종(太宗) 4년 11월 조(條)에 처음 보인다. 이로써 조선에는 태종 무렵에 《열녀전》 판본이 유입되었다고 알려지게 된 것인데, 당시의 판본은 실전된 실정이다. 한글 창제 이후 중국에서 유입된 서책들이 언역(諺譯)되기 시작하였는데, 《열녀전》은 중종(中宗) 38년(1543)에 《소학(小學)》, 《여계(女誡)》, 《여칙(女則)》 등과 함께 후륜선속(厚倫善俗)을 도모하는 서책으로서 언역작업이 완성되었다. 그 진면목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도,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2책본, 1책본), 전형필 소장의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 필사본(4책본), 중앙공무원연구원 소장본(8권4책본) 등과 구활자본 몇 종이 남아 있어서 그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4. 내용
《열녀전》에 수록된 주인공 여성의 언행담은 비록 단편적(斷片的) 일화에 해당된 것이었지만, 대체로 현비(賢妃)·현모(賢母)·양처(良妻)·정부(貞婦)·열녀(烈女)들이 실천한 미덕가행(美德嘉行)과 음녀(淫女)·우부(愚婦)들이 저지른 망국패신(亡國敗身)의 실태악행(失態惡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표면적인 여성의 언행담 속에는 정치적 성향이 농후한 권간(勸諫) 의도가 내포되었음을 찾아낼 수 있다. 특히 〈얼폐전〉 이외의 일화에서는 표면적으로 주인공 여성을 도덕규범의 실천자로서 내세워 그들의 박학다식,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대처방안을 지닌 현명한 인물로 칭송하고 있는 인상을 남기고 있어도, 실제적으로는 그들의 언변 중에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한 규범실천의 문제, 군왕의 실정(失政), 혹은 당면한 정치적 모순과 폐단의 지적 등과 같은 진술이 빈번히 출현하였고, 그 분량도 일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양상은 《열녀전》이 단순한 열녀담(列女談)의 기록물이 아니라, 특정인(황제)에게 권간(勸諫)의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했음을 드러내는 방증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열녀전》의 실체는 유향이 본서를 완성하려 했던 직접적인 계기와 의도가 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왕정(王政) 기강확립을 위한 권간 태도, 당시의 정치적 상황, 궁실에서 벌어진 쟁총(爭寵)·실태(失態)의 실제상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했을 때에 이뤄질 것으로 판단된다.
5. 가치와 영향
《열녀전》이 편찬되었던 성제(成帝) 무렵에 유향은 광록대부(光祿大夫)의 관직에 있으면서 외척의 간정(干政)과 궁중귀녀(宮中貴女)들의 쟁총으로 문란해진 왕실을 풍간(諷諫)하기 위하여 선진시대(先秦時代) 이래의 많은 서책 속에 산재된 부녀의 언행 기록을 의도적으로 수집하고 유별화(類別化)하여 권간의 의도를 담아 황제에게 헌서(獻書)하였다. 이러한 유향의 애군우국적(愛君憂國的)인 심정으로 편찬된 《열녀전》에 대해서 후세 사람들이 이를 단순히 계녀교부(誡女敎婦)의 내용물로 이해하는 것은 편찬 이후의 전파·유행 과정에서 일어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본서는 후일에 역대로 여성의 언행만을 전적으로 수록한 여성열전(女性列傳)의 성행을 일으켰던 바, 《수서(隋書)》·《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 등의 기록에서도 다양한 여성열전이 편찬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사가(史家)의 관점에서도 여성의 덕행을 중시하였는데,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이후 《명사(明史)》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정사(正史) 중에 ‘열녀전’의 명칭으로써 독립적인 편권(篇卷)의 체재를 갖추어 여성의 부덕(婦德)을 강조하고 이를 칭송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열녀전》은 여성훈육의 지침서로 크게 인정받아 후한시대(後漢時代) 반소(班昭)의 《여계(女誡)》와 함께 여계서(女誡書)의 연원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거의 전통사회에서는 여교(女敎)에 관심을 지닌 지식인들이 각종 여계 시문을 찬술·전파하여 부덕(婦德)의 중요성을 강조한 결과, 중국은 물론 조선과 일본에서도 여성의 부덕을 강조하는 다양한 열녀전 의작물(擬作物)이 출현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해학사(解學士)의 《전고열녀전(典故列女傳)》, 모곤(茅坤)의 《증보전상평림고금열녀전(增補全像評林古今列女傳)》, 청나라의 류개(劉開)의 《광열녀전(廣列女傳)》 등의 열녀전 의작물이 저술되었고, 조선에서의 소혜왕후한씨(昭惠王后韓氏)의 《내훈(內訓)》, 한원진(韓元震)의 《한씨부훈(韓氏婦訓)》, 일본에서의 안홍충(安弘忠)의 《본조열녀전(本朝列女傳)》과 녹정천류(綠亭川柳)의 《열녀백인일수(列女百人一首)》 등이 《열녀전》의 영향을 받아 이뤄진 의작물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국내에서는 동아시아 여성의 기원을 탐색하는 여성학 연구의 중요 텍스트로 활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6. 참고사항
(1)명언
• “무릇 신하가 되어서 군왕을 섬기는 태도는 자식이 되어서 자신의 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다.[夫爲人臣 而事其君 猶爲人子 而事其父也]” 〈모의전(母儀傳) 제전직모(齊田稷母)〉
• “예로부터 성왕은 반드시 배필을 예법에 합당하게 맞이하였습니다. 배필을 올바르게 맞이하면 그 나라는 흥성하고, 올바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법입니다.[自古聖王 必正妃匹 妃匹正則興 不正則亂]” 〈인지전(仁智傳) 위곡옥부(魏曲沃負)〉
•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는 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女之不正 國家所以覆而不安也]” 〈얼폐전(孽嬖傳) 조도창후(趙悼倡后)〉
(2)색인어: 여성열전(女性列傳), 여계서(女誡書), 부도(婦道), 여범(女範), 권간(勸諫), 열녀전의작(列女傳擬作), 열녀전언해(列女傳諺解), 여성학(女性學), 열녀전(列女傳), 고열녀전(古列女傳)
(3)참고문헌
• 열녀전(이숙인 옮김, 예문서원)
• 동아시아 여성의 기원(이화중국여성문학연구회 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 古列女傳(顧之逵仿宋刻本, 臺灣故宮博物院 所藏本)
• 新譯列女傳(黃淸泉 注譯, 三民書局)
• 歷代婦女著作考(胡文楷, 鼎文書局)
• 列女傳(四部備要本, 中華書局)
• 列女伝(荒城孝臣, 明德出版社)
• 五種遺規(陳宏謀, 中華書局)
• 中國古代女子敎育(曹大爲, 北京師範大學出版社)
• 中國婦女史論文集(李又寧 등, 臺灣商務印書館)
• 中國文學の女性像(石川忠久, 汲古書院)
• 〈≪列女傳≫探微〉(강현경, 국립대만사범대학 국문연구소, 석사학위논문)
【강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