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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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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서는 수(隋)나라의 두대경(杜臺卿)이 일 년 열두 달의 정령(政令) 및 세시풍속과 관련된 기사들을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까지 전래되던 경(經), 사(史), 자(子), 집(集) 등 각종의 문헌들로부터 추출하여 집성한 책이다. 총 12권이며 이 가운데 제9권은 결락되어 있다. 전통시대에는 이러한 유형의 책들을 ‘시령서(時令書)’라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성격의 문헌들로는 《여씨춘추(呂氏春秋)》 〈십이기(十二紀)〉, 《예기(禮記)》 〈월령(月令)〉, 《하소정(夏小正)》, 《회남자(淮南子)》 〈시칙훈(時則訓)〉 등이 있다. 본서에 인용된 문헌들 가운데 상당수가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기 때문에 고일서(古逸書)의 집록(輯錄)에 있어서 본서는 귀중한 근거자료가 된다. 또한 위진남북조시대 민간의 풍속에 대한 서술이 상세하여 위진남북조 시대의 생활상과 문화를 이해함에 필수불가결한 사료다.

2. 편저자

(1) 성명:두대경(杜臺卿)(524?~?)
(2) 자(字)·별호(別號):소산(少山)
(3) 출생지역:박릉(博陵) 곡양(曲陽)(現 중국 하북성(河北省) 곡양현(曲陽縣))
(4) 주요활동과 생애
두대경은 북제(北齊)에서 위위경(衛尉卿)까지 지낸 두필(杜弼)의 둘째 아들이다. 《수서(隋書)》와 《북사(北史)》에 모두 그의 열전(이하 ‘본전(本傳)’으로 약칭)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서》 쪽이 더 상세하다. 그는 봉조청(奉朝請)으로 입사하여 사공서합좨주(司空西閤祭主), 사도호조(司徒戶曹), 저작랑(著作郞), 중서황문시랑(中書黃門侍郎), 수국사(修國史) 등을 거쳐 겸상서좌증(兼尙書左丞)에 이르렀다. 그가 역임한 관직들은 당시에 청관(淸官)으로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북제가 북주(北周)에 의해 멸망된 후에는 향리(鄕里)로 돌아가 자제들에게 《예기(禮記)》와 《춘추(春秋)》를 전수했다. 북주에서 수로 왕조가 교체된 후, 개황(開皇) 초에 다시 조정에 불려 들어갔다. 바로 이 무렵에 《옥촉보전》을 당시 황제였던 문제(文帝)에게 올렸고 문제는 그에게 견(絹) 200필을 하사했다. 그는 문제에게 자신이 청각장애가 있음을 이유로 실무를 보는 관직 대신 국사(國史)를 편수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문제를 이를 허락하고 그를 저작랑에 임명했다. 개황 14년(594)에 치사(致仕)하고 향리로 돌아가 수년 후에 사망했다.
(5) 주요저작: 《수서》와 《북사》의 본전에 따르면 그는 문집 15권과 《제기(齊記)》 20권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는 모두 전하지 않는다. 그의 저작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본서가 유일하다.

3. 서지사항

본서는 총 12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가운데 1권의 첫머리에 저자의 자서(自序)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별도의 연월일이 주기되어 있지 않으므로, 정확한 성립 시점은 미상이다. 다만 《수서》 본전에서 그가 개황 초 조정에 불려가기 전에 이미 본서를 완성했다고 하였으니, 늦어도 수 왕조의 건국 이전에 본서가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서》 〈경적지(經籍志)〉에서도 본서는 12권으로 되어 있다. 남송대의 장서가(藏書家)인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서도 12권으로 되어 있고,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도 이와 같다. 따라서 본서는 원대(元代)까지는 전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명대 이후에 본서는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 결과 《사고전서(四庫全書)》에도 수록되지 못하였다. 청말에 이르러 일본을 방문했던 양수경(楊守敬)에 의해 본서의 사본이 발견되었는데, 전전가(前田家)의 존경각문고(尊經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던 일본 정화(貞和) 연간(1345~1349)의 초본(抄本)이 바로 그것이다. 두루말이 형태[卷子型]의 이 초본은 총 12권 가운데 제9권이 결락되어 있다. 이후 양수경의 권유로 당시 일본주재 공사(公使)였던 청의 여서창(黎庶昌)은 《고일총서(古逸叢書)》를 편찬할 때, 본서를 수록했고 이것이 이후 본서의 통행본이 되었다. 《고일총서》에 수록된 본서의 저본은 존경각문고본을 영사(影寫)한 궁내성도서료본(宮內省圖書寮本)이다. 고일총서본은 1939년 중국의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편찬한 총집(叢集)인 《총서집성초편(叢書集成初編)》 1338에도 수록되어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1943년 존경각문고본의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이어서 1970년 대만(臺灣)의 예문인서관(藝文印書館)에서 이를 다시 영인하고 《세시습속자료휘편(歲時習俗資料彙編)》에 수록하여 간행했다. 다만 《고일총서》와 《세시습속자료휘편》에 수록된 사본의 원문 행 배치와 구성, 그리고 글자체는 동일하지 않다. 고일총서본은 원서 단계에서는 없었던 행과 행 사이에 계선(界線)이 그어져 있고, 글자체는 통용되는 글자체로 표기되어 있다. 반면 세시습속자료휘편본의 경우 계선이 없고 정자(正字)보다는 이체자가 많이 사용되어 있다. 따라서 세시습속자료휘편본이 원서의 면모에 더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는 본문과 주문(注文)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본문은 대자(大字)로 되어 있고, 주문은 할주(割注)의 형식으로 본문의 하단에 쌍행(雙行) 소자(小字)로 삽입되어 있다. 이 같은 표기방식이 편찬 당시부터 그러했던 것인지, 아니면 필사 단계에서 열람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변경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초본에서 결락된 9권의 일문(逸文)은 《초학기(初學記)》 권4, 세시부(歲時部) 하(下), 구월구일(九月九日) 조의 주문(注文)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그 분량이 영세하여 9권의 전모를 복원하기에는 부족하다.

4. 내용

자서(自序)에 따르면 본서의 서명인 ‘옥촉(玉燭)’은 《이아(爾雅)》 〈석천(釋天)〉에서 “사기가 조화로운 것을 옥촉이라 한다.[四氣和 謂之玉燭]”라고 한 것에서 취했고, ‘보전(寶典)’은 《주서(周書)》에서 “무왕이 주공에게 도덕을 미루어 보전으로 삼으라고 하였다.[武王說周公推道德以爲寶典]”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말한 《주서》는 오늘날의 《일주서(逸周書)》이며 자서에 인용된 문장과 유사한 문장은 〈주서서(周書序)〉에서 확인된다. 다만 〈주서서〉에서는 “무왕이 주공에게 도를 지켜서 보배로 삼으라 하고, 보전을 지었다.[武王評周公維道以爲寶 作寶典]”라고 하여 자서에 인용된 《주서》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본서에는 일 년 열두 달의 세시풍속과 관련된 기사들이 월별로 나뉘어 각 권에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한 달이 한권씩 편성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1월이 1권, 2월이 2권이다. 각 권마다 그 달의 연중행사와 관계된 자료들이 집성되어 있는데, 전거자료는 경서(經書)와 위서(緯書), 사서(史書), 선진제자서(先秦諸子書), 역대 제가(諸家)들의 저작, 그리고 불교와 도교의 경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가운데 저자가 근본으로 삼은 것은 《예기(禮記)》 〈월령(月令)〉이다. 각 권의 첫머리에는 그 달에 해당하는 《예기》 〈월령〉의 기사를 채록하여 배치했고, 이어서 후한(後漢) 채옹(蔡邕)의 《월령장구(月令章句)》로 이를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에 뒤이어 그와 관계된 경서나 위서, 사서 및 제가의 문헌들로부터 추출한 문구들을 열거했다. 저자는 본인이 인용한 내용에 추가하거나 보완할 사항이 있으면 해당 문장에 ‘금안(今按)’을 모두(冒頭)로 하여 자신의 주석을 삽입하였다. 이 주석 내에서도 다양한 문헌들과 자서(字書)들이 인용되어 있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저자는 필요에 따라 권의 마지막 부분에 각각 ‘정설(正說)’, 또는 ‘부설(附說)’로 시작하는 문장들을 첨부하기도 하였다. 정설은 앞서 본문에서 인용된 문헌들의 내용에 대한 의혹이나 오류에 대한 저자의 검토에 해당하고, 부설은 당시 민간의 풍속을 소개한 것이다.

5. 가치와 영향

본서에는 위진남북조시대까지 널리 읽혔던 각종의 위서, 제가의 문헌들이 인용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 것들이다. 따라서 본서는 망실된 옛 전적의 집록과 복원에 있어서 귀중한 근거자료가 된다. 예를 들어 후한 채옹의 《월령장구》, 후한 최식(崔寔)의 《사민월령(四民月令)》은 그 책이 현재 남아 있지는 않으나, 본서를 통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될 수 있었다. 또한 본서에 인용되어 있는 경서와 사서의 기사들을 통해 오늘날 전래되고 있는 판본의 탈루와 오류의 교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본서에 기술되어 있는 민간의 세시풍속은 다른 문헌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서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생활상과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추후 보완 예정
• “월령(月令)을 중심으로 삼고 유형에 따라 분류하되 이를 확대하여 여러 서적들, 그리고 이에 더해 시속(時俗)에 이르기까지 두루 채록하고 월별로 한 권을 지었는데 매우 상세하면서도 널리 다루었다고 할 만하다.[以月令爲主 觸類而廣之 博采諸書 旁及時俗 月爲一卷 頗號詳洽]” 〈진진손(陳振孫),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 권6 시령류(時令類)〉
• “〈《업중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병주(幷州)의 풍속에 따르면 동지(冬至) 후 백오일이 되는 날, 개자추 때문에 삼일동안 불을 쓰지 않고 음식을 차게 하여 먹는다. 뻑뻑한 죽을 만드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미숫가루다. 수도 일대에서는 이를 한식이라 하고 또 예락(醴酪)을 만든다. 예는 멥쌀이나 보리를 불에 구워 만든 것이요, 락은 살구씨를 찧은 다음 삶아서 죽으로 만든 것이다.[鄴中記曰 并州之俗 以冬至後百五日 有介子推 斷火冷食三日 作干粥 是今糗也 中國以爲寒食又作醴酪 醴者火粳米或大麥作之 酪擣杏子人煮作粥]” 〈《옥촉보전(玉燭寶典)》 卷第二〉
(2) 색인어:시령(時令), 두대경(杜臺卿), 북제(北齊), 예기(禮記), 월령(月令), 월령장구(月令章句), 채옹(蔡邕), 사민월령(四民月令), 최식(崔寔), 위서(緯書)
(3) 참고문헌:추후 보완 예정
• 《고일총서(古逸叢書)》(여서창(黎庶昌) 집(輯), 江蘇廣陸古籍刻印社)
• 《총서집성초편(叢書集成初編)》 1338(上海, 商務印書館 輯)
• 《세시습속자료휘편(歲時習俗資料彙編)》 2(臺北, 藝文印書館)
• 〈옥촉보전해제(玉燭寶典解題)〉(吉川幸次郞, 《吉川幸次郞全集》, 筑摩書房)
• 《역주 예기집설대전: 월령》(정병섭 역, 학고방)

【양진성】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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