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전대흔(錢大昕)은 청대(淸代) 건가(乾嘉) 연간 관료이자 오파(吳派) 출신으로 당대 고증학(考證學)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1780년 100권으로 완성된 본서는 《사기(史記)》부터 《원사(元史)》까지의 역대 정사(正史)를 교감, 고증하고 평가한 것으로 청대의 삼대(三大) 고증사학(考證史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저술이다.
2. 저자
(1) 성명:전대흔(錢大昕)(1728~1804)
(2) 자(字)·별호(別號):자가 曉徵, 호가 신미(辛楣), 죽정(竹汀), 별호가 죽정거사(竹汀居士), 잠연노인(潛硏老人)
(3) 출생지역:강소성(江蘇省) 가정현(嘉定縣)(현 중국 상해시(上海市) 가정현)
(4) 주요활동과 생애
전대흔은, 조부와 부친이 모두 수재(秀才)인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고학적(古學的) 가학을 익히면서 신동으로 알려졌고, 소주(蘇州)의 자양서원(紫陽書院)에서 수학하며 왕명성(王鳴盛)(처남)·왕창(王昶) 등과 교제하였으며, 15세에 제생(諸生)이 되어 시부(詩賦)에 뛰어나 ‘오중칠자(吳中七子)’로 거론되었다. 건륭 16년(1751) 황제가 남순(南巡)하자 부(賦)를 바쳤고, 이어진 향시(鄕試)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거인(擧人)을 하사받아 바로 내각중서(內閣中書)에 임명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북경으로 올라가 본격적인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건륭 19년(1754)에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翰林院)과 첨사부(詹事府)에서 서길사(庶吉士) 편수(編修), 시강학사(侍講學士), 소첨사(少詹事) 등을 역임하였고, 상서방(上書房) 행도(行徒)와 일강(日講) 기거주(起居注)에 충원되었다. 이 무렵 기윤(紀昀)·대진(戴震)·주균(朱筠) 등 일류 학자들과 절차탁마하면서 중서(中西) 천산학(天算學)을 연구하였고, 황명을 받들어 《열하지(熱河志)》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속통지(續通志)》,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등의 편찬에 참가하였으며, 산동·하남·절강·호남의 향시(鄕試) 정부고관(正副考官)을 지냈다.
건륭 39년(1774) 광동학정(廣東學政)으로 나아갔으나 이듬해 부친상으로 귀향하였다. 이후 남경(南京)의 종산(鍾山)·소주(蘇州)의 자양·송강(松江)의 누동서원(婁東書院)의 주강(主講)이 되어 소진함(邵晉涵)·이문조(李文藻)·이예(李銳)·주준성(周駿聲)·손성연(孫星衍)을 비롯하여 2,0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하면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사후(死後)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오파(吳派) 출신으로 한학(漢學)과 고학(古學)을 중시하면서도 초월하여 전문(專門) 학술을 널리 섭렵하는 가운데 경학(經學)·소학(小學)·천산(天算)·전장제도(典章制度)·씨족(氏族)·금석(金石)·지리(地理)·교감(校勘)에 밝았고, 특히 사학과 그 고증에 뛰어났다.
(5) 주요 저작
그 밖에 《경전문자고이(經典文字考異)》 《성류(聲類)》 《십가재양신록(十駕齋養新錄)》 《항언록(恒言錄)》 《삼사습유(三史拾遺)》 《제사습유(諸史拾遺)》 《원사씨족표(元史氏族表)》 《원사예문지(元史藝文志)》 《의년록(疑年錄)》 《항언록(恒言錄)》 《사사삭윤고(四史朔閏考)》 《삼통술연(三通術衍)》 《금석발미(金石文跋尾)》 《금석문자목록(金石文字目錄)》 《잠연당시문집(潛硏堂詩文集)》 《죽정일기초(竹汀日記鈔)》 등이 있다. 이상은 모두 《가정전대흔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3. 서지사항
약관(弱冠) 무렵부터 사서(史書)를 애독한 전대흔은 건륭 32년(1767)에 본격적으로 본서를 찬술하기 시작하여 45년(1780)에 100권으로 완성하였다. 건륭 59년(1794)에 《신오대사》까지 출간된 이래로 가경 2년(1997)에 모두 출판되었으니, 이것이 원각본(原刻本)이다. 그 뒤에 본서는 광서(光緖) 10년(1884) 호남 장사(長沙)의 용씨가숙(龍氏家塾)에서 다른 저술과 함께 《가정전씨잠연당전서》로 출판되었다. 여기에는 원래 판각되지 않은 《경전문자고이》와 《죽정일기》를 제외한 22종 80책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본서는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중간본(重刊本)이 소장되어 있다. 1997년 남경(南京)의 강소고적출판사(江蘇古籍出版社)에서 간행된 《가정전대흔전집(嘉定錢大昕全集)》 10권본에는 《가정전씨잠연당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미간고(未刊稿)가 포함되었고, 2016년에는 일문(佚文)과 부록을 더한 11권의 증정본(增訂本)이 그 후신인 봉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발행되었다. 진문화(陳文和) 등이 표점(標點)한 《가정전대흔전집》은 간자체로 이루어져 있다.
4. 내용
본서는 송대(宋代)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모방하면서도 《사기》에서 《원사》까지를 대상으로 삼았다. 그 내용은 22대의 정사(正史)와 그 주석에 대해 사실(事實)의 고변(考辯), 문자의 이동(異同), 어구(語句)의 해석, 제도의 연혁, 지리의 변천 등을 엄격하게 고증하였고 각종 탈루를 보완하고 오류를 바로 잡았다. 여기에는 각종 사서, 문서, 잡저(雜著), 금석(金石), 지지(地志), 천산(天算), 소학 등이 동원되었다.
원래 24사 가운데 《구오대사(舊五代史)》와 《명사(明史)》를 제외하여 22사를 대상으로 삼았지만, 사마표(司馬彪)의 《속한서(續漢書)》가 포함되어 전체적으로는 23사로도 언급된다. 구체적으로 《사기(史記)》 5권, 《한서(漢書)》 4권 《후한서(後漢書)》 3권, 《속한서(續漢書)》 2권, 《삼국지(三國志)》 3권, 《진서(晉書)》 5권, 《송서(宋書)》 2권, 《남제서(南齊書)》 1권, 《양서(梁書)》 1권, 《진서(陳書)》 1권, 《위서(魏書)》 3권, 《북제서(北齊書)》 1권, 《주서(周書)》 1권, 《수서(隋書)》 2권, 《남사(南史)》 3권, 《북사(北史)》 3권, 《당서(唐書)》 16권, 《구당서(舊唐書)》 4권, 《오대사(五代史)》 6권, 《송사(宋史)》 16권, 《요사(遼史)》 1권, 《금사(金史)》 2권, 《원사(元史)》 15권이다.
5. 가치와 영향
본서 가운데 《송사》 《요사》 《금사》 《원사》의 4사에 들인 공력도 컸고, 특히 《원사》에 대한 내용은 보다 주목된다. 이는 원대사의 연구를 개척하고 서북사지학(西北史志學)의 연구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본서는 고증의 엄격성과 면밀성을 토대로 건가 연간 사학을 경학에서 독립시켜 전문 학술로 확립함으로써 동시대 왕명성의 《십칠사상각》, 조익의 《이십이사차기》보다 높이 평가된다.
전대흔은 조선 후기 북학파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찍이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항전척독(杭傳尺牘)〉의 ‘건정동필담속(乾淨衕筆談續)’에는 천애지기(天涯知己)를 맺은 엄성(嚴誠)의 좌사(坐師)였다. 여기에는 당시 일강 기거주로 한림원 시강학사인 전대흔이 소개되어 있다. 그 뒤를 이어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김정희(金正喜) 등에게도 전대흔에 대한 관심은 이어졌다.
6. 참고사항
(1) 명언
‧ “태사공이 말하기를, ‘내가 기산(箕山)에 올랐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이르기를, ‘대개 양운(楊惲)·동방삭(東方朔)이 그 글에서 여(余)라는 글자를 보고 「태사공왈(太史公曰)」을 덧붙였다.’고 하였다. 사마천[子長]이 매 편마다 태사공이라고 쓴 것은 모두 스스로 자신의 관직을 언급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더하는 바가 아니고 또한 부친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다. 〈가생풍당전(賈生馮唐傳)〉의 글에도 여(余)라고 썼지 태사공이라고 말하지 않았다.[太史公曰 余登箕山 索隱云 蓋楊惲東方朔見其文稱余 而加太史公曰也 子長書每篇稱太史公 皆自稱其官 非他人所加 亦非尊其父也 賈生馮唐傳文亦有稱余 而不可太史公者]” 〈권5,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
‧ “물러나 만장(萬章)의 무리와 함께 하였다. 《사기색은》에 이르기를, ‘맹자에게는 만장 공명고(公明高) 등이 있었으니, 대개 모두 맹자의 문인인 듯하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공명고는 맹자의 제자가 아니다. 《광운(廣韻)》에 이루(離婁)를 맹자의 문인으로 삼았는데, 그 오류도 이와 유사하다.[退而與萬章之徒 索隱云 孟子有萬章公明高等 蓋幷軻之門人也 按公明高非孟氏弟子 廣韻以離婁爲孟子門人 其誤亦類此]” 〈권5,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 “승상(丞相) 청적(靑翟)·중위(中尉) 가(嘉)·정위(廷尉) 구(敺)가 조착(조조)曹錯을 핵주(劾奏)하였다. 이때 개봉후(開封侯) 도청(陶靑)이 승상이었으니, 적(翟)자는 쓸모없는 글자이다. 한 무제(武帝) 때 승상 엄청적(嚴靑翟)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연결되어 잘못된 것이다. 〈경제기(景帝紀)〉에 ‘원년 어사대부(御史大夫) 청적(靑翟)을 파견하였다.’고 서술된 것도 잘못이 이와 같다.[丞相靑翟中尉嘉廷尉敺劾奏錯 是時開封侯陶靑爲丞相 翟字衍文也 因武帝時有丞相嚴靑翟 相涉而誤 京制紀 元年 遣御史大夫靑翟 誤與此同]” 〈권8, 《한서(漢書)》, 〈조착전(曹錯傳)〉〉
‧ “건안(建安) 원년(196), 위장군(衛將軍) 동승(董承)을 봉하여 보국장군(輔國將軍)으로 삼고, 복완(伏完) 등 13명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동탁전(董卓傳)〉에 ‘이때 동승, 복완 등 십여 명을 봉하여 열후로 삼았다.’고 하였다. 동승(董承) 아래 위(爲)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13명은 동승, 복완, 정중(丁中), 종집(種輯), 종요(鍾繇), 곽부(郭溥), 동분(董芬), 유애(劉艾), 한빈(韓斌), 양중(楊衆), 나소(羅邵), 복덕(伏德), 조유(趙蕤)이다. 원굉(袁宏)의 《後漢紀》를 보라. 다만, 복완이 부친의 작위 불기후(不其侯)를 승습한 것은 마땅히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시대이니, 어찌 이때를 기다려 처음으로 열후에 봉해졌겠는가? 이는 사서(史書) 문장에서 의심할 만한 것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복완에게는 단지 식호(食戶)를 늘려주었고, 그의 아들 복덕(伏德)에게는 별도로 열후를 봉해 주었을 뿐이다.[建安元年 封衛將軍董承爲輔國將軍 伏完等十三人爲列侯 按董卓傳 是時封董承 伏完等十餘人爲列侯 董承下不當有爲字 十三人者 董承伏完丁中種輯鍾繇郭溥董芬劉艾韓斌楊衆羅邵伏德趙蕤也 見袁宏後漢紀 但伏完襲父爵不其侯 當在桓靈之世 豈待此時始封列侯 此史文之可疑者 竊意完但增加食戶 其子德別受列侯之封耳]” 〈권8, 《후한서(後漢書)》, 〈헌제기(獻帝紀)〉〉
‧ “고구려의 관직에는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고추가(古鄒加)·주부(注簿)·우태승(優台升)·사자(使者)·조의선인(皁衣先人)이 있다. 고추가(古鄒加)는 《후한서》에 고추대가(古鄒大加)로 되어 있으니, 빈객을 장악하는 관리이다. 우태(右台) 아래의 승(升)자는 없어야 한다. 조(皁)자는 백(帛)자가 되어야 한다.[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鄒加注簿優台升使者皁衣先人 古鄒加後漢書作古鄒大加 謂掌賓客之官也 右台下無丞字 皁作帛]” 〈권15, 《삼국지(三國志) 위(魏)》, 〈고구려전(高句麗傳)〉〉
‧ “태자 이승건(李承乾)을 폐하고 진왕(晉王)을 세우며 장손무기(長孫無忌)를 태자태사(太子太師)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으로 삼았다. 동삼품(同三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살펴보건대, 〈태종기(太宗紀)〉 정관(貞觀) 17년 4월 진왕 이치(李治)를 세워 황태자로 삼고 특별히 소우(蕭瑀)를 임용하여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삼고 이적(李勣)을 태자첨사(太子詹事)·동중서문하삼품으로 삼았다. 〈재상표(宰相表)〉에도 단지 소우·이적 두 명만 기록되어 있다. 그때 장손무기가 태자태사였고 방교(房喬)가 태자태부(太子太傅)였지만, 〈태종기〉와 〈재상표〉에 모두 기술되지 않은 것은 재상의 관직에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체제상 기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관지(百官志)〉에는 ‘그 뒤에 이적이 태자첨사 동중서문하삼품을 시중(侍中)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서술하였다. 그런데, 동삼품(同三品)이라는 명사는 대개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장손무기를 거론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장손무기전〉에서 ‘동중서문하삼품’이라고 한 것은 거의 잘못이다.[太子承乾廢 立晉王 以無忌爲太子太師 同中書門下三品 同三品自此始 按太宗紀 貞觀七年四月 立晉王治爲皇太子 特進蕭瑀爲太子太傅 李勣爲太子詹事同中書門下三品 宰相表亦止載蕭瑀李勣二人 其時無忌爲太子太師 房喬爲太子太傅 紀表皆不書者 非宰相之職 例不當載也 百官志 其後李勣以太子詹事同中書門下三品 爲同侍中中書令也 而同三品之名 蓋起於此 亦不擧無忌 然則無忌傳云同中書門下三品者 殆誤矣]” 〈권52, 《당서(唐書)》, 〈장손무기전(長孫無忌傳)〉〉
‧ “소옹(邵雍). 나이 76세였다. 정호(程顥)가 〈소옹묘지명(邵雍墓誌銘)〉을 찬술하여 이르기를, ‘희녕(熙寧) 정사(丁巳)(1077) 7월에 소옹 선생이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선생은 대중상부(大中祥符) 신해(辛亥)(1011)에 태어나서 여기에 이르렀으니, 67세일 것이다. 〈소옹전〉에서 76세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蘇翁 年七十六 程顥撰雍墓志云 熙寧丁巳孟秋 堯夫先生疾終於家 先生生於祥符辛亥 至是蓋六十七矣 傳云七十六 誤]” 〈권81, 《송사(宋史)》, 〈도학전(道學傳)〉〉
‧ “〈지원(至元)〉 21년 윤5월 법리자왕(法里刺王)을 군왕(郡王)으로 삼고 호부(虎符)를 차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제왕표(諸王表)〉에 ‘겁리알군왕(怯里歹郡王)이 지원 11년 인(印)을 하사받았다.’고 하였으니, 여기의 법(法)자는 겁(怯)자의 잘못인 듯하다. 〈제왕표〉에서는 11년이라고 하였지만 〈세조기(世祖紀)〉에서는 21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제왕표〉에는 이(二)자가 빠진 듯하다.[二十一年閏五月 封法里刺王爲郡王 佩虎符 按諸王表 怯里郡王至元十一年賜印 此法字疑怯字之訛也 表云十一年 而紀書於二十一年 蓋表脫二字] 〈권82, 《원사(元史)》, 〈세조기(世祖紀)〉〉
‧ “태조(太祖) 13년, 황제가 합지길차라(哈只吉箚刺)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치자, 고려왕(이름이 궐)이 소와 술을 받들고 나와 왕사(王師)를 맞이하였다. 살펴보건대, 〈태조기(太祖紀)〉에는 ‘고려왕 철이 항복하니, 세공(歲貢)과 방물(方物)을 요구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사》를 살펴보면 태조 13년에 왕이 되었다. 철이 즉위한 5년이나 〈고려전〉에 그 이름 빠져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太祖十三年 帝遣哈只吉箚刺等領兵征之 高麗王(名闕)奉牛酒出迎王師 案太祖紀稱高麗王降 請歲功方物 考朝鮮史 太祖十三年爲王卽位之五年 傳乃闕其名 何邪]” 〈권100, 《원사(元史)》, 〈高麗傳〉〉
(2) 색인어:전대흔(錢大昕),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오파(吳派), 고증학(考證學)(考據學), 사학(史學), 오중칠자(吳中七子)(江南七子), 유종(儒宗)
(3) 참고문헌
‧ 嘉定錢大昕全集(錢大昕, 江蘇古籍出版社)
‧ 嘉定錢大昕全集(錢大昕, 鳳凰出版社)
‧ 二十二史考異(錢大昕, 上海古籍出版社)
‧ 二十二史攷異(錢大昕, 商務印書館)
‧ 二十二史考異(錢大昕, 樂天出版社)
‧ 淸代乾嘉歷史考證學硏究(羅炳良, 北京圖書館出版社)
‧ 〈錢大昕の考據學としての‘史學’について〉(濱口富士雄, 《東洋史硏究》 48-3, 1989)
‧ 〈錢大昕經史之學硏究〉(黃啓華, 香港大學碩士學位論文, 1991)
【이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