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남송 시기 육유(陸游)가 건도(乾道) 6년(1170) 산음(山陰)(現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을 출발, 부임지인 기주(夔州)(현 중경(重慶) 봉절(奉節) 일대)에 도착하기까지의 여행 일기이다. 이해 윤5월 18일부터 10월 27일까지 장강을 거슬러 촉(蜀), 즉 사천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기록했기 때문에 ‘입촉기’라 명명하였다.
2. 저자
(1) 성명:육유(陸游)(1125~1210)
(2) 자(字)·별호(別號):자(字) 무관(務觀), 호(號) 방옹(放翁).
(3) 출생지역:월주(越州) 산음(山陰)(현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4) 주요활동과 생애
육유는 조부가 부재상까지 지냈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남송 고종 시기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했으나 재상이었던 진회(秦檜)의 방해로 낙방하였다. 진회는 육유가 자신의 손자보다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화파(主和派)였던 자신과 달리 금나라에 빼앗긴 중원의 회복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육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육유는 진회가 죽고 나서야 1158년 34세의 늦은 나이로 벼슬길에 올랐다. 주전파(主戰派)의 입장을 고수하였으므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주화파에 의해 배척되었고 지방 말직을 전전하며 평탄치 않은 관직생활을 하였다. 짧은 기간, 중앙 조정에서 일한 적이 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지방직으로 전출되었다. 말년 실록원동수찬겸동수국사(實錄院同修撰兼同修國史)가 되어 효종, 광종의 《양조실록(兩朝實錄)》을 편찬하였고, 국사의 편찬을 마친 후 보장각대제(寶章閣待制)로 승진했다가 79세의 나이로 퇴임하였다. 약 9,200수의 시를 남겨 중국 문학사상 가장 다작의 시인으로 꼽히며 일평생 중원의 회복을 염원하는 애국적 내용의 시를 많이 지었으므로 ‘애국시인’이라 불린다.
(5) 주요저작:시집으로 《검남시고(劍南詩稿)》, 문집으로 《위남문집(渭南文集)》이 있으며 오대(五代) 시기 남당(南唐) 왕조의 사서(史書)인 《남당서(南唐書)》, 필기인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가 있다.
3. 서지사항
육유는 건도 5년(1169) 12월 6일, 기주(夔州) 통판에 임명된다. 병 때문에 이듬해인 건도 6년(1170) 윤5월 18일에서야 출발하여 10월 27일 기주에 도착하였다. 약 5개월간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 《입촉기》이다.
《입촉기》는 처음에 단행본으로 유통되지 않았다. 육유는 따로 유통될 경우 실전될 것을 우려하여 《입촉기》를 문집의 뒷부분에 함께 수록할 것을 아들에게 당부하였다. 아들 육자휼(陸子遹)은 육유가 세상을 뜬 10년 후 가정(嘉定) 13년(1220) 《위남문집》 50권을 간행하였고 권43에서 권48까지 《입촉기》를 수록하였다. 《입촉기》는 명대부터 단행본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으며, 《위남문집》에 수록된 6권을 4권으로 나눈 판본도 출현하여 4권본과 6권본의 형태로 유통되었다. 두 판본은 내용상 동일하며 권수의 구분이 다를 뿐이다. 문연각본(文淵閣本) 《사고전서》에 수록된 것이 4권본이며(《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의 《입촉기》 제요에는 6권본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실제 수록된 것은 4권본이다.), 현대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판본은 6권본이다. 각 권의 일정은 다음과 같다.
권1:건도 6년 윤5월 18일 산음에서 6월 29일 과주(瓜洲)까지
권2:7월 1일 과주에서 7월 16일 태평주(太平州)까지
권3:7월 17일 태평주에서 8월 7일 강주(江州)까지
권4:8월 8일 강주에서 8월 26일 악주(鄂州)까지
권5:8월 27일 악주에서 10월 5일 의도현(宜都縣)까지
권6:10월 6일 의도현에서 10월 27일 기주(夔州)까지
4. 내용
《입촉기》의 여행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육유의 고향인 산음(山陰)은 장강의 경유지가 아니므로 먼저 산음에서 장강이 경유하는 진강(鎭江)까지 운하로 이동한 후, 진강에서 장강을 거슬러 기주까지 가는 여정이다. 장강을 따라 건강부(建康府)(현 남경(南京)), 태평주(太平州)(현 안휘성 당도(當塗)), 무호(蕪湖), 지주(池州)(현 귀지(貴池)), 강주(江州)(현 강서성 구강(九江)), 황주(黃州), 악주(鄂州)(현 호북성 무한(武漢)), 악주(岳州)(현 호남성 악양(岳陽)), 강릉부(江陵府)(현 호북성 사시(沙市)), 이릉(夷陵)(현 호북성 의창(宜昌)), 자귀(秭歸)를 거쳐 기주(夔州)에 도착하였다. 산음에서 진강까지 운하를 따라 간 길은 익숙한 여정이라 총 6권 중 한 권의 분량이다. 진강부터 장강을 따라 가는 여정은 육유 생애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책으로만 접했던 낯선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자 육유는 그곳의 역사, 지리, 문학적 지식을 대조하고 검증해나갔다. 따라서 《입촉기》는 풍경의 묘사도 많지만 역사와 지리, 풍속에 대한 고증이 충실하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고적지를 고증하는데 특히 치중하였다.……다른 사람의 여행기가 그저 풍경에 정신이 팔려서 기록이 엉성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考訂古跡 尤所留意……非他家行記徒流連風景 記載瑣屑者比也]”(《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입촉기제요(入蜀記提要)〉)
육유의 《입촉기》는 장강을 거슬러 촉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이고 범성대는 장강을 타고 촉 땅에서 강소성의 소주까지 내려온 여정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으며, 육유가 1살 연장자이다. 육유가 1170년에 장강을 거슬러 촉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약 7년 후에 범성대가 장강을 따라 촉에서 나와 강소성까지 내려왔다. 두 사람은 심지어 육유가 촉으로 가던 중 만나기까지 하였는데 당시 범성대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이었다.(《입촉기》권1 6월28일 기록) 진강(鎭江)부터 기주(夔州)까지가 두 사람의 여정이 겹치는 구간이다.
5. 가치와 영향
《입촉기》의 가장 큰 영향은 ‘일기체 여행기’라는 문체적 측면이다. 중국에서 ‘일기’는 오랫동안 개인의 생활이 아닌 제왕이나 조정의 대사를 기록한 역사 영역의 글이었다. 송대에 이르러 ‘나’의 경험을 기록한 일기가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북송 시기, 구양수(歐陽修)의 《우역지(于役志)》, 황정견(黃庭堅)의 《의주을유가승(宜州乙酉家乘)》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일기는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먹었는지 등을 간단히 기록한 일지 정도였다. 남송에 이르러 육유의 《입촉기》가 나오면서 일기는 확실한 문체적 특징을 갖게 된다.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여 개인의 경험과 느낌을 곡진하게 기록하게 된 것이다.
여행의 경험은 ‘일기’가 아닌 한편의 ‘유기(游記)’로 기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단편의 유기문은 글의 구성방식에서 일정정도의 ‘틀’을 갖는다. 전반부에는 해당 장소의 내력을 쓰고, 중반부에서는 경물의 묘사나 유람의 과정, 후반부에서는 개인의 심정이나 의견을 전개하면서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짜임새를 갖는다. 하지만 매일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순간마다 의외의 상황이 전개되는 여행의 과정은 단편적이고 구조적 완결성을 가질 필요가 없는 일기라는 문체 속에서 더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다. 육유는 5개월간 장강 여행의 시간과 과정을 온전하게 담아내기 위해 일기체를 선택했을 것이다.
《입촉기》 그리고 범성대의 《오선록》 이후, 여행과 사행 등의 경험을 일기체로 기록하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입촉기》와 《오선록》이 일기체 여행기의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후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서홍조(徐弘祖)(1586~1641)의 《서하객유기(徐霞客游記)》와 같은 역작이 출현하게 된다.
조선 문인들도 《입촉기》를 애독하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성경(盛京)(현 요녕성 심양(瀋陽))의 상점에서 중국인과 필담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촉(蜀)으로 들어가는 길의 험난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입촉기》를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박지원은 “《입촉기》를 읽을 때면 흥겨워 너풀너풀 춤을 추고 싶을 정도였다.”고 했다.(《열하일기》 〈성경잡지(盛京雜識) 속재필담(粟齋筆談)〉)
조선 후기 이하곤(李夏坤)(1677~1724)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 장인 송상기(宋相琦)를 방문하러 가면서 《남행기(南行記)》를 지었다. 그는 서문에서 《입촉기》를 “천하의 진정한 글[天下之眞文]”이라 칭송하며 이를 본받고자 했다고 밝혔다. 홍석주(洪奭周)(1774~1842)는 1831년 7월에 북경으로 출발하여 12월에 돌아오기까지의 기록을 《북행록(北行錄)》으로 엮었으며 마지막의 발문에서 자신의 글이 《입촉기》보다 부족하다고 언급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7월 14일〉 저녁, 날씨가 맑아 남쪽 창을 열고 고숙계(姑孰溪)와 산을 바라보았다. 시냇물 속 물고기가 아주 많았다. 때로 수면을 뚫고 튀어 오르는데 석양이 비추니 은빛 칼처럼 반짝인다. 도처에 낚시를 드리우고 그물을 당기는 자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생선 가격이 매우 저렴하여 하인들이 날마다 실컷 먹었다. 현지 사람들은 이 시냇물이 비옥해서 물고기가 살기에 적당하다고 한다. 마셔보니 물맛이 과연 달다. 설마 물이 비옥해서 물고기가 많을까? 시냇물 동남쪽으로 여러 봉우리들이 화장한 여인의 눈썹처럼 길게 이어져 있는데 아마 청산(靑山)인가보다.[十四日 晚晴 開南窗觀溪山 溪中絶多 魚時裂水面躍出 斜日映之 有如銀刀 垂釣挽罟者彌望 以故價甚賤 僮使輩日皆饜飫 土人云此溪水肥宜魚 及飲之 水味果甘 豈信以肥故多魚耶 溪東南數峯如黛 蓋青山也]”
‧ “〈10월 21일〉 백운정(白雲亭)은 천하에 가장 그윽하고도 기이한 절경이다. 여러 겹들로 둘러싸인 산들이 사이사이 보이고 고목이 무성한데 종종 2, 3백년 된 것들도 있다. 난간 바깥으로 두 개의 폭포가 산골짜기로 쏟아져 내려 마치 진주가 떨어지고 구슬이 흩어지는 것 같다. 그 냉기가 뼛속까지 느껴진다. 그 아래가 바로 자계(慈溪)인데 흘러내려 가서 장강과 만나게 된다. 내가 오(吳) 땅에서 초(楚) 땅에 들어오기까지 5천여 리를 달려와 15개 주를 지나왔는데 이곳 백운정만큼 아름다운 정자는 없었다. 그 위치도 현청 청사의 바로 뒤쪽이다. 파동(巴東)에서는 일이 별로 없어서 현령을 맡은 사람이 정자에서 먹고 자면서 한도 끝도 없이 즐기며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현령의 공백이 걸핏하면 2, 3년씩 되고 보결하러 오는 자도 없으니 어째서인가?[白雲亭則天下幽奇絶境 群山環擁 層出間見 古木森然 往往二三百年物 欄外雙瀑瀉石澗中 跳珠濺玉 冷入骨髓 其下是爲慈溪 奔流與江會 予自吳入楚 行五千餘里 過十五州 亭榭之勝 無如白雲者 而止在縣廨聽事之後 巴東了無一事 爲令者可以寢飯於亭中 其樂無涯 而闕令 動輒二三年無肯補者 何哉]” 〈권4〉
(2) 색인어:육유(陸游), 입촉기(入蜀記), 일기(日記), 장강(長江), 사천(四川), 유기(游記), 여행기(旅行記)
(3) 참고문헌
‧ 入蜀記(岩城秀夫 譯, 平凡社)
‧ 宋人長江游記:陸游《入蜀記》ㆍ范成大《吳船錄》今譯(陳新 譯註, 春風文藝出版社)
‧ South China in the twelfth century:A translation of Lu Yu´s travel diaries, July 3-Dec. 6, 1170(Chun-shu Chang and Joan Smythe, The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 장강을 거슬러오른 역사기행-육유, 《입촉기》(심경호, 《여행과 동아시아 고전문학》 수록, 고려대학교 출판부)
‧ 육유산문집(陸游散文集)(이기훈 역, 지만지)
‧ 〈《入蜀記》의 註釋과 飜譯1〉(이은진, 《중국학논총》 64집)
【안예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