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감도설(帝鑑圖說)》은 명(明)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이 어린 만력제(萬曆帝)의 훈육(訓育)을 위하여 중국 역대 제왕(帝王)들의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에 관한 고사(故事) 117건을 그림과 글로 엮은 책이다.
2. 저자
(1) 성명:장거정(張居正)(1525~1582)
(2) 자(字)·별호(別號):장거정의 자는 숙대(叔大), 호는 태악(太岳)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 출생지역:형주(荊州) 강릉(江陵)(현 중국 호북성(湖北省))
(4) 주요활동과 생애
장거정은 가정(嘉靖) 26년(1547)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가 되었다. 일찍부터 엄숭(嚴崇)과 서계(徐階)에게 능력을 인정받았고, 수보(首輔)에 오른 서계의 추천으로 훗날 융경제(隆慶帝)가 되는 유왕(裕王) 주재후(朱載垕)의 시강시독(侍講侍讀)이 되었다. 이 인연으로 융경 원년(1567)에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내각(內閣)의 차보(次補)로서 예부상서(禮部尙書)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가 되었다.
어린 만력제(萬曆帝)가 즉위하자, 장거정은 황귀비(皇貴妃) 이씨(李氏)와 환관 풍보(馮保)의 후원을 받고 수보가 되어 내각을 새롭게 구축하였다. 그는 당시 직면한 국가의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한 여러 개혁을 실행해나갔다. 그중 관리 개혁을 위한 고성법(考成法), 화폐와 조세 개혁을 위한 일조편법(一條鞭法)은 장거정의 중요한 공적으로 손꼽힌다. 한편으로는 《제감도설》을 비롯한 여러 제왕학 교재를 편찬하고, 경연(經筵)과 일강(日講)에 중점을 둔 일강의주(日講儀注)를 만들어 어린 만력제를 성군(聖君)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만력 10년(1582) 장거정은 생을 마쳤고,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하지만 10년 동안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으로 인해 반발심이 쌓였던 만력제가 장거정의 독재적인 개혁에 반발한 정적(政敵)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그의 시호를 박탈하고 유족들의 지위를 강등시켰다. 장거정의 관직과 시호는 천계(天啓) 2년(1622)에 복권되었다.
(5) 주요저작:문집으로 《장태악집(張太岳集)》이 있으며, 이는 청(淸) 광서(光緖) 연간에 《장문충공전집(張文忠公全集)》으로 표제(標題)를 바꾸고 45권으로 중간(重刊)되었다. 또 《모훈류편(謨訓類編)》, 《역경직해(易經直解)》, 《사서직해(四書直解)》, 《서경직해(書經直解)》, 《시경직해(詩經直解)》, 《정관정요직해(貞觀政要直解)》, 《통감직해(通鑑直解)》 등이 전한다.
3. 서지사항
《제감도설》은 만력 원년 경창본(經廠本)(1573)이 출판된 이래 19세기 말까지 반윤단본(潘允端本)(1573), 호현본(胡賢本)(1573), 곽정오본(郭庭梧本)(1575) 및 곽정오중각본(郭庭梧重刻本)(1575), 금렴본(金濂本)(1604), 천계2년본(天啓二年本)(1622), 등씨본(鄧氏本)(1662), 순충당본(純忠堂本)(1819) 및 순충당중각본(純忠堂重刻本)(1819), 그리고 석판으로 인쇄한 신보관본(申報館本)(1880) 등 다양한 판본으로 출간되었다.
이들 판본은 판식(版式)을 비롯한 세부적인 구성 요소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각 일화의 순서와 내용은 거의 변함이 없다. 다만 장거정의 사망을 기점으로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의 내용이 달라진다. 즉, 최초 경창본에 수록된 장거정의 진도소(進圖疏), 육수성(陸樹聲)의 서문, 왕희열(王希烈)의 발문은 반윤단본, 호현본, 곽정오본에 빠짐없이 등장하지만, 장거정 사후에 제작된 금렴본에서는 모두 사라지고 장거정에 관한 언급조차 없다. 이 글들은 장거정의 관직과 시호가 복권된 이후인 천계 2년본을 시작으로 다시 나타난다.
판본에 수록된 판화는 제작된 지역의 독특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금릉(金陵)의 호현본에는 흑백대비를 강조하는 남경(南京) 판화 양식이, 신안(新安)의 금렴본에는 정밀하고 부드러운 선각(線刻)이 두드러진 휘주(徽州) 판화 양식이 오롯이 반영되어 있다.
이외에도 경창본 계열의 판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판본으로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豐臣秀頼)가 제작한 히데요리본(秀頼本)(1606)이 전한다. 히데요리본은 세이쇼 쇼타이(西笑承兌)의 발문 유무에 따라 유발본(有跋本)과 무발본(無跋本), 그리고 원판(原版)을 해체하고 이전에 사용한 활자와 새롭게 제작한 활자를 사용한 이식활자본(異植活字本)의 총 3종으로 구분된다. 히데요리본 계열로는 야오죠(八尾助)가 제작한 판본(1627) 및 중각본(1650), 스하라야 모헤(須原茂兵衛)의 출판사 판본(1707), 키무라 우츠(木村蔚)가 판각한 목판본(1858) 등이 있다. 앞서 언급한 중국 상해(上海)의 신보관본(1880) 역시 히데요리본을 바탕으로 제작한 판본이다.
4. 내용
황제에게 국가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법칙을 쉽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요한 통치 철학을 증명하는 전대(前代)의 역사적 사례들을 ‘선가위법(善可爲法)’과 ‘악가위계(惡可爲戒)’의 기준 아래 두 유형으로 구분하여 편집하였다. 이는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 초년에 제작한 《소감록(昭鑑錄)》을 비롯하여 《영감록(永鑑錄)》(1373), 《역대군감(歷代君鑑)》(1453) 등 명나라 훈감류(訓鑑類) 서적의 구성을 따른 것이다.
상편(上篇)은 ‘성철방관(聖哲芳觀)’의 제목 아래 요(堯)임금부터 북송(北宋) 철종(哲宗)까지 81건의 일화로, 하편(下篇)은 ‘광우복철(狂愚覆轍)’의 제목 아래 하(夏)나라 태강(太康)부터 북송 휘종(徽宗)까지 36건의 일화로 이루어져 있다. 장거정의 말에 따르면, 선(善)은 양(陽)이며 길한 것이니 숫자 9를 곱하여 81로, 악(惡)은 음(陰)이며 흉한 것이니 숫자 6을 곱하여 36으로 정했다고 한다. 즉, 양수(陽數)와 음수(陰數)에 따라 각 편의 수를 정한 것이다.
한 가지 일화마다 먼저 그림을 제시하고 뒤에 전기(傳記)의 본문을 실었으며, 다시 이에 관한 직해(直解)를 만들어 본문 뒤에 부기(附記)하였다. 그리고 상편과 하편의 마지막 부분에는 각 편의 소결(小結)에 해당하는 술어(述語)를 첨부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제감도설》은 만력 원년에 제왕학 교재로 출간된 이래 명말 출판문화의 성행과 맞물려 교육, 기념, 증정, 상업 등 다양한 목적을 지닌 여러 판본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청(淸) 왕조가 세워지고 만주어로 번역된 판본은 만주족에게 중국을 통치하는 데 유용한 통찰력을 제공했음을 방증한다. 청(淸) 동치제(同治帝)와 광서제(光緖帝)의 스승인 옹동화(翁同龢)가 자신이 직접 주석을 단 순충당본을 두 황제의 교육에 활용한 일화는 청나라 말기까지 지도자에게 중요한 통치 원칙을 제공한 《제감도설》의 교육적 가치를 시사한다. 이 책은 출판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과 일본에서 중국의 이상적인 통치 철학과 정체성이 담긴 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선에 전해진 가장 이른 판본은 선조 7년(1574) 성절사(聖節使) 질정관(質正官)의 자격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온 조헌(趙憲)이 구입한 만력 원년 경창본으로 추정된다. 이후 집옥재(集玉齋)에 수장된 《제감도설》의 순충당본과 신보관본을 통해 고종 연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에 수용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재출판된 기록이나 왕실에서 소용된 사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영조 22년(1746) 영조가 세자의 훈육을 위해 어훈서(御訓書)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제감도설》을 언급한 기록이나, 박규수(朴珪壽)가 중국 문인 심병성(沈秉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감도설》을 ‘선행을 권면(勸勉)하는 서적’으로 밝힌 내용을 볼 때, 조선에서는 주로 감계(鑑戒)의 목적으로 《제감도설》을 인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일본에는 만력 원년의 경창본이 출판되자마자 전해졌고, 이 계열의 판본을 토대로 히데요리본이 제작되었다. 일본에서 《제감도설》은 중국의 유교적 도덕과 통치 원칙이 결합한 합법적 권위를 나타낸 서적으로 인식되었고, 막부의 쇼군들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도구로 활용하였다. 특히 이 책은 쇼군들의 전각 내부를 장식한 ‘제감도(帝鑑圖)’의 중요한 기초자료로 전용(轉用)되었다. 이처럼 《제감도설》은 메이지(明治) 시대까지 막부 지도자들의 정치적 정당성과 결부되어 후원을 받고 제작이 이루어진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높은 산은 우러러보아야 하니 마지막 삼태기의 공력을 잊지 말고 엎어진 수레가 앞에 있으니 뒤따르는 수레의 경계로 영원히 삼는다면, 자연히 생각하는 것마다 모두 순수하고 하는 일마다 모두 이치에 합당할 것이며 덕은 요순(堯舜)과 견줄 만하고 다스림은 당우(唐虞)와 같아질 것이다. [高山可仰 毋忘終簣之功 覆轍在前 永作後車之戒 則自然念念皆純 事事合理 德可媲於堯舜 治將埒於唐虞]” 《제감도설》 〈진도소(進圖疏)〉
• “《시경(詩經)》에는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네.’라 하였고, 《서경(書經)》에는 ‘치우침도 없이 하고 편당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이 꺼리어 멀리한 이후에 형벌을 내리고, 모든 사람이 기뻐한 이후에 상을 내려야 한다. 물을 휘저어 혼탁하게 하지 말고, 맑은 것을 더 맑게 하지 말고, 어두운 것을 더 어둡게 하지 말고, 드러난 일을 더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비록 면류(冕旒)로 눈을 가리고 있으나 형체가 드러나지 않은 데서 보아야 하고, 비록 주광(黈纊)으로 귀를 막고 있으나 소리 없는 데서 들어야 한다. [詩云 不識不知 書云 無偏無黨 衆棄而後加刑 衆悅而後行賞 勿渾渾而濁 勿皎皎而淸 勿汶汶而闇 勿察察而明 雖冕旒蔽目 而視於無形 雖黈纊塞耳 耳聽於無聲]” 《제감도설》 상편(上編) 〈납잠사백(納箴賜帛)〉
• “무릇 하늘과 땅이 재물을 만들어내는데 일정한 양이 있다. 관직에 있는 자가 많이 차지하면 백성들은 적게 가지게 된다. 자고로 간사한 신하란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왕왕 재물은 끝없이 생기는 것이라 말하지만 기실 이는 간교한 방법을 지어내어 백성의 재물을 취하되 마구 징수하며 포악하게 거두어들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베틀[杼柚]은 공허해지고 여염집은 쓸쓸해지니, 백성이 궁한 끝에 도적이 일어나서 마치 기와가 부서지고 흙이 무너지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니, 비록 훌륭한 자가 있더라도 이런 경우 어쩔 수가 없다. [夫天地生財 只有此數 在官者多 則在民者寡矣 自古姦臣 要迎合上意 往往倡爲生財之說 其實只是設法巧取民財 橫征暴斂 由是杼柚空虛 閭閻蕭索 以至民窮盜起 瓦解土崩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 《제감도설》 하편(下編) 〈염재치비(斂財侈費)〉
(2) 색인어: 장거정(張居正), 장태악(張太岳), 장문충공(張文忠公), 만력제(萬曆帝), 제감도설(帝鑑圖說), 선가위법(善可爲法), 악가위계(惡可爲戒), 성철방관(聖哲芳觀), 광우복철(狂愚覆轍)
(3) 참고문헌
• 《明史紀事本末》(谷應太 編, 三民書局, 1963)
• 《萬曆起居注》(北京大學出版社, 1988)
• 《帝鑑圖說評注》(張居正 原著, 陳生璽·賈乃謙 整理, 中州古籍出版社, 1996)
• 〈張居正與《歷代帝鑑圖說》〉(韋慶遠, 《歷史》, 1997)
• 〈《帝鉴图说》及其版本丛谈〉(刘蔷, 《北方论丛》, 2000)
• 〈晩明規諫版畫《帝鑑圖說》之硏究〉(林麗江, 《故宮學術季刊》, 2015)
• 〈〈館藏資料紹介〉 秀頼版 「帝鑑圖說」(慶長11年刊古活字本6冊)〉(森上修, 《香散見草: 近畿大学中央図書館報》, 1985)
• 〈帝鑑圖說 異植字版小考〉(五十嵐金三郞, 《參考書誌硏究》, 1986)
• 〈探幽と名古屋城寬永度造營御殿 中〉(河野元昭, 《美術史論叢》, 1988)
• 〈宮楽図屏風にみる帝鑑図説の転成:近世初頭絵画における明代版画と画譜·絵手本〉(小林宏光, 《國華》, 1990)
• 〈〈本館所藏貴重書紹介〉 秀頼版 「帝鑑圖說」 慶長11年(1606)年〉(伊豆田幸司, 《香散見草:中央図書館報》, 2004)
• 〈〈翻刻〉奈良県立図書情報館藏 帝鑑圖說 (寬永四年刊本) 卷一~卷四〉(小助川元太, 《吳工業高等專門学校硏究報告》, 2008)
• 〈From Textbook to Testimonial: The Emperor’s Mirror, An Illustrated Discussion (Di jian tu shuo/ Teikan zusetsu) in China and Japan〉(Murray, Julia K., 《Ars Orientalis》, 2001)
【김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