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영호덕분(令狐德棻)은 당대(唐代) 관리이자 역사학자이다. 본서는 모두 50권(卷)이며, 본기(本紀) 8권(卷)과 열전(列傳) 42권(卷)으로 구성된 기전체(紀傳體) 사서이다. 이 책은 서위(西魏)와 북주(北周)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서이다.
2. 저자
(1) 성명:영호덕분(令狐德棻)(583-666)
(2) 자(字):계형(季馨)
(3) 출생지역:의주(宜州) 화원현(华原縣)(현재의 섬서성(陝西省) 동천시(銅川市) 요주구(耀州區))
(4) 주요활동과 생애
영호덕분(令狐德棻)(583-666):의주(宜州) 화원현(华原縣)(현재의 섬서성(陝西省) 동천시(銅川市) 요주구(耀州區)) 사람으로 선조들은 돈황군(敦煌郡)에 거주하던 하서(河西) 호족(豪族)이었다. 당 고조(唐高祖)가 입관(入關)한 후 대승상부기실(大丞相府記室)로 임명하였고, 예부시랑(禮部侍郞) 겸수국사(兼修國史), 비서소감(祕書少監),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국자제주(國子祭酒) 등을 역임하였다. 무덕(武德) 5년(622) 《예문유취(藝文類聚)》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당시 난리로 서적(書籍)이 다수 산일(散佚)되자 책을 구매해 베껴 비치하고 전 왕조의 사서(史書)를 편찬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정관(貞觀) 3년(629) 잠문본(岑文本) 등과 함께 10년 동안 북주(北周)의 역사를 편찬하여 《주서(周書)》를 완성하였다. 정관(貞觀) 11년(637) 《씨족지(氏族志)》를 편찬하였고, 또 《진서(晉書)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고종(高宗) 때 율령(律令)을 제정하는데 참여하였고 국사(國史)와 《오대사지(五代史志)》,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찬을 감수하였다.
(5) 주요저작:《북제서(北齊書)》, 《수서(隋書)》등을 편찬하였고 《씨족지(氏族志)》, 《오대사지(五代史志)》,《고종실록(高宗實錄)》,《예문유취(藝文類聚)》 편찬에 참여하였다.
3. 서지사항
《북주서(北周書)》라고도 하며, 북주(北周) 역사를 다룬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이다. 북위(北魏) 분열 후 서위(西魏)와 북주(北周)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모두 50권(卷)이며, 본기(本紀) 8권(卷)과 열전(列傳) 42권(卷)으로 구성되었다. 수(隋) 우홍(牛弘)의 《주사(周史)》를 저본으로 삼아 자료를 널리 수집하지 않아 《북제서(北齊書)》보다 못하였다. 북송(北宋) 때 산일(散佚)되어 후대 사람들이 《북사(北史)》 등을 근거로 보충하였다.
4. 내용
영호덕분(令狐德棻)(583-666)이 622년(무덕(武德) 5년) 비서승(祕書丞)에 임명되었을 때 양(梁), 진(陳), 남제(南齊),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 다섯 왕조의 역사책을 편찬할 것을 건의하였다. 당 고조(高祖)는 영호덕분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나 몇 년 후에도 완성하지 못했다. 태종(太宗)은 다시 다섯 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라고 명령하니 북주(北周)의 사서는 영호덕분과 비서랑(祕書郞) 잠문본(岑文本),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최인사(崔仁師) 등이 편찬을 맡았다. 636년(貞觀 10년) 완성되었다.
《주서(周書)》는 북위(北魏) 분열 후 서위(西魏)와 북주(北周)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고환(高歡)은 북위(北魏) 효장제(孝莊帝)를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주조(尒朱兆), 이주세융(尒朱世隆), 이주중원(尒朱仲遠) 등을 제거하고 북위(北魏)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고환(高歡)의 전횡에 저항한 북위(北魏) 효무제(孝武帝)가 장안(長安)에 웅거한 우문태(宇文泰)에게 도망가자 북위(北魏)는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었다. 효무제(孝武帝)를 받아들인 우문태(宇文泰)는 실권을 장악하고 황제로 군림했지만 황제(皇帝)로 즉위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서(周書)》의 권1은 우문태(宇文泰) 시기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황제(皇帝)는 아니지만 아들인 우문각(宇文覺)이 황제(皇帝)로 즉위한 후 황제(皇帝)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황제(皇帝)로 예우하여 ‘본기(本紀)’라고 칭하였다. 우문태가 활동한 시기는 서위(西魏)이므로 《주서(周書)》는 서위(西魏)와 북주(北周)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모두 50권(卷)이며, 기(紀) 8권과 열전(列傳) 42권으로 구성되었다. 수(隋) 우홍(牛弘)의 《주사(周史)》를 저본으로 삼아 자료를 널리 수집하지 않아 《북제서(北齊書)》보다 못하였다. 북송(北宋) 때 책이 흩어져서 후대 사람들이 《북사(北史)》등을 근거로 보충하였다. 현재의 판본은 매 권의 본기(本紀)와 열전에 사신론(史臣論)이 있지만, 권18, 권24, 권26, 권31, 권32에는 없다. 권31과 권32는 《북사(北史)》를 이용하여 보충하였다. 권24와 권26의 두 권은 고준(高峻)의 《소사(小史)》로 보충하였다. 권24의 탈루가 가장 많다.
《주서(周書)》는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라고 하지만 분야사를 다룬 지(志)가 없다. 당초(唐初)에 《수서(隋書)》를 편찬할 때 북주(北周)시대의 제도를 다룬 지(志)를 《수서(隋書)》에 포함시켰는데, 이를 오대사지(五代史志)라고 한다. 그런데 오대사지(五代史志)에 북주(北周)시대의 제도는 다른 왕조에 비해 간략하게 서술되었다.
북주의 조령문서(詔令文書)는 대개 선진(先秦)의 문체를 모방하였는데, 《주서(周書)》는 이를 따라 기록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주서(周書)》는 서위(西魏)와 북주(北周)의 역사와 제도를 연구하는 기본적인 사료이다. 당대(唐代) 역사학자 유지기(劉知幾)는 주서(周書) 중 기록과 문장은 화려하고 사실이 아닌 것이 있다고 비평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2) 색인어:영호덕분(令狐德棻), 주서(周書)
(3) 참고문헌
• 周書標點本(中華書局)
• 北史標點本(中華書局)
• 資治通鑑標點本(中華書局)
• 趙翼, 卄二史箚記(王樹民 校證, 卄二史箚記校證, 中華書局,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