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본서는 646년(당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20년) 당시 황제였던 태종의 명에 의해 편찬이 시작되어, 648년 무렵에 완성되었다. 위, 촉, 오 삼국을 통일한 진(晉)왕조의 역사를 다룬 정사(正史)로 본서의 말미에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의 기록도 부기되어 있다. 본서의 편찬 책임자는 방현령(房玄齡)으로 그의 감수 하에 다수의 문인들이 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즉 이 책은 특정 개인에 의한 저술이 아닌 복수의 학자들에 의한 공동작업의 결과물이다. 진과 오호십육국의 역사를 서술한 사서들 가운데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것은 본서가 유일하다. 따라서 본서는 진과 오호십육국시대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사서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2. 저자
(1) 성명:
(2) 자(字)·별호(別號):
(3) 출생지역:
(4) 주요활동과 생애:
(5) 주요저작:
3. 서지사항
본서는 중국의 역대 통일왕조 가운데 하나인 진왕조(265-420) 일대를 다룬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이다. 본서 이전에도 진왕조의 역사를 다룬 사서들은 이미 서진(西晉)시대부터 개인에 의해 일부가 편찬되었다. 당대(唐代)에 본서가 편찬될 무렵 진왕조의 역사를 다룬 사서들은 무려 18종이 전해지고 있었고, 본서와 동일한 명칭의 서적도 다수 존재했다. 그 최초는 동진(東晉)시대의 일로 왕은(王隱), 우예(虞預) 등이 이미 진서를 편찬했다. 다만 그 서술범위는 서진에서 동진의 초기에 한하였다. 한편 남조(南朝) 송(宋)에서는 하법성(何法盛)이 진중흥서(晉中興書)를 편찬했는데 그 시기는 동진에 한하였다. 서진과 동진의 사적을 모두 포괄한 것은 남조 제(齊)의 은사(隱士)인 장영서(臧榮緖)의 진서가 최초다. 장영서의 진서는 총 110권으로 당대에 본서가 편찬될 때까지도 남아있었다.
그런데 당 태종은 당시까지 남아있던 여러 진서들의 체제, 내용, 서술방식 등이 충분하지 못하다 여겨 646년(정관 20년)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기존 문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학사들을 동원해 본서를 다시 편찬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2년 만인 648년경 적어도 태종이 사망하기 전에는 본서가 완성되어 세상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본서가 완성될 수 있었던 이유로는 기존에 편찬된 진서들을 기본 자료로 활용 한 점, 그리고 이전의 정사가 개인에 의해 저술되었던 것과 달리 본서는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본서의 편찬에 참여한 이들은 편찬 책임자인 방현령을 필두로 그 이름이 확인되는 이만 21명에 달한다.
본서는 장영서의 진서를 저본으로 했고, 이밖에 당시까지 남아있던 다른 진서 및 진대(晉代) 인물들의 문집에서 내용들을 추출하였다. 이후 본서는 이전에 나와 있던 동명의 진서와 구분하기 위해 ‘신진서(新晉書)’, 또는 ‘어찬진서(御撰晉書)’로 불리기도 했다.
본서는 전 130권으로 이 가운데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재기(載記)가 30권이다. 당나라 때의 사가(史家)인 유지기(劉知機)에 따르면 본서는 이외에도 서례(敍例)와 목록(目錄) 각 1권을 포함하여 총 132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는 판본에는 서례와 목록은 따로 전하지 않는다.
현전하는 진서의 판본들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송나라 때의 판본이다. 가장 널리 활용되는 판본은 송대의 판본들을 종합한 백납본(百衲本)이다. 백납본은 중국의 해녕(海寧) 장씨(蔣氏) 연분초당(衍芬艸堂)에서 소장한 송대의 판본을 저본으로 하였는데, 연분초당 소장본의 경우 재기 30권이 빠져있다. 그리하여 강소성국학도서관(江蘇省國學圖書館) 소장 송본(宋本)으로 이를 보충하여 백납본이 나오게 되었다.
4. 내용
본서의 제기 10권은 각각 서진 부분이 5권, 동진 부분이 5권으로 되어 있다. 이 제기는 곧 이전시기 정사의 본기(本紀)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전의 정사에서 본기는 왕조의 창업자부터 시작하는 것이 통례이나, 본서의 제기 제1권은 진왕조의 창업자인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아닌 그의 조부 사마의(司馬懿)에 대한 것이다. 즉 본서의 제기는 창업자가 아닌 창업자의 조부에서부터 시작한다. 뿐만아니라 이에 이어서 무제의 백부인 사마사(司馬師), 무제의 부친인 사마소(司馬昭)의 사적도 각각 경제기(景帝紀), 문제기(文帝紀)라는 제명 하에 기술되어 있다.
한편 이 가운데 사마의의 사적인 선제기(宣帝紀), 사마염의 사적인 무제기(武帝紀)의 말미에 첨부된 사론(史論)은 당 태종이 직접 지었다. 본서 내의 사론이 ‘사신왈(史臣曰)’이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것과 달리 선제기, 무제기의 사론은 ‘제왈(制曰)’로 시작하는데, 이는 ‘제(制)’가 황제의 의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지는 천문(天文), 지리(地理), 율력(律曆), 예(禮), 악(樂), 직관(職官), 여복(輿服), 식화(食貨), 오행(五行), 형법(刑法)의 10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천문, 율력, 오행의 세 지는 당나라 때의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역법가인 이순풍(李淳風)의 저술로 이미 성립 당시부터 진서의 여러 지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들 지의 서술 범위는 진왕조에 한정하지 않고 위로는 후한말부터 동진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열전에도 당 태종의 사론이 첨부되어 있는데 권54 육기(陸機), 육운전(陸雲傳)의 사론 1편, 권80 왕희지전(王羲之傳)의 사론1 편이 그것이다.
재기는 다른 정사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진서만의 독특한 체제이다. 여기에는 서진을 멸망시킨 흉노족 출신의 전조(前趙)를 비롯하여 오호(五胡)민족 출신 왕조들의 황제 및 그와 관련된 주요 인물들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즉 재기는 오호십육국시대 중국 내지에 왕조를 세웠던 이민족집단들에 대한 기록이다. 30권으로 구성된 재기 가운데 전조가 3권, 후조(後趙), 전연(前燕), 전진(前秦), 후진(後秦)이 각 4권, 성한(成漢), 후연(後燕), 남연(南燕)이 각 2권, 남량(南涼), 북량(北涼), 후량(後涼), 하(夏)가 각 1권이고 서진(西秦)과 북연(北燕)은 합쳐서 1권으로 되어 있다. 한편 오호십육국시대의 국가들 가운데 한인(漢人)이 세운 전량(前涼)과 서량(西涼)은 재기가 아닌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5. 가치와 영향
본서가 출현한 이후, 당시까지 전하던 제가(諸家)들의 진서는 더 이상 읽히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본서를 제외한 여타의 진서들은 모두 망실되었다. 본서의 저본이 된 장영서의 진서조차 망실되어 오늘날에는 그 일문만이 전할 뿐이다. 또한 오호십육국에 대한 기록 역시 현존하는 문헌들 가운데서 본서의 재기가 가장 상세하고 내용적으로도 가장 풍부하다. 이러한 이유로 비록 본서가 진왕조가 멸망한 지 200여년 만에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료적 가치는 다른 시대의 정사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본서의 가치는 진시대의 역사연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본서의 십지 20권에는 진왕조의 제도 외에 후한, 삼국의 사적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삼국시대를 다룬 정사인 삼국지(三國志)에는 지가 없기 때문에 본서의 지는 삼국시대의 제도와 문물을 이해함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필독의 기초자료다.
한편 본서의 출현은 정사의 편찬방식에 있어서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의 정사는 특정 개인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반면 본서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이를 전담하는 조직이 꾸려지고 재상의 책임 하에 다수의 학사들이 참여하여 저마다 특화된 분야에 따라 집필을 분담하는 방식을 통해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방식은 당에 뒤이은 여러 왕조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어 정사 편찬방식의 주류가 되었다.
6. 참고사항
(1) 명언
(2) 색인어: 진서(晉書), 당태종(唐太宗), 방현령(房玄齡), 신진서(新晉書), 어찬(御撰), 재기(載記), 장영서(臧榮緖)
(3) 참고문헌
• 晉書 標點校勘本(中華書局)
• 晉書全譯(二十五史全譯, 漢語大詞典出版社)
【양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