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본서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서세창(徐世昌)이 지인(知人)이나 제자와 함께 황종희(黃宗羲) 전조망(全祖望)의 ≪송원학안(宋元學案)≫ ≪명유학안(明儒學案)≫을 계승하여 청대(淸代)를 대표하는 학자 들을 집대성하여 1938년에 출판한 열전체(列傳體)의 학술사서(學術史書)이다.
2. 저자
(1) 성명 : 서세창(徐世昌)(1855∼1939)
(2) 자(字)·별호(別號) : 자가 복오(卜五), 호가 국인(菊人)·동해(東海), 별호가 수죽촌인(水竹邨人)·도재(弢齋)
(3) 출생지역:하남성(河南城) 위휘부(衛輝府) 급현(汲縣)(현 중국 하남성 위휘시)
(4) 주요 활동과 생애
서세창은, 광서(光緖) 2년(1886) 진사가 된 뒤 한림원(翰林院)의 서길사(庶吉士)와 편수(編修)를 역임하고, 의형(義兄) 원세개(袁世凱)의 지지를 기반으로 상부우승(商部右丞)·병부시랑(兵部侍郎)·동삼성총독(東三省總督)·군기대신(軍機大臣) 등을 거쳐 부총리대신·참모총장의 요직에 올랐다. 민국 시기 원세개 대총통(大總統) 아래 정사당(政事堂)의 국무경(國務卿), 1916년과 1918년에는 대총통에 취임하였으나, 직예파(直隸派)의 압력으로 1922년 정계를 은퇴하였다. 1921년에는 파리대학에서 〈구전후지중국(毆戰後之中國)〉으로 명예박사학위를 얻었다. 그 뒤 천진(天津)에 은거하면서 ≪청유학안≫ 등을 편저하였다. 서화(書畫)에도 일가견이 있다.
(5) 주요 저작
편저로는 ≪청기보선철전(淸畿輔先哲傳)≫, ≪만청이시회(晩晴簃詩匯)≫, ≪안리유서(顔李遺書)≫, ≪도재술학(弢齋述學)≫, ≪귀운루집(歸雲樓集)≫, ≪퇴경당정서(退耕堂政書)≫, ≪퇴경당집(退耕堂集)≫, ≪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 ≪서수루장서목(書髓樓藏書目)≫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천진에 퇴거(退居)한 서세창이 1928년 문인 오정섭(吳廷燮), 조병장(曹秉章) 등과 발의하여 본격적으로 찬수작업에 들어갔다. 실제 작업은 대총통 시기에 모은 기초자료를 토대로 주로 북평(北平)에 있는 조병장의 집에서 이루어졌는데, 그는 서세창과 400여 통의 편지로 편찬과 관련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는 1938년 208권으로 완성되어 출판되었다. 2008년 중화서국에서 10권의 표점본(標點本), 2010년 인민출판사에서 10권의 간체본(簡體本)이 출판되었다.
4. 내용
본서는 정안자(正案者) 179명, 부안자(附案者) 922명이고, 말미에 제유학안(諸儒學案) 68명을 붙였으니, 모두 1169명으로 학안 가운데 가장 방대하다. 정안에 오른 인물은 출생 연도를 기준으로 삼아 손기봉(孫奇逢), 명말청초의 ‘삼유노(三遺老)’를 필두로 청말의 왕선겸(王先謙), 손이양(孫詒讓), 피석서(皮錫瑞) 등까지 포함되었다. 제유학안은 사승이나 교우 관계가 빈약한 학자를 지역별로 모은 것이다. 양식은 정사(正史)의 열전 형식이다. 먼저 정안의 입전(立傳) 이유를 간결하게 기술한 다음 그 인물의 전기(傳記)를 먼저 기술하고, 이어 전문저술과 문집(文集)의 중요 내용을 발췌하여 기술하였다. 그 다음에 부안자를 이어 붙이되 입전 이유를 제외하고 정안과 동일한 방식으로 서술하였다.
5. 가치와 영향
본서는 ≪송원학안≫과 ≪명유학안≫을 계승한 전통시대 마지막 학안체의 학술사서이다. 특히 청대의 유명한 학자를 거의 망라한 관계로 청대의 학술과 사상을 연구하는 기초적 자료로 평가된다. 다만, 청유의 저작을 융회관통하는 안목이 부족한 관계로 내용의 대표성과 체제에는 한계가 있다. 일찍이 전목(錢穆)이 별도로 ≪청유학안≫의 편찬을 시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청대 학자들의 저술이 많이 남아 있는 관계로 본서의 의의가 매우 크지 않다. 그렇지만 장래에 본서의 가치와 영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6. 참고사항
(1) 명언
• “고염무(顧炎武)의 학술은 실사구시(實事求是)하여 한송(漢宋)의 문호를 나누지 않았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규모가 광대하고 우뚝하여 청(淸) 일대(一代)의 학술 연원이 나오는 바였다. 뒤에 〈그를〉 계승한 학자는 그 단서를 따라 인신(引伸)하여 각각 전문가가 되어, 삼가 세도(世道) 인심(人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학술과 정치를 논한 것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그의 학술이 위대한 까닭이다.[亭林之學, 實事求是, 不分漢宋門戶, 經世致用, 規模閎峻, 爲有淸一代學術淵源所自出. 後之承學者, 因其端以引伸之, 各成專家, 而兢兢以世道人心爲本, 論學論治莫能外焉. 此其學之所以大也.]” 〈권6 정림학안(亭林學案)〉
• “대진(戴震)은 강영(江永)의 고제(高弟)이다. 강영은 삼례(三禮) 및 천문(天文) 산법(算法)과 훈고(訓詁) 음운(音韻)의 학술에 정밀하였는데, 대진은 사설(師說)을 미루어 밝혀 세밀하고 미묘한 경지로 깊이 나아갔다. 다만, 강영은 주자(朱子)〈紫陽〉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대진은 꽤나 많이 논란하였다. 예전에 정주(程朱)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불학(佛學)이 섞였다는 이유로 육구연(陸九淵)과 왕양명(王陽明)을 배척하였는데, 대진은 바로 불학이 섞였다는 이유로 정자와 주자를 기롱하였다. 인(仁)을 득견(得見)하고 지(智)를 터득하였으니, 요컨대 또한 스스로 일가의 학설을 이루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를 비방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니, 이는 얼마나 학술의 좁음을 보여주는 것인가.[東原爲愼修高弟. 愼修精三禮及天文算法訓詁音韻之學, 東原推闡師說, 深造密徼. 惟愼修不菲薄紫陽, 東原則頗多論難. 自來治程朱之學者, 以雜佛學, 斥陸王, 東原乃以雜佛學, 議程朱. 見仁見智, 要亦自成一家言, 世或謗之, 或諱之, 是何視學術之隘也.]” 〈권79 동원학안(東原學案)〉
• 공자진(龔自珍)의 학술은 금단(金壇)의 단옥재(段玉裁)에게서 나왔고, 뒤에 무진(武進)의 유봉록(劉逢祿)을 종유하여 ≪공양춘추(公羊春秋)≫를 배워 드디어 전한(前漢)의 학술에 크게 밝았다. 그가 문자에서 터득한 것을 미루어 치학(治學)의 본원을 연구하여 주(周) 이전의 가법(家法)을 확실히 알았다. 동치(同治) 광서(光緖) 연간 학자들이 기꺼이 공양학에 흡족하여 미언대의(微言大義)에 가탁하여 천착부회(穿鑿附會)하여 점차 방자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말류(末流)의 잘못이지 공자진을 이러쿵저러쿵할 수가 없다.[定盦學出金壇段氏, 後從武進劉氏, 受公羊春秋, 遂大明西京之學. 其見於文字者, 推究治學本原, 洞識周以前家法. 同光學者, 喜洽公羊, 託於微言大義, 穿鑿附會, 浸致恣肆. 此則末流之失, 未可以議前人也.]” 〈권158 정암학안(定盦學案)〉
(2) 색인어:서세창(徐世昌), 청유학안(淸儒學案), 총통(總統), 조병장(曹秉章), 원세개(袁世凱), 북양군벌(北洋軍閥), 청대학술사(淸代學術史)
(3) 참고문헌
• 중국근대의 지식인(梁啓超, 전인영 옮김, 혜안)
• 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梁啓超, 臺灣中華書局)
• 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錢穆, 臺灣商務印書館)
• 청유학기(淸儒學記)(張舜徽, 齊魯書社)
• 신편청유학안(新編淸儒學案)(楊向奎, 齊魯書社)
• ≪淸儒學案≫曹氏書札整理(李立民, 中國社會科學出版社)
【이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