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漢) 유흠(劉歆) 《칠략(七略)》의 뒤를 이어 남조(南朝) 제(齊)나라 왕검(王儉)이 《칠지(七志)》를 저술한 뒤 나온 도서목록 분류의 전문 저작으로 남조 양(梁)나라의 완효서(阮孝緒)가 지었다. 전대(前代) 목록학(目錄學)의 성과를 총결산하는 중국목록학의 중요 저작으로 꼽힌다. 원서는 이미 실전(失傳)되었지만 서문(序文)은 당대(唐代) 석도선(釋道宣)의 《광홍명집(廣弘明集)》 권3에 보존되어 있다.
2. 저자 / 편자
(1) 성명:阮孝緒(479-536)
(2) 字·別號:완효서의 자(字)는 사종(士宗). 사후 시호(諡號)는 문정처사(文貞處士).
(3) 출생지역:진류위씨(陳留尉氏)(現 하남(河南) 개봉(開封))
(4) 주요활동과 생애:
완효서(阮孝緒)는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목록학자이며 덕이 빼어난 처사였다. 그의 사적은 《양서(梁書)·처사전(處士傳)》에 실려 있는데,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 성격이 침착하고 조용했다고 한다. 13살에 오경(五經)에 통하고 스무 살이 되자 세속을 초탈한 원대한 뜻이 있었다. 마침내 따로 집을 하나 짓고 부모님께 문안 올리는 일 말고는 문밖을 나오지 않아 친구들이 거사(居士)라고 불렀다. 거처엔 침대 하나가 있을 뿐이고 대나무가 둘러져 있고, 그 속에서 독서를 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대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여러 번 벼슬에 초빙되었으나 세상이 험난하다고 여기고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 완윤지(阮胤之)가 백만 전의 재산을 주고자 하였으나 이도 받지 않았을 만큼 사람됨이 금전 앞에서나 나아가고 들어감에 있어서 고결하여 세속의 때가 묻지 않았다.
그의 고결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왕안(王晏)은 그의 사촌형이었는데 완효서는 그가 필히 크게 실패하리라 생각하고 그를 늘 피하고 만나지 않았다. 하루는 장조림을 먹었는데 아주 맛이 있어 어디서 난 것인지 물어보니 왕안의 집에서 왔다고 하였다. 완효서는 즉시 먹었던 고기를 다 토해 내고 남은 고기도 다 버렸다. 훗날 왕안이 모반에 연루되어 죽게 되었을 때 일가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으나 “한 패거리를 짓지도 않았는데 어찌 우리가 연좌되겠는가?” 하였는데, 결국 그 말대로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또 그의 효심을 전하는 《양서(梁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종산(鍾山)에서 경서(經書) 강연을 듣고 있었는데 모친 왕(王)씨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 형들이 효서를 부르려고 하니 어머니가 “우리 아들은 천성이 신통해서 알아서 올거네!”라고 하였는데, 정말로 종산에 있던 효서가 갑자기 마음에 놀라는 바가 있어 급히 집으로 왔다. 모친의 병에는 신선한 인삼이 특효가 있다고 들은 완효서는 여러 날을 직접 종산을 뒤졌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사슴 한 마리가 앞으로 가는 것을 보고 뒤 따라 가다가 갑자기 사슴이 사라졌는데 거기서 인삼을 찾을 수 있었다. 모친이 이를 먹고 병이 나으니 사람들은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감탄하였다.
이렇게 정치가나 관료는 멀리 하였지만 장서가(藏書家)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장서가가 소장하고 있는 장서나 목록을 보고자 하였다. 양무제(梁武帝) 보통(普通)(520-527)년간에 완효서는 국가의 전적이나 개인 소장 전적들이 흩어지고 잃어버린 것들이 많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송제(宋齊) 이래의 도서를 널리 모아 《칠록(七錄)》을 저술하였다. 이는 이전의 목록학 성과를 총정리한 것으로 매우 중요한 저술이지만, 모두 산실되고 지금은 자서(自序)만 석도선(釋道宣)의 《광홍명집(廣弘明集)》에 전하고 있다.
(5) 주요저작:《양서(梁書)·처사전(處士傳)》에는 그의 저서가 《칠록(七錄)》과 《고은전(高隱傳)》 등 250권이라고 하나 《칠록》 서문 외에는 전하지 않는다.
3. 서지사항 특징
그의 생애는 남조(南朝) 제(齊)나라의 고조(高祖)부터 양(梁)나라 무제(武帝) 시기에 걸쳐 있으므로, 중국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의 한 가운데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살던 시기는 도서사업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더욱이 완효서가 11살 때 《칠지(七志)》의 저자 왕검(王儉)이 사망하였으며, 27살 때 유효표(劉孝標)의 《문덕전사부목록(文德殿四部目錄)》도 완성되었으므로, 이 시기에는 서한(西漢) 유흠(劉歆)의 《칠략(七略)》 이후 관찬 목록이 다 완비되어 있었으므로 완효서의 저술에는 매우 유리한 조건이 구비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칠록》의 편집은 523년부터 시작하였지만, 집필을 위한 자료수집과 집필계획 수립 등은 그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이 작업이 536년까지 이어졌으니 집필 기간이 거의 20여 년 동안이라고 할 수 있다. 집필이 끝나고 유흠의 《칠략》과 왕검의 《칠지》를 잇는 의미로 《칠록(七錄)》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완효서 본인은 《문덕전사부목록(文德殿四部目錄)》을 기초로 했다거나 고치고 보충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당대(唐代) 유지기(劉知幾)의 지적대로 《문덕전사부목록》을 기초로 했음이 분명하므로 이 점은 반드시 지적해야 할 문제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칠록》은 이미 실전되었으며 서문만 실려 있는 《광홍명집》은 《홍명집(弘明集)》과 합본하여 상해고적(上海古籍)출판사에서 원문 영인 형태로 출판되었다.
4. 내용
《칠록》은 내편과 외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다시 내편은 경전록(經典錄)·기전록(紀傳錄)·자병록(子兵錄)·문집록(文集錄)·술기록(術技錄) 등 5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편은 불법록(佛法錄)과 선도록(仙道錄) 등 2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새로운 항목을 신설하거나 독립시키고 있는 분류와 배열은 당시 도서 현황을 적절히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전의 중요한 목록 저작인 왕검(王儉)의 《칠지(七志)》와 비교하여 그 분류법에 있어 더욱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완효서(阮孝緒)는 자신의 서문에서 당시 이미 “천하의 남은 책과 비기(秘記)들을 거의 다 여기에 모았다.[天下之遺書秘記 庶幾盡於是]”고 자부하고 있으니, 그 수집 분량에 있어서도 독창적인 공을 세웠다고 할 것이다. 또 그는 관찬 목록 보다는 개인 장서가들에게 더욱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관찬 목록의 결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풍부한 개인 장서로 이를 잘 보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듯하다. 이는 당시 비서감이었던 부소(傅昭)가 그를 추천하고자 하였으나 정부 기관의 장서를 볼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거절한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
《광홍명집(廣弘明集)》 권3에 수록된 서목(序目)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1) 경전록(經典錄) 내편1內篇一:역부(易部),상서부(尚書部),시부(詩部),예부(禮部),악부(樂部),춘추부(春秋部),논어부(論語部),효경부(孝經部),소학부(小學部).
(2) 기전록(記傳錄) 내편2內篇二:국사부(國史部),주역부(注曆部),구사부(舊事部),직관부(職官部),의전부(儀典部),법제부(法制部),위사부(僞史部),잡전부(雜傳部),귀신부(鬼神部),토지부(土地部),보상부(譜狀部),부록부(簿錄部).
(3) 자병록(子兵錄) 내편3內篇三:유부(儒部),도부(道部),음양부(陰陽部),법부(法部),명부(名部),묵부(墨部),종횡부(縱橫部),잡부(雜部),농부(農部),소설부(小說部),병부(兵部).
(4) 문집록(文集錄) 내편4內篇四:초사부(楚辭部),별집부(別集部),집부(集部),잡문부(雜文部).
(5) 술기록(術技錄) 내편5內篇五:천문부(天文部),위참부(緯讖部),역산부(曆算部),오행부(五行部),복서부(蔔筮部),잡점부(雜占部),형법부(刑法部),의경부(醫經部),경방부(經方部),잡예부(雜藝部).
(6) 불법록(佛法錄) 외편1外篇一:계율부(戒律部), 선정부(禪定部), 지혜부(智慧部), 의사부(疑似部), 논기부(論記部).
(7) 선도록(仙道錄) 외편2外篇二:경계부(經戒部),복이부(服餌部),방중부(房中部),부도부(符圖部).
위에서 보듯이 기전록(記傳錄)의 독립을 유흠의 《칠략》과 다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데, 이는 남북조 시기 역사 저술들이 매우 많이 출간되면서 《칠략》처럼 춘추(春秋) 항목에 묶어 둘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불법록(佛法錄) 선도록(仙道錄) 또한 이 시기 유행하던 불교와 도교 방면 출판의 융성함을 반영하고 있다.
《七錄》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칠록》은 내편(內篇)을 5부로 나누었는데 주로 유효표(劉孝標)와 조환(祖暅)이 편찬한 《문덕전사부급술수서목록(文德殿四部及術數書目錄)》을 기초로 하였다.
(2) 《칠록》의 외편(外篇)은 불법(佛法)과 선도(仙道) 2錄인데, 이는 왕검(王儉)의 《칠지(七志)》 중 불경과 도경의 부록 성격이다.
(3) 《칠록》의 분류상 가장 빼어난 점은 있는 그대로의 현황 반영에 힘썼다는 점인데, 이는 당시 학술발전의 수요와 실제 서적 수량의 상황 파악이라는 실제적 필요에서 기인한 것이다.
5. 가치와 영향
완효서의 《칠록》은 중국목록학에 매우 중요한 문건으로 그의 목록 분류 이론의 공헌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1) 완효서는 도서 분류는 반드시 학문의 발전과 문헌 보존이라는 실제 상황에 근거하여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분류에 있어 문헌의 내용에 유의하여 검색과 이용에 편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칠록서(七錄序)》는 큰 분류의 명칭은 눈에 잘 들어오는 동시에 전체 문헌 내용을 잘 개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목록학의 대가 요명달(姚名達)은 《중국목록학사(中國目錄學史)》에서 그의 목록학 공헌을 ①분리의 합리화[分理合理化] ②시대 환경에 맞춤[適應時代環境] ③작업의 과학화[工作科學化] 등 세 가지로 들고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그 사람 집도 아주 멀고, 그 사람도 아주 멀구나![其室甚遠 其人甚遠!]”
당시 비서감인 임방(任昉)이 그를 흠모하여 만나보고 싶어 하였으나 만나주지 않을까봐 멀리서 바라보며 탄식한 말. (《양서(梁書)·처사전(處士傳)》)
• 지극한 도(道)의 근본은 무위(無爲)에 있고, 성인(聖人)의 행동은 시폐(時弊)에서 구해내는 데 있다. 시폐에서 구하려면 행동을 해야 하며 행동으로 효과를 얻으면 도의 근본과 위배된다. 도의 근본은 무위인데 행동을 하면 도의 지극함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행동을 하지 않으면 세상은 안정되지 않을 것이고, 도의 근본을 관철하지 않으면 도는 사실로 상실될 것이다. 공자와 주공은 그 행동을 보이려고 도의 근본을 잠시 감추고, 노자와 장자는 도의 근본을 밝히려고 행동을 억제할 것이다. ……이 근본과 행동의 관계를 체득하고 하나가 솟으면 하나가 억눌리는 도리를 깨친다면 공자와 장자의 뜻을 반 이상 이해한 것이다. [夫至道之本 貴在無爲 聖人之跡 存乎拯弊 弊拯由跡 跡用有乖於本 本旣無爲 爲非道之至 然不垂其跡 則世無以平 不究其本 則道實交喪 丘旦將存其跡 故宜權晦其本 老莊但明其本 亦宜深抑其跡……若能體茲本跡 悟彼抑揚 則孔莊之意 其過半矣] (《양서(梁書)·처사전(處士傳)》)
• 나는 어려서부터 옛 전적을 좋아하였으며 장성해서도 싫증내지 않았다. 병으로 누워있거나 한가로이 있을 때에도 곁에는 먼지와 잡된 것이 없었다. 새벽빛이 방금 열렸지만 책을 싼 비단 보자기는 이미 풀러졌고, 밤 시계가 울리고 나서야 초록 책을 덮었다. [孝緖少愛墳籍 長而弗倦 臥病閑居 旁無塵雜 晨光才啓 緗囊已散 宵漏旣分 綠帙方掩] (완효서(阮孝緒), 《칠록서(七錄序)》)
(2) 색인어:완효서(阮孝緒), 왕검(王儉), 《칠록(七錄)》, 《칠략(七略)》, 《칠지(七志)》, 《광홍명집(廣弘明集)》
(3) 참고문헌
• 隋書經籍志(魏徵 中華書局)
• 梁書·處士傳(姚思廉 中華書局)
• 古書源流(李繼煌 華世出版社)
• 目錄學發微(余嘉錫 巴蜀書社)
• 中國目錄學史(許世瑛 中國文化大學出版部)
• 中國目錄學史論叢(王重民 中華書局)
• 中國目錄學(胡楚生 文史哲出版社)
• 中國目錄學(昌彼得 潘美月 文史哲出版社)
• 目錄學硏究(汪辟疆 華東師範大學出版社)
• 목록학과 공구서(蔣禮鴻 저, 沈慶昊 역 이회문화사)
• 中國目錄學思想史(余慶蓉 王晋卿, 湖南敎育出版社)
【이강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