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은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유학자인 왕부지(王夫之)가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永樂) 13년(1415)에 황제의 칙령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호광(胡廣(1369~1418)) 등이 편찬한 《사서대전(四書大全)》을 읽고서, 이 《사서대전》에 실린 주자 및 송(宋)·원(元) 시대 여러 경학가(經學家)들의 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일종의 경설(經說)이다.
2. 저자
(1) 성명:왕부지(王夫之(1619~1692)).
(2) 자(字)·호(號):자는 이농(而農)이고, 호는 강재(薑齋) 또는 일호도인(一瓠道人)이다. 만년에 형양(衡陽) 석선산(石船山)에 살아 선산선생(船山先生)이라 불렸다. 스스로는 선산병수(船山病叟)라고 불렀다.
(3) 출생지역:호남성(湖南省) 형양(衡陽) 남쪽 회안봉(回雁峰) 근처(현 중국 호남성 형양시(衡陽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왕부지는 1619년 9월 1일(음력)에 호남성 형양에서 몰락한 중소 지주 계층의 지식인 가정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622년(4세)에 형으로부터 글을 배웠고, 1625년(7세)에 서당에서 십삼경(十三經)을 읽었다. 1628년(10세)에 아버지 조빙(朝聘(1568~1647))에게서 과거 시험 과목인 ‘경의(經義)’를 배웠으며, 고대 철학과 역사에 관한 수많은 저작을 읽었다. 1634(16세)년에 숙부 왕정빙(王廷聘)으로부터 시를 배웠고, 2년 동안 시 10만 수를 읽었으며, 형양세시(衡陽歲試)에 참가하여 1등을 하였고, 1638년(20세)에 장사(長沙)의 악록서원(岳麓書院)에서 공부했다.
1644년(26세) 3월에 이자성(李自成(1606~1645))에 의해 북경이 공격 받아 명왕조가 멸망했고, 그 해 5월에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吳三桂(1612~1678))가 청(淸)나라 군대를 이끌고 입관(入關)하여 북경을 함락했다. 왕부지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비분시(悲憤詩)〉를 지었다. 1646년(28세) 여름에 상음(湘陰(호남성에 있는 현(縣)))에 가서 호북순무(湖北巡撫)에게 남북독군(南北督軍)과 농민 봉기군을 연합하여 청나라 군대를 공격 하자는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해에 《주역(周易)》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주역패소(周易稗疏)》 4권과 《주역고이(周易考異)》 1권을 지었으며, 《연봉지(蓮峯志)》 5권과 《악여집(岳余集)》 1권을 편찬했고, 아버지의 명을 받아 《춘추가설(春秋家說)》을 찬했다. 1647년(29세) 5월에 청나라 군대가 형주(荊州)를 점령하자 상향현(湘鄕縣) 남백석봉(南白石峰)으로 도피했다. 1648년(30세) 10월에 남악(南嶽)의 방광사(方廣寺)에서 청나라에 항거하는 군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654년(36세) 8월 청나라 정부의 수색을 피해 3년 동안의 유랑 생활을 시작하여 1657년(39세) 4월에 형양 남악 연화봉(蓮花峰) 아래의 ‘속몽암(續夢庵)’으로 돌아옴으로써 3년 동안의 유랑 생활을 마쳤다. 이후 저술에 몰두하여 여러 권의 저술을 남겼으며, 1665년(47세)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을 완성했다. 1674년(56세)에 오삼계의 군대가 호남성의 각 곳을 공격하자, 다시 배를 타고 도피했다가 1675년(57세) 가을에 ‘관생거(觀生居)’에 돌아온 후, 석선산(石船山) 기슭에 초당을 지어 ‘상서초당(湘西草堂)’이라고 이름 짓고 살면서 1676년에 이곳에서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를 찬하기 시작했으며, 1677년(59세)에는 《예기장구(禮記章句)》 49권을 완성했다.
1678년(60세)에 오삼계가 형주에서 황제로 칭하면서 국호를 ‘대주(大周)’라고 하고 왕부지에게 강제로 〈권진표(勸進表)〉를 쓰게 하자, 거절하고 산속으로 피난하여 〈볼계부(祓禊賦)〉를 지어 그들을 멸시했다. 1679년(61세) 청나라 군대가 형주를 수복하자 청의 군대를 피하여 숲 속에 들어가서 《장자통(莊子通)》을 짓고, 1681년(63세)에 《장자해(莊子解)》를 썼다.
1685년(67세) 봄에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9권을 썼으며, 8월에 《초사통석(楚辭通釋)》 14권을 썼고, 9월에 《주역내전(周易內傳)》 12권과 《주역내전발례(周易內傳發例)》 1권을 지었다. 1687년(69세)에 《독통감론(讀通鑑論)》을 찬하기 시작했고, 1691년(73세)에 오랜 병에도 불구하고 《독통감론》 30권과 《송론(宋論)》 15권의 집필을 완성했다.
1692년(74세) 1월 2일(음력)에 ‘상서초당’에서 사망했다.
왕부지는 이와 같이 74년 동안 격동하는 역사의 한가운데 살면서 삶의 노정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꿋꿋하면서도 꾸준하게 연구에 전념하여 방대하면서도 수준 높은 저서들을 집필했다.
(5) 주요저작:《주역패소(周易稗疏)》, 《주역고이(周易考異)》, 《춘추가설(春秋家說)》, 《황서(黄書)》, 《가세절록(家世節錄)》,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 《주역외전(周易外傳)》, 《사서훈의(四書訓義)》, 《상서인의(尙書引義)》, 《영력실록(永曆實錄)》, 《춘추세론(春秋世論)》, 《춘추좌씨전박의(續春秋左氏傳博議)》,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 《예기장구(禮記章句)》, 《장자통(莊子通)》, 《장자해(莊子解)》,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시광전(詩廣傳)》, 《초사통석(楚辭通釋)》, 《주역내전(周易內傳)》, 《주역내전발례(周易內傳發例)》, 《악몽((噩夢)》, 《독통감론(讀通鑑論)》, 《속통감론(續通鑒論)》, 《송론(宋論)》. 왕부지의 저술은 약 100여 종 398권이며, 글자는 약 800여 만자. 그런데 그 중 약 20여 종은 유실되었고, 현재 전해지는 것은 373권이다.
3. 서지사항
《독사서대전설》은 왕부지의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다. 왕부지의 대부분 저술은 생전에 출간되지 못하다가, 선종(宣宗(1782~1850)) 도광(道光) 19년인 1839년에 6세손인 후손 왕세전(王世全(?~?))과 등현학(鄧顯鶴(1777~1851))이 왕부지가 남긴 저작들을 수집하여 《왕선산유집(王船山遺集)》 150권을 판각했다. 또한 목종(穆宗(1856~1875)) 동치(同治) 연간에 증국번(1811~1872)과 증국전(曾國荃(1824~1890))이 중각(重刻)하였는데 모두 172권이었다.
민국시대 이후에 유인희(劉人熙(1844~1919))가 다시 유실된 왕부지의 일부 자료를 수집하여 판각하였고, 1930년에 담연개(譚延闓(1880~1930)), 호한민(胡漢民(1879~1936)), 우우임(于右任(1879~964)) 등이 《선산유서(船山遺書)》를 중각할 때 경사자집(經史子集)으로 나눠 모으니, 모두 70종 358권이 되었다. 1971년에 대북(臺北) 선산학사(船山學社)에서 《선산유서전집(船山遺書全集)》을 간행했는데 모두 22책(冊)에 이른다. 《선산유서》본은 1975년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금릉증각본(金陵曾刻本)을 저본으로 교점(校点)한 책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리고 1996년 악록서사(岳麓書社)에서 선산전서편집위원회(船山全書編輯委員會)가 편교(編校)한 《선산전서(船山全書)》 16책이 출간되었는데, 《독사서대전설》은 《선산전서》 6책에 수록되어 있다.
4. 내용
《독사서대전설》은 왕부지가 《사서대전》을 읽고서 이 책에 실린 주자(朱子) 및 송(宋)·원(元) 시대 여러 경학가들의 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일종의 경설이다. 《사서대전》은 주로 주희(朱熹(1130~1200))의 주석에 대한 송나라 유학자들의 설을 모은 것을 위주로 하고, 그 아래에 작은 글자로 송·원대 106가(家)의 설을 발췌하여 조목별로 붙여 놓은 책인데, 정설을 선별하여 싣지 못하고 여러 설을 잡되게 모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서대전》은 중국에서는 물론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교과서로 채택되어 널리 읽혔다. 우리나라에서도 세종 연간 이 《대전》본이 유입된 이래 구한말까지 필독의 교과서로 읽혀졌으며, 17세기 이후에는 이 책의 세주(細注)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일어나, 주자의 정설을 확정하고 조금이라도 이단의 성향이 있는 설은 배척하려 한 주자주의(朱子主義) 학자들에 의해 세밀히 궁구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주자 이후 수많은 유학자들이 다양한 경전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 중 왕부지는 유가의 주요 경전들을 주해(注解)하는 과정에서 선유(先儒)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자신만의 해석 체계를 창조해 낸 걸출한 유학자이다. 왕부지의 《독사서대전설》은 《사서대전》의 원래 장 순서를 따라 읽기 노트 형식으로 일부 명제를 차용하여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설명하고 송나라와 명나라의 성리학을 비판했다.
《독사서대전설》은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은 《대학(大學)》으로 구성되었고, 2권과 3권은 《중용(中庸)》으로 구성되었으며, 4권에서 7권 까지는 《논어(論語)》, 8권부터 10권까지는 《맹자(孟子)》로 구성되었다.
5. 가치와 영향
왕부지의 학문에 대해서 중국철학자 풍우란(馮友蘭(1894~1990))은 그 학문의 광범성과 체계의 방대함에 있어서 그는 후기 도학(道學)의 주장(主將)이라고 할 만하다며 평가한 바 있다. 왕부지의 많은 저작 가운데 경학(經學)에 관한 저작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왕부지 사상의 연구를 위해서는 그의 경학 연구는 필수적이다. 그 가운데서도 동양의 전통사회에서 송대 이래로 가장 중시되었던 사서(四書)에 대한 그의 해석을 검토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그중에서도 그가 《사서대전》을 읽고 노트한 현태로 그의 생각을 피력한 《독사서대전설》에 대한 연구는 왕부지 사상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사서대전》이 주자와 그 이후 학자들의 설을 종합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자연 왕부지는 《독사서대전설》을 주자와 그 이후 학자들의 설을 때로는 받아들이고 때로는 비판하는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선유(先儒)의 사상을 끊임없이 검토하고 비판했던 왕부지의 학문적 성과와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부지의 시선으로 본 주희와 이정(二程), 장재(張載) 등의 선유를 만날 수 있다. 그가 《사서대전》을 주석하는 방식은 주희를 비롯한 선유들에게서 드러난 이론의 문제점에 대해 치밀하게 논구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왕부지가 풀이해주는 사서(四書)의 이상을 통해 유가 사상사를 관통해 오는 뚜렷한 길[道]의 비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천하의 대상은 끝이 없고 내가 그것을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아는 것은 양이 한정되어 있으나, 앎을 완성하는데 미쳐서는 양에 구애되지 않는다. 안자(顏子)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으니, 하나를 파악하여 열의 앎을 완성한 것이다. 자공(子貢)은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았으니, 하나를 파악하여 둘의 삶을 완성한 것이다. 반드시 천하의 대상을 다 파악한 이후에 만사의 이치를 다 안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방법이다. 이 때문에 《보전(補傳)》에서는 힘을 오래도록 쓰게 되면 하루아침에 모든 이치를 환히 깨닫게 된다고 말하였지, 애당초 그 파악하는 것을 쌓아서 내가 아는 것이 이미 지극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앎이 지극하다는 것은 ‘내 마음의 온전한 본체와 큰 작용이 밝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앎을 완성한다는 것은 또한 내 마음의 온전한 본체와 큰 작용을 다하는 것을 구함으로써 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단지 대상에서만 그것을 구하겠는가?” [天下之物無涯 吾之格之也有涯 吾之所知者有量 而及其致之也不復拘於量 顏子聞一知十 格一而致十也 子貢聞一知二 格一而致二也 必待格盡天下之物而後盡知萬事之理 旣必不可得之數 是以補傳云 至於用力之久 而一旦豁然貫通焉 初不云積其所格 而吾之知已無不至也 知至者 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也 則致知者 亦以求盡夫吾心之全體大用 而豈但於物求之哉] 〈대학〉
• “《중용》이라는 이름이 성립된 근거는 성인이 하늘을 이어받아 만물을 다스리면서 위로는 스스로를 수양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다스려서, 크게 표준을 세워서 백성에게 표준을 준 것으로 말한 것이다. 두 ‘표준[極]’이라는 글자는 중(中)이고, ‘세운다[建]’는 글자와 ‘준다[錫]’는 글자는 용(庸)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중용은 지극하구나! 제대로 행할 수 있는 백성이 드물어진 지 오래되었다.’라고 말했으며, 또 ‘중용은 잘 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중용이라는 것이 옛날부터 이런 가르침이 있어서 오직 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려 행해진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헛되이 일반적인 군자의 도에 입각하여 그것을 찬양하여,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이 중이 될 수 있고, ‘늘 일정하여 바뀌지 않는 것’이 용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中庸之名 其所自立 則以聖人繼天理物 修之於上 治之於下 皇建有極 而錫民之極者言也 二極字是中 建字錫字是庸 故曰 中庸其至矣乎 民鮮能久矣 又曰 中庸不可能也 是明夫中庸者 古有此敎 而唯待其人而行 而非虛就擧凡君子之道而贊之 謂其不偏不倚 無過不及之能中 平常不易之庸矣] 〈중용〉
• “《논어》를 읽는 데에는 모름지기 별도의 한 법이 있으니, 《대학》·《중용》·《맹자》와는 같지 않다. 《논어》는 위와 아래를 관통하는 성인의 말씀으로서 반드시 여기에서 아래로 배우고 위로 통달하며 같은 가운데 구별됨과 구별되는 가운데 같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讀論語須是別一法在 與學庸孟子不同 論語是聖人徹上徹下語 須于此看得下學上達 同中之別 別中之同] 〈논어〉
• “존양의 과정에서 크게 바르게 하여 성찰하여 자기를 위한 이익을 얻는 것은 성인의 성스러운 공적이다. 그 성찰에 힘을 쏟음으로써 〈본래 아직 완전한 데 이르지 않은〉 그 존양을 완전한 데 이르게 하는 것은 군자의 성인되는 공부이다. 결국 실천하는 노력을 버려두지 않는 것은 한 가지이다.”[大正於存養而省察自利者 聖人之聖功 力用其省察以熟其存養 〈本所未熟〉 君子之聖學 要其不舍脩爲者 則一而已矣] 〈맹자〉
(2) 색인어:왕부지(王夫之), 사서(四書), 사서대전(四書大全),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 대학(大學), 맹자(孟子), 논어(論語), 중용(中庸), 왕선산(王船山)
(3) 참고문헌
• 船山遺書全集(王夫之, 中國船山學會, 1972)
• 船山遺書(王夫之, 太平洋書局, 1935)
• 王船山遺書(王夫之, 曾國藩, 1865)
• 船山全集(王夫之, 大源文化服務社, 1965)
• 船山全書(王夫之, 船山全書編輯委員會, 嶽麓書社, 1996)
• 왕부지 대학을 논하다(왕부지사상연구회, 소나무, 2005)
• 왕부지 중용을 논하다(왕부지사상연구회, 소나무, 2014)
• 王夫之의 《論語》解釋(1) - 朱子의 解釋과의 比較를 中心으로(林玉均, 동양철학연구, 2009)
• 王夫之의 《中庸》 解釋 1 :朱子의 解釋과의 比較를 中心으로(林玉均, 동양철학연구, 2006)
• 王夫之의 《中庸》 解釋 2 :朱子의 解釋과의 比較를 中心으로(林玉均, 동양철학연구, 2007)
• 왕부지(王夫之)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이해(理解)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과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를 중심으로-(함현찬, 동양철학연구, 2011)
• 왕선산 《중용》철학의 실천적 성격(김동민, 유교사상연구, 2009)
• 주희와 왕부지의 욕망관 분석 -《논어집주》와 《독논어대전설》의 내용을 중심으로-(이철승, 동양철학연구, 2010)
【함현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