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통감절요(通鑑節要)》는 소미선생(小微先生)으로 알려진 강지(江贄)가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절요(節要)하여 편집한 것으로 〈주기(周紀)〉 5권을 2권으로, 〈진기(晉紀)〉 40권을 5권으로, 〈당기(唐紀)〉 81권을 14권으로, 〈송기(宋紀)〉, 〈제기(齋紀)〉, 〈양기(梁紀)〉, 〈진기(陳紀)〉, 〈수기(隋紀)〉, 〈후량기(後梁紀)〉, 〈후주기(後周紀)〉 등을 각 1권으로 줄여 전체 50권 분량으로 추린 것이다. 강씨의 가숙(家塾)에서만 전해지다가 주자(朱子)가 높이 평가하면서 알려졌다. 1237년 강연(江淵)이 원래의 취요에 윤색과 음주(音注)를 상세히 보태어 간행하는 과정에서 주자학(朱子學)의 정통론의 영향으로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기술하고, 조위(曹魏)를 비정통으로 보는 등 부분적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주자학(朱子學)이 절대적으로 숭상되면서, 삼국(三國) 중에 촉을 정통으로 보지 않고 위를 정통으로 본 《자치통감》은 정통론에 어긋나 소외되고 《통감절요》가 존중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2. 저자
(1)성명:강지(江贄)(?~?)
(2)자(字)·별호(別號):자는 숙규(叔圭), 호는 소미선생(小微先生).
(3)출생지역:건령부(建寧府) 숭안현(崇安縣).
(4)주요활동과 생애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고, 남송(南宋) 휘종(徽宗) 때 태사(太史)가 처사(處士)의 별인 소미성(小微星)의 출현을 상주하여, 유일(遺逸)을 천거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강지는 세 차례에 걸친 초빙에도 불구하고 끝내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힘을 쏟았다. 휘종은 그에게 ‘소미선생’의 호를 내렸다. 그래서 《통감절요》를 ‘소미통감(少微通鑑)’이라 부르기도 한다.
(5)주요저작:《통감절요》
3. 서지사항
《통감절요》를 ‘소미통감’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편자인 강지의 호가 소미선생이기 때문이다. 이 《통감절요》는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을 요약하여 간추린 것이다. 《자치통감》은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B.C. 403)부터 오대(五代) 주세종(周世宗) 현덕(顯德) 6년(959)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294권에 수록한 편년체 사서(史書)이다. 여기에 별도로 《통감고이(通鑑考異)》 30권과 《통감목록(通鑑目錄)》 30권을 더하면 354권의 거질(巨帙)이다.
《자치통감》은 사학(史學)의 강령(綱領)으로 높이 평가되었지만,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후인들이 쉽게 읽을 수 없었다. 강지가 이를 염려하여 《통감절요》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건령공(建寧公) 강묵(江默)이 주희(朱熹)에게 질정하였고, 그 후 남산주인(南山主人) 강연이 윤색하여 여러 사서의 표(表)·지(志)·서(序)·찬(贊)과 평론 및 음주를 붙인 것으로 처음에는 촉한이 망하자 조위에 정통성을 주었으나, 뒤에는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체제를 따라 이를 바꾸었다. 주나라가 망한 뒤 바로 진기(秦紀)로 쓰지 않고 동주군(東周君) 7년을 더 넣어 동주(東周)가 망한 뒤에야 주가 망한 것으로 표기한 것은 《자치통감강목》에도 없는 내용으로, 이를 통해 볼 때 《통감절요》는 그 후 여러 번의 수정과 윤색을 거쳐 완성된 책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자치통감》에는 없는 내용이 수록된 것이 보인다.
4. 내용
《통감절요》는 《자치통감》 294권의 내용을 절요하여 편집한 것이다. 〈주기〉 5권을 2권으로, 〈진기〉 3권을 1권으로, 〈한기(漢紀)〉 60권과 〈위기(魏紀)〉 10권을 22권으로, 〈진기(晉紀)〉 40권을 5권으로, 〈송기〉 16권과 〈제기〉 10권을 1권으로, 〈양기〉 22권을 1권으로, 〈진기〉 10권을 1권으로, 〈수기〉 8권을 1권으로, 〈당기〉 81권을 14권으로, 〈후량기〉 8권과 〈후한기(後漢紀)〉 4권을 1권으로, 〈후주기〉 5권을 1권으로 줄여, 전체 50권 15책으로 추린 것이다. 이 중 〈한기〉 22권과 〈당기〉 14권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과 당 시기 위주로 엮어졌으며, 육조(六朝)와 오대에 있어서는 큰 사건 정도만 열거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강용(江鎔)의 서문에 “양한(兩漢)과 수·당에 있어서는 정화(精華)가 다 구비되었고 육조와 오대에 있어서는 본말(本末)이 모두 나와 있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의 《통감절요》 판본의 전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의 판각작업은 고려 말 우왕(禑王) 7년 강주병마사(江州兵馬使)가 《소미통감》 즉, 《통감절요》를 하륜(河崙)에게 빌려 판각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여러 종류의 판본 중 대표적인 두 가지는 갑인자본(甲寅字本)과 춘방장판(春坊藏板)의 춘방본(春坊本)이다. 이 중 갑인자본이 가장 선본으로 정식 명칭은 《소미가숙점교부음통감절요(少微家塾點校附音通鑑節要)》로, 송나라 사람 사소(史炤)가 음석(音釋)하고 명(明)나라 사람 왕봉(王逢)이 집의(輯義)하고 《통감절요속편(通鑑節要續編)》를 펴낸 유섬(劉剡)이 증교(增校)하여 선덕(宣德) 3년(1428)에 간행한 것을 조선에서 중간한 것으로 간행년은 미상이다. 갑인자본은 조선 중기 임란(壬亂) 이후에, 춘방본은 후기에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임란 후 성리학적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각종 성리서(性理書)들이 국가 주도로 간행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이 대두되는 등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지방에서 상인들이 만든 목판본은 이 두 판본을 복각하였거나 별도로 두주(頭註)를 추가하여 판각한 것으로 종이의 질과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며 오자도 훨씬 많다. 이 밖에 대정(大正) 2년(1913) 9월에 초판된 언해본(諺解本)이 있다.
5. 가치와 영향
《통감절요(通鑑節要)》는 중국에서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판본이 나타났지만, 조선에서처럼 크게 유행하지는 못한 듯하다. 연경(燕京)에 간 박차수(朴次修)가 서점가에서 《사략(史略)》과 《통감절요(通鑑節要)》를 찾아보았으나 볼 수 없었고, 그곳의 유명 선비들도 무슨 책인지 모른다 하였다고 전하였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사서(史書)의 자세하고 간략함이 모두 구비된 것은 이 《통감절요》보다 나은 것이 없다.’ 칭찬하였는데, 조선에서 《통감절요》의 유행은 당시 도덕사관을 위주로 한 주자의 정통론이 크게 유행한 관계로 《자치통감》보다 《통감강목》이 더 많이 읽힌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즉, 조선시대에 와서 주자학이 절대적으로 숭봉됨에 따라 《자치통감》은 정통론에 어긋난다 하여 점차 소외되고, 대신 《통감절요》를 많이 읽게 되었다. 특히 주자를 절대 존숭하던 조선 중기 이후에는 교본적 차원 내지 역사 지식 습득의 차원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선비로서 이 책을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무장(武將)들에게도 병서의 일종으로 애독되었다. 이 책은 역대 사서의 편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여기에 실린 역대 인물들의 언행이나 고사는 공령문(功令文)의 제작은 물론, 일반 문장을 작성할 때도 필수적인 전거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통감절요》에 비판적인 조선 학자들은 《통감절요》는 완전하지 못한 책으로. 내용의 주객이 바뀌고 왕적(王賊)이 전도됨으로써 의리에 온당치 못하고, 기타 착오와 사실의 와전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논란할 필요조차 없다고 평하였다.
6. 참고사항
(1)명언
•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책은 기전체(紀傳體)를 바꾸어 편년체(編年體)로 만들어서 상하 수천 년 동안의 흥망과 치란이 환하게 눈앞에 나와 있으니, 진실로 역사학의 강령이라 할 것이다.[通鑑一書 易紀傳而爲編年 上下數千百載 興亡治亂 瞭然在目 誠史學之綱領也]” 〈서(序) 〉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의 아들은 병졸인데도 장군이 직접 등창의 종기를 빨아주었는데, 어찌하여 통곡하는가?” 하였다.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지난해에 오공(吳公)(오기(吳起))이 그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주었는데, 그 아버지가 〈은혜에 감격하여〉 용감히 싸우고 후퇴하지 않아서 마침내 적에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오공이 이제 또다시 그 자식의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저는 제 자식이 싸우다가 어느 곳에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문에 통곡합니다.” 하였다.[人曰 子卒也 而將軍自吮其疽 何哭爲 母曰 往年吳公吮其父 其父戰不旋踵 遂死於敵 吳公今又吮其子 妾不知其死所矣 是以哭之]” 〈위열왕(威烈王) 23년〉
• “지금 맹상군(孟嘗君)이 선비를 기르는 것은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고려하지 않고 착하고 착하지 않음을 가리지 않고, 군주의 녹을 도둑질하여 사사로운 도당(徒黨)을 세우고 헛된 명예를 떠벌려 위로는 군주를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좀먹었으니, 이는 간사한 사람의 우두머리이다. 어찌 숭상할 것이 있겠는가.[今孟嘗君之養士也 不恤智愚 不擇臧否 盜其君之祿 以立私黨張虛譽 上以侮其君 下以蠹其民 是奸人之雄也 烏足尙哉]” 〈현왕(顯王) 48년〉
(2)색인어:강지(江贄), 通鑑節要, 少微家塾點校附音通鑑節要, 甲寅字本, 春坊本, 강묵(江默), 강연(江淵)
(3)참고문헌
• 資治通鑑全譯(李國祥 等 主編. 貴州人民出版社)
• 史記註譯(王利器, 三秦出版社)
• 資治通鑑大辭典(施丁·沈志華, 吉林人民出版社)
• 譯註 通鑑節要(成百曉, 전통문화연구회)
• 〈《通鑑節要》 이해의 시각〉(심호택, 한국한문교육학회)
【서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