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581년(만력 9)에 명대(明代)의 학자인 능치륭(凌稚隆)(1533~1593)이 반고의 《한서》 100권을 대상으로 당대까지의 논평을 두루 채집하고 정밀하게 교정한 책이다.
2. 저자
(1) 성명:능치륭(凌稚隆)(1533~1593)
(2) 字・別號:능치륭은 원명(原名)이 우지(遇知), 자(字)는 이동(以棟), 호(號)는 뇌천(磊泉)
(3) 출생지역:호주(湖州) 오정(烏程)(現 절강성(浙江省) 오흥(吳興))
(4) 주요활동과 생애
능치륭의 집안은 원나라 말기의 혼란을 지나 5대조인 능현(凌賢)에 와서 중흥하게 되었고, 그의 증조부인 능부(凌敷)가 당시 오정(烏程)의 망족(望族)인 민씨(閔氏)와 혼인하면서 가격(家格)이 더욱 상승하였다. 조부인 능진(凌震)(1471~1535)은 문징명(文徵明)(1470~1559), 유린(劉麟)(1474~1561)과 교유하면서 문명을 떨쳤고, 부친 능약언(凌約言)(1505?~1572?)은 후칠자(後七子)의 영수인 왕세정(王世貞)(1526~1590)과 교유하였다. 장형 능적지(凌迪知)는 《만성통보(萬姓統譜)》 등의 서적 저술 및 계지관(桂芝館)을 운영하며 투인본(套印本)을 간행한 인물로 유명했고, 능적지의 아들인 능몽초(凌濛初)(1580~1644)는 《박안경기(拍案驚奇)》 등 소설과 희곡을 비롯하여 각종 출판 사업을 통해 명성을 쌓았다. 능치륭은 과거에는 실패했으나, 이러한 가학과 교우 관계를 배경으로 많은 저술을 남기고 출판하였다. 그는 당송파인 왕신중(王愼中)(1509~1559), 모곤(茅坤)(1512~1602)과 후칠자인 서중행(徐中行)(1517~1578), 오국륜(吳國倫)(1524~1593), 왕세정 등과 교유하면서 당대 유행한 고문운동의 영향을 깊이 흡수한 인물이었다. 이를 통해 《사기》, 《한서》, 《춘추》와 같은 고문 서적을 대상으로 하여 당대 학자들의 논평을 두루 모아 서적을 편찬하였다. 또한 《사기평림》과 같은 평림본의 저술이 가능했던 요인은 당시 복고 운동의 영향 하에서 수많은 평림본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5) 주요저작:능치륭은 《한서평림》 이외에도 《사기평림(史記評林)》, 《사기찬(史記纂)》, 《한서찬(漢書纂)》, 《춘추좌전평주측의(春秋左傳註評測義)》, 《사한이동보평(史漢異同補評)》, 《오거운서(五車韻瑞)》 등 《사기》, 《한서》, 《춘추》와 같은 고문 서적을 대상으로 하여 당대 학자들의 논평을 두루 모아놓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3. 서지사항
능치륭은 《사기평림》과 《사기찬》이 간행되어 세간의 이목을 끌자, 이를 계기로 《한서》에 대한 평림본과 초략본도 편찬하기에 이른다. 《한서평림》은 《사기찬》이 간행된 지 2년 후인 만력 9년(1581) 이전에 이미 편찬이 완료되었다. 능치륭은 《한서평림》을 간행한 후 이 서적을 《사기평림》과 합하여 《반마전서(班馬全書)》라고 불렀는데, 사인(士人)들 사이에서는 《마반전서(馬班全書)》라고도 칭해졌다.
《한서평림》 중국본은 능치륭의 자각본(自刻本), 만력 연간에 건양에 있던 서점인 췌경당(萃慶堂) 간행본, 간기가 없는 명간본, 운림(雲林) 적수당(積秀堂) 간행본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자각본과 췌경당본은 판형을 비교해볼 때 동일한 계열로 추정하고 있다. 췌경당본은 만력 연간에 자각본을 토대로 웅체신(熊體信)과 섭정화(葉正華)가 교정한 후 여창덕(余彰德)이 간행한 간본으로 추정된다.
4. 내용
책의 구성은 반고의 《한서》 체계와 같이 본기(本紀) 12권‚ 표(表) 8권‚ 지(志) 10권‚ 열전(列傳) 70권 등 10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기평림》의 형식을 본 따 편찬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편찬 방식은 《사기평림》과 대동소이하다.
권수에 수록된 ‘인용성씨(引用姓氏)’를 보면 후한(後漢) 2인, 진(晉) 2인, 수(隋) 1인, 당(唐) 13인, 송(宋) 56인, 원(元) 4인, 명(明) 64인으로 총 142인이 거론되었고, 인용된 서목은 모두 131종에 달한다. 《사기평림》에서와 같이 송본(宋本)을 저본으로 교감하되, 명(明) 정덕(正德)‧가정(嘉靖) 연간에 국자감(國子監)에서 간행한 감본(監本)을 참고하여 반복적으로 교열하였고, 간본마다 필획이 다른 경우에는 송본에 의거하여 수록했다. 또한 글자가 다른 경우에는 《사기평림》과 같이 ‘어떤 간본에는 모자(某字)가 모자(某字)로 되어 있다’라는 기록을 남겨두고 함부로 수정하지 않았다.
《한서평림》에는 역대 《한서》 간본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능치륭이 직접 조사한 것이 아닌 송대의 황선부본에 이미 나오는 부분이다. 따라서 《한서평림》에서 참조했던 송본 역시 《사기평림》과 같은 황선부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황선부본을 저본으로 하되 황선부본에 있던 주석을 부분적으로 삭제하여 고본(古本)의 원형을 잃어버린 측면도 많다.
5. 가치와 영향
중국본 《한서평림》은 선조 33년(1600)에 국내에 유입되어, 조선에서는 이를 저본으로 금속활자본인 현종실록자본과 목판본 등을 간행했다. 현종실록자본은 숙종 15년(1689)에 민암(閔黯)의 건의에 따라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늦어도 이듬해인 숙종 17년(1691)에 마무리되었다. 이후 현종실록자본을 저본으로 영조 37년(1761) 이전에 영영(嶺營)인 경상감영에서 목판본을 간행했다.
현종실록자본 《한서평림》은 진상건이나 국용건으로 35부만 인출되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접하기 매우 어려웠고, 영영본도 《한서평림》도 완영본 《사기평림》에 비해 활발히 유통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영영본은 임진왜란 이전에 인출한 금속활자본 《한서》 이후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질로 유통된 서적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오흥 능이동(능치륭)은 固書(한서)에 선본이 없다고 여겨서 이내 역대로 제평(품평)이 있는 것을 서술하여 간(柬)의 끝에 알맞게 붙이고서 그것을 판각하여 제목하기를 ‘평림’이라고 하였다.[吳興凌以棟以固書無善本 乃竝敍古今之竊有題評者 節附於柬末 刻之題曰評林]” 《한서평림(漢書評林)》 〈한서평림서(漢書評林敍)〉
• “한서 각본은 이전에 구두가 없었다. 이에 가운데에 권점를 찍어서 讀로 삼았고, 옆에다 권점을 찍어서 讀로 삼았다. 한 글자에 여러 개의 소리가 나는 것은 성운에 따라 둘레에 반쪽의 권점을 찍어 이것을 구별하였다.[漢書刻本前無句讀 玆圈於中爲讀 圈於傍爲句 而一字有數呼者則準聲韻半圈於四週以別之]” 《한서평림》 〈범례(凡例)〉
• “《한서》는 원래 비평이 없다. 내가 여러 명공들의 집에 소장된 비평본을 두루 자문하고 동한(東漢) 이래로 한사(漢史)를 논한 《반마이동(班馬異同)》, 《황씨일초(黃氏日抄)》와 같은 것과 한대(漢代)의 문장을 의론한 《문장정종(文章正宗)》, 《숭고문결(崇古文訣)》과 같은 것을 모두 채입(采入)했다. 역대의 문집에서 《한서》를 품평한 것도 그 의론을 채집하였다. 다음에는 아울러 위쪽에다 이것을 새겨두었다.[漢書原無批評 隆周諮諸名公家藏批評本及東漢以來識論漢史如班馬異同黃氏日抄之類議論漢文如文章正宗崇古文訣之類悉采入之 至於歷代文集間有品隲漢書者 亦爲掇拾其論 次幷以鐫之上方云]” 《한서평림》 〈범례〉
(2) 색인어:한서평림(漢書評林), 능치륭(凌稚隆), 자각본(自刻本), 췌경당본(萃慶堂本), 적수당본(積秀堂本)
(3) 참고문헌
• 漢書 標點校勘本(中華書局)
• 한서열전(민음사, 2021)
• 완역 한서(이한우, 2020)
• 漢書評林(哈佛大學哈佛燕京圖書館藏)
• 《汉书评林》探微(朱志先, 《史学史研究》 143, 2011)
• 宋刻《漢書》版本考(周晨, 《襄樊學院學報》 23, 2002)
• 《漢書》版本史硏究(倪小勇, 西北大學碩士學位論文, 2009)
• 正史宋元版の硏究(尾崎康, 汲古書院, 1989)
• 중국본 《史記》․《漢書》의 조선 유입과 編刊에 관한 연구(김소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김소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