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황명통기(皇明通紀)》는 명(明)나라의 진건(陳建)이 명 태조 홍무(洪武)(1367-1398) 연간부터 무종(武宗) 정덕(正德) 연간(1505-1521)까지 10조(朝) 224년의 치세(治世)를 서술한 사찬(私撰) 역사서이다. 진건의 사후 세종(世宗) 가정(嘉靖) 연간(1522-1566) 이후의 치세를 보충하는 속편이 다수 편찬되어 청대(淸代)까지 명의 역사를 이해하는 사서(史書)로 지속적으로 유통되었다. 조선에는 편찬 직후인 명종(明宗)대부터 유입되어 명대의 사적(事跡)을 파악하는 주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조선후기 경연(經筵) 교재로도 사용되었다.
2. 저자
(1) 성명:진건(陳建(1479-1567))
(2) 자(字)·호(號):진건의 자(字)는 정조(廷肇), 호(號)는 청란(淸瀾)이다.
(3) 출생지역:광동(廣東) 동완현(東莞縣)(현 광동성 동완시(東莞市))
(4) 주요활동과 생애
가정(嘉靖) 8년(1529)과 11년(1532)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복건(福建) 후관현(侯官縣) 교유(敎諭)로 재임하였다. 당시 독학(督學) 반황(潘潢)(1496-1555)과 함께 주자학과 상산학(象山學)의 차이를 논한 《주륙편년(朱陸編年)》 2편을 지었다.
가정 18년(1539) 강서임강부학교수(江西臨江府學敎授)로 승진한 후 동신양현령(東信陽縣令)을 역임하고, 48세인 가정 23년(1544)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이후 동완성 북쪽에 초당을 세우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에 그의 학문을 동완학(東莞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가정 27년(1548)에는 《주륙편년》을 개정하여 《학부통변(學蔀通辯)(12권)》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성리학의 이학(理學)적 입장에서 당시 성행하던 상산학(象山學)과 양명학(陽明學), 불교와의 시비를 밝혀 주자학의 정통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융경(隆慶) 1년(1567) 71세의 나이로 남경(南京)에서 사망하였다.
(5) 주요저작:《치안요의(治安要議)》, 《고금지감(古今至鑑)》, 《경세굉사(經世宏詞)》, 《명조첩록(明朝捷錄)》, 《진씨문헌록(陳氏文獻錄)》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황명통기》는 가정(嘉靖) 31년(1552) 완성된 명 태조 홍무제(洪武帝)의 치세(건문제(建文帝) 포함)를 정리한 《황명계운록(皇明啓運錄)(8권)》에서 연원한다. 이 책의 판각 후 진건은 사망광(司馬光)(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체제를 명사(明史)에 적용하여 영락(永樂) 연간(1403-1424)부터 정덕(正德) 연간(1506-1521)까지 8조(朝) 224년의 치적을 정리한 《황명역조자치통기(皇明歷朝資治通紀)(34권)》를 가정 34(1555)년 완성하였으며, 두 책을 합하여 “통기(通紀)”로 이름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은 “명통기(明通紀)”로 불리우기도 한다.
진건 사후 후대의 치세에 대해서는 도륭(屠隆(1543-1605))의 《황명통기술유(皇明通紀述遺)》와 동기창(董其昌(1555-1636))의 《황명통기속편(皇明通紀續編)》 등 속편이 다수 편찬되었다. 조선에서는 진강(進講)에 맞추어 숙종과 영조대 교서관(校書館)에서 속편을 포함한 《황명통기집요(皇明通紀輯要)》를 간행하였으며, 영조 48년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계(先系)를 무함한 내용이 실려 있는 청나라 주린(朱璘)(1692 활동)의 《명기집략(明紀輯略)》을 훼판하고 소각하면서 영조의 〈어제소지(御製小識)〉를 달아 새로 《황명통기집요》를 간행하였다. 조선후기 간행된 《황명통기집요》는 국립중앙도서관과 장서각과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에 다수 소장되어 있다.
4. 내용
진건은 홍무제가 개국한 40여 년간의 창업(創業) 과정과 그를 계승한 영락제(永樂帝)로부터 정덕제(正德帝)에 이르는 224년의 수성(守成)의 치세를 각 왕대별로 편년체로 편찬하였다. 왕조 교체 후 전대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반적인 정사(正史)의 편찬과는 달리 당대사로 편찬되었던 만큼 논란이 큰 정치적 조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서술하지 못했으며, 당대의 견문(見聞)을 모아 편집한 것이므로 사안에 따라 시작과 결말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한계가 지적되곤 하였다. 하지만 왕조 전반에 걸친 통시적 이해가 가능한 장점으로 인하여 명나라는 물론 조선에까지 유입되는 등 활발히 활용되었다. 진건이 편찬한 후 태조부터 희종(熹宗)까지 16조(朝)의 내용이 보강된 다종의 속편이 편찬되었지만 명의 멸망기에 해당하는 의종(毅宗) 숭정(崇禎) 연간(1628-1644)에 대한 속편은 확인되지 않는다.
5. 가치와 영향
이 책은 편찬 직후인 명종대 유입된 것이 확인되는데, 진건의 주요활동기인 명(明)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의 사친(私親) 추숭에 대한 미온적 입장으로 인하여 조선에서는 《황명통기》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제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명과의 교류가 증진되면서 명의 정치와 전례를 이해할 필요가 고조되면서 정계와 학계에서 그를 위한 주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에 처음으로 명사가 진강된 숙종대에는 2년 7개월에 걸쳐 속편이 편찬되지 않은 숭정 연간과 남명 황제의 치세를 제외한 명사 전체의 진강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영조대의 진강에서도 동일하게 활용되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우리 조정의 홍무(洪武) 황제가 개국(開國)한 40여 년의 일은 이른바 창업하여 왕통을 (정립하여) 내려준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계운록(啓運錄)》에 갖추어져 있다. (그를) 계승한 영락(永樂)황제로부터 정덕(正德)황제에 이르기까지 무릇 8조(朝) 224년의 일은 모두 이른 바 모두 이른바 갖추어져 (守成)한 시대의 일로 지금 《통기(通紀)》에 갖추어져 있다. 기(紀)를 완성하여 판목을 새겼지만 감히 스스로 태평성대의 역사를 이루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에 후세의 붓을 잡은 군자(君子)에게 원고를 맡긴다. 《계운록》은 예전에 이미 판각되었기 때문에 다시 편집하여 개각(改刻)하기 어렵지만, 둘로 하는 것 또한 옳지 않기에 지금 합쳐서 통기(通紀)라는 이름을 붙였다.[我朝洪武開國四十餘年之事 無非所謂創業垂統焉 啓運一錄備矣 繼自永樂 下迨正德 凡八朝二百二十四年之事 無非所謂指盈守成也 則今通紀具焉 紀成付梓 非敢自謂昭代成史 乃爲後之秉筆君子屬稿云爾 啓運錄 舊已梓完 難于再編改刻 然二之又不是 故今倂冠以通紀之名]” 〈황명통기서皇明通紀序〉
• “왜(倭)가 조선(朝鮮)을 침구하니 조정에서 의논하여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보내 돕게 하였다. (중략) 조선이 내속(內屬)하여 지원받기를 청하니 조정이 의논하기를 속국(屬國)은 (중국의) 울타리로서 반드시 다툴 땅이라 하여 행인(行人) 설반(薛潘)를 보내 그 왕에게 수복할 것을 유시하고 따로 부총병 조승훈(祖承訓)과 유격 사유(史儒) 등으로 하여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돕도록 하였다.[倭寇朝鮮 朝議命將出師以援之 (중략) 朝鮮願內屬乞援 廷議以屬國藩籬必爭之地 遣行人薛潘 諭其王匡復 別令副摠兵祖承訓遊擊史儒 將兵三千 渡鴨綠援之] 〈만력 20년 5월〉
(2) 색인어:진건(陳建), 명기집략(明紀輯略), 학부통변(學蔀通辯), 황명통기(皇明通紀), 황명통기속편(皇明通紀續編), 황명통기술유(皇明通紀述遺), 황명통기집요(皇明通紀輯要)
(3) 참고문헌
• 皇明通紀法傳錄(《續修四庫全書》 357, 史部, 編年類)
• 皇明通紀輯要(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도서번호 일산古2150-23)
• 皇明通紀輯要(장서각 소장, 도서번호 K2-140)
• 學蔀通辯(규장각 소장, 도서번호 古貴1252-192)
• 明代史家陳建的學術生平及其皇明通紀研究述評(莊興亮, 《史學史研究》 152-4)
• 明代思想家陳建硏究評說(孫美霞, 《廣東敎育學院學報》 28-6)
• 진건의 《학부통변》과 그의 주자학(이동희, 《유교사상연구》 7)
• 숙종대 明史 진강과 명 사적의 재인식:《皇明通紀》의 진강을 중심으로(윤정, 《歷史와實學》 74)
【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