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송(宋)나라 여조겸(呂祖謙)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기사를 바탕으로 역사 기록의 보이지 않는 모순과 사가(史家)들이 미처 보지 못한 인과관계를 찾아내어 사건과 인물들을 재해석한 것이다. 《춘추좌씨전》의 중요한 기사 168항목을 뽑아 각각 제목을 달고,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한 득실을 평론한 것으로 25권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을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동래선생좌씨박의(東萊先生左氏薄儀)》 혹은 《좌씨박의(左氏博議)》로도 부른다. 원래 과거시험의 제술방법을 익히기 위해 지어진 것이었으나, 역사 인식의 안목이 남다르고 문장이 아름답고 필력이 굳세어서 과거에 진사시를 보는 사람들의 문장 수련에 모범이 되었다. 이 책이 완성된 것은 남송(南宋) 효종(孝宗) 건도(乾道) 4년(1168)으로, 그 뒤에 후인이 발초하여 86편으로 엮어 방각(坊刻)한 것과 함께 세상에 유행하였다. 이밖에 엮은이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상증보주좌씨박의(詳增補注左氏博議)》 25권, 《좌씨박의구해(左氏博議句解)》 8권이 있으며, 청(淸)나라 강희(康熙) 연간(1661~1722) 금릉(金陵)의 주원영(朱元英)이 엮은 《좌씨박의습유(左氏博議拾遺)》 2권 및 청나라 유종영(劉鍾英)이 엮은 《집주동래박의(輯注東萊博議)》 4권이 있다.
2. 저자
(1)성명:여조겸(呂祖謙)(1137~1181)
(2)자(字)·별호(別號):자는 백공(伯恭), 시호는 성(成), 호는 동래(東萊).
(3)출생지역:무주(婺州) 금화(金華)
(4)주요활동과 생애
여조겸은 명문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북송(北宋) 초기의 명재상 여이간(呂夷簡)의 7세손이고, 상서우승(尙書右丞) 호문(好問)의 손자, 여대기(呂大器)의 아들로 정통 가정교육을 받았고, 장성한 뒤에는 활발한 교유를 바탕으로 학문과 사상에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선조가 본래 동래(東萊)(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수현(壽縣))에 거주하였으므로 호를 동래라 하였다. 임지기(林之奇), 왕응진(汪應辰), 호헌유(胡憲遊) 등과 사우(師友) 관계이며, 주희(朱熹), 장식(張栻)과 더불어 동남삼현(東南三賢)이라 불렸다. 주희, 장식, 육구연(陸九淵) 등과 더불어 강학에 힘써 대성하였다. 1175년 주희와 육구연 등을 강서성(江西省) 신주(信州)에 있는 아호사(鵝湖寺)에 불러 주·육 양인의 ‘아호논쟁(鵝湖論爭)’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여조겸의 학풍을 ‘여학(呂學)’ 또는 ‘무학(婺學)’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영가학파(永嘉學派)의 경세치용(經世致用) 사상을 받아들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5)주요저작:저서에 《여씨가숙독지기(呂氏家塾讀持記)》 32권 등이 있다. 이 밖에 《고주역(古周易)》·《춘추좌씨전설(春秋左氏傳說)》·《대사기(大事記)》·《역대제도상설(歷代制度詳說)》·《소의외전(少儀外傳)》·《동래집(東萊集)》 등의 저술이 있으며, 주희와 함께 북송 도학자의 어록(語錄)을 편집하여 《근사록(近思錄)》을 찬하였다.
3. 서지사항
《동래박의(東萊博議)》의 편찬 동기는 〈동래선생자서(東萊先生自序)〉에 “《동래박의》는 여러 유생들의 과거시험을 위해 지었다.”라고 하였듯이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거자(擧子)들의 학습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편찬 시기는 여조겸이 모친상 중이었던 1168년인 듯하다. 여조겸이 동양(東陽)의 무천(武川)에 있을 때 그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화제가 과거시험 보는 글에 미치게 되자 그는 바로 좌씨(左氏)의 글 중에서 치란득실(治亂得失)의 자취를 남긴 사건을 뽑고 그 아래에 설명을 달았는데, 그것이 쌓여서 여러 권의 책이 되었다고 하였다.
《동래박의》는 판본마다 권수의 차이를 보인다. 완질본(完帙本)은 모두 25권으로 본래 20권이었으나, 이 판본에 제목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인용하고 본문 중간에 징험되는 전고(典故)를 달아 다시 25권으로 나누었을 것이라는 것이 제가들의 주장이다. 또한 전 8권의 판본과 전 4권의 판본이 있는데, 이는 완질본인 25권의 간략본이다. 국내에는 1~2, 9~11, 23~25권만이 남아 있는 잔본이기는 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511년 활자본으로 간행된 완질본 《신간상증보주동래선생좌씨박의(新刊詳增補註東萊先生左氏博議)》을 비롯하여 완질본 3종류와 간략본 10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동래박의는 완질본보다는 간질본의 형태로 많이 읽혀져 왔는데, 이는 이 책이 본래 과거시험의 제술과목을 위한 작문연습서이기 때문에 많은 유생들이 서로 돌아가며 필사해보는 과정에서 더욱 간편화된 형태로 유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4. 내용
《동래박의》는 역사 속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논평이다. 《춘추좌씨전》을 읽고, 주제에 관련된 한 가지 사건이나, 혹은 관련된 여러 사건을 모아 기사화된 인물·사건을 논평하였다.
논평은 다음의 기준에서 서술되었다. 첫째, 사실 평가에 대하여 좌씨와 견해를 달리하는 경우, 둘째, 좌씨의 기사에 의존하지 않고 애초에 그러한 기사를 썼던 좌씨 당사자를 비평한 경우, 셋째, 모범이 되는 기사를 찾아 그 행실을 칭양(稱揚)한 경우에 논평이 기술되었다. 또 기존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대상에 대한 도덕적 잣대와 심리적 분석으로 시비득실(是非得失)을 파헤치기도 하였다.
국내에 소장되어 있는 《신간상증보주동래선생좌씨박의》는 목록에 앞서 〈동래선생좌씨박의서(東萊先生左氏博議序) 〉가 있고, 책 후미에 장위(張偉)의 〈제동래박의후서(題東萊博議後序)〉가 있다. 목록은 인용된 《춘추좌씨전》의 표제어 전부를 제목으로 나열하고 있으며, 목록 끝에 유씨안정당(劉氏安正堂)의 간행기가 있다. 각 편의 체제는 순서는 ‘제목-《춘추좌씨전》 인용문–주의(主意)-본문(本文) 및 간주(間註)’로 되어 있다. 《춘추좌씨전》의 인용문은 하나의 주제와 관련된 인물이나 사건을 《춘추좌씨전》에서 모아 인용한 부분이다. 여러 인용문 가운데 하나를 편의 제목으로 선정하고, 각 편의 제목 아래에 해당하는 《춘추좌씨전》 본문을 인용하였다. ‘주의(主意)’는 본편에 대한 간략한 주제와 평론으로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배열하였다. 본문 중간에 간주가 있는데, 편마다 일정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매우 상세하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좌씨박의(左氏博議)》는 명(明)나라 정덕본(正德本) 25권을 저본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국내 소장의 《신간상증보주동래선생좌씨박의》와는 달리 ‘제목(題目)–《춘추좌씨전》 인용문–본문(本文)’순으로 되어 있어 ‘주의’가 없고, 본문 안의 간주는 역사 전고와 출전을 밝히는 정도로만 부가되어 있다.
5. 가치와 영향
《동래박의》는 경의(經義)와 이학(理學)을 융화하고, 사실의 시비득실에 대해 심리적 동향을 반영한 역사비평서이다. 여조겸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았으며 역사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동래박의》는 그의 이런 모습을 잘 반영한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책이 과거시험을 잘 보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이를 표현하기 위한 지나친 기교와 논리의 비약 등 단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희는 《동래박의》에 대해 ‘상교(傷巧)(지나치게 기교를 부린다.)’라는 말로 이 책을 표현하고 있으나, 책의 내용을 보면 의론(議論)을 세움이 순정하고, 도덕적 기준이 엄격하며, 문필이 날카로워 주희의 평이 오히려 이 책을 돋보이게 한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동래박의》는 그 서문에 ‘이 책은 학생들의 과시(科試)를 위해 지은 것이고 이로 인해 명절 때나 휴가를 받아 돌아가는 제생(諸生)들의 행장(行裝)을 열어보면 이 책이 없는 자가 없었다.’라고 서술하고 있어 당대 최고의 수험서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동래박의》는 조선 초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래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동안 널리 수용되고 유통되었다. 특히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필독서로 인정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인 의의가 있다. 이 책은 본래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날카로운 역사 논평, 치밀한 논리, 수려한 문장 등으로 인해 수험서 이상의 의의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조선의 지식인들은 긴 시간 동안 이 책을 애독하였다. 《동래박의》가 처음 유입되던 조선 초에는 ‘성리학 기반의 역사 평론서’로서의 의의가 크고, 16세기 후반부터 86편을 수록한 축약본이 목판본과 필사본을 통해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시기에는 ‘실용적 목적의 과거 수험서’로서의 의의가 크며, 과거제가 폐지되고 수험서로서의 의의가 줄어든 조선 말기 이후로는 ‘문장력 강화를 위한 지침서’로서의 의의가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래박의》가 다루고 있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조선조에서 전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동래박의》를 두고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 겉모습이나 본뜨는 책일 뿐이며 성리서(性理書)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한 박세채의 평가가 있고, 조선 숙종(肅宗) 31년(1705) 생원 진사시 복시(覆試) 의제(疑題)에 《동래박의》와 관련된 내용이 출제되자 이를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였다.
6. 참고사항
(1)명언
• “대체로 ≪춘추(春秋)≫ 경문(經文)의 뜻은 대략이라도 감히 참람하게 논하지 않았고, 〈전문(傳文)의〉 지엽적인 말과 군더더기 말만을 〈뽑아 논술한 것은〉 거자(擧子)들의 과시(科試)에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凡春秋經旨 槪不敢僭論 而枝辭贅喩 則擧子所以資課試者也]” 〈동래선생좌씨박의서(東萊先生左氏博議序) 〉
• “낚시꾼을 나무라지 않고 미끼를 탐낸 물고기를 나무라며, 사냥꾼을 나무라지 않고 함정에 뛰어든 짐승을 나무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는가.[不責釣者 而責魚之貪餌 不責獵者 而責獸之投穽 天下寧有是邪]” 〈정장공공숙단(鄭莊公共叔段)〉
• “예전에 남의 나라를 경복(傾覆)시킨 자는 자기의 계책을 숨기고 남을 은밀히 자기의 계책에 빠뜨려, 해를 당한 뒤가 아니면 깨달을 수 없게 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계책이 심오하였는가.[昔之傾人之國者 匿其機而使人陰墮其計 非受害之後 莫能悟 何其深也]” 〈초침수(楚侵隨)〉
(2)색인어:여조겸(呂祖謙), 동래박의(東萊博議), 과거시험(科擧試驗), 과거수험서(科擧受驗書), 역사논평(歷史論評),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동래선생좌씨박의(東萊先生左氏薄儀)’, ‘좌씨박의(左氏博議)’
(3)참고문헌
• 東萊博議(吳在錫, 中和堂)
• 新刊詳增補註東萊先生左氏博議
• 新譯東萊左氏博議(李振興, 簡宗梧 註譯, 三民書局)
• 古申論-全本東萊博議今譯(王明飛 點譯, 甘肅民族出版社)
• 呂祖謙年譜(杜海軍, 中華書局)
• 譯註 東萊博議(鄭太鉉, 金炳愛 역, 전통문화연구회)
【서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