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후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단대사로서 《사기(史記)》, 《한서(漢書)》와 더불어 중국정사 24사 가운데 으뜸인 ‘삼사(三史)’로 꼽히며,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와는 ‘전사사(前四史)’로 불린다. 남송(南宋) 시기 범엽(范曄)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역사서로서 광무제(光武帝)(건무(建武) 원년(元年), 25)시기부터 헌제(獻帝)(건안(建安) 25, 220)까지의 196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2. 저자
(1)성명:범엽(范曄)(398~445)
(2)자(字):울종(蔚宗)
(3)출생지역:회계군(會稽郡) 산음(山陰)(현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4)주요 활동 및 생애
전통적인 사족(士族) 집안 출신으로 증조부 범왕(范汪), 조부 범녕(范寧), 부 범태(范泰)는 남조(南朝)의 왕조에서 높은 관직에 임용된 인물들이다. 그러나 범엽 자신은 첩의 소생으로 서자(庶子)였다. 420년에 유유(劉裕)가 동진(東晉)의 선양(禪讓)을 받아 즉위하여 송(宋)나라(유송(劉宋))를 개창하였을 때, 범엽은 유유의 아들인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의 관군참군(冠軍參軍)이 되어 상서외병랑(尙書外兵郞)의 관직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가(元嘉) 9년(432) 유의강의 어머니 장례 중에 연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선성태수(宣城太守)(현 안휘성(安徽省))로 좌천되었다. 이곳에 재임하던 시절에 《동관한기(東觀漢記)》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원가 22년(445) 현재 전하는 《후한서》를 저술하였다. 이 시기 문제(文帝)의 동생인 유의강의 권세가 황제인 문제를 능가하자, 440년에 문제는 유의강의 측근들을 주살하거나 유배시키고 유의강은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좌천시켰다. 5년 후인 445년 범엽은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완성하였으며, 동시에 사엄(謝儼)과 공동으로 〈예약지(禮樂志)〉, 〈여복지(輿服志)〉, 〈오행지(五行志)〉, 〈천문지(天文志)〉, 〈주군지(州郡志)〉 등의 이른바 ‘오지(五志)’를 완성하였다. 이때 산기시랑(散騎侍郎) 공희선(孔熙先)이 유의강의 복권과 옹립을 꾀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범엽도 모의에 가담했다고 고발당하여 자신을 포함한 일가 전원이 처형당하고 말았다. 범엽과 공동으로 〈지(志)〉를 집필한 사엄은 이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수중에 있던 완성된 〈지(志)〉를 파기하였다. 그 결과 《후한서》는 단지 〈본기〉와 〈열전〉 부분만 전해지고 있다.
(5)주요 저작:《후한서》 외에, 《쌍학시서(雙鶴詩序)》, 《악유응조시(樂游應詔詩)》 등과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 《화향방(和香方)》․ 《잡향고방(雜香膏方)》, 《백관계차(百官階次)》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본기 10권과 열전 80권은 범엽이 저술하였고 당(唐)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이 주석을 하였다. 범엽이 저술한 《후한서》는 당시 전해지던 7종의 후한 관련 사료를 종합하여 저술한 것이며, 원굉(袁宏)이 저술한 《후한기(後漢紀)》와 유진(劉珍) 등이 편찬한 《동관한기(東觀漢記)》를 참고하였다. 범엽이 대역죄에 연루되어 죽을 때, 〈지(志)〉를 공동으로 저술한 사엄이 그 저술을 파기한 까닭에 〈지(志)〉는 없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지(志)〉 30권은 사마표(司馬彪)의 《속한서(續漢書)》에 유소(劉昭)가 주석을 단 것을 덧붙인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속한지》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4. 내용
《후한서》의 대부분은 《사기》와 《한서》의 체제를 답습하였으나, 범엽이 저술하는 과정에서 후한 시기 역사의 구체적인 특징을 반영하여 새롭게 작성하거나 변경된 부분이 있다. 첫째, 〈제기(帝紀)〉 서술 다음 부분에 〈황후기(皇后紀)〉를 배치하였다. 후한시기에는 화제(和帝)부터 시작하여 연속적으로 6차례의 ‘태후임조(太后臨朝)’를 맞이하였다. 태후들의 활동을 본기의 형식으로 서술한 것으로 이 시기의 정치적 특징을 잘 반영한 것이다. 둘째, 〈당고전(黨錮傳)〉, 〈환자전(宦者傳)〉, 〈문원전(文苑傳)〉, 〈독행전(獨行傳)〉, 〈방술전(方術傳)〉, 〈일민전(逸民傳)〉, 〈열녀전(列女傳)〉 등의 7개 열전을 새로이 편찬하였다. 특히 기전체 사서에서 처음으로 부녀를 위한 전(傳)을 편찬했으며, 〈열녀전〉에 수록된 17명의 여성들 모두가 정녀절부(貞女節婦)는 결코 아니며, 예교 도덕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재녀(才女)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체제상에서도 《사기》, 《한서》와 비교하면 다른 변화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즉 《한서》의 이른바 ‘일제일기(一帝一紀)’의 서술과는 달리 본기에 다른 황제를 부기(附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2세 호해(胡亥)와 자영(子嬰)을 부기하였듯이 〈화제기(和帝紀)〉 뒤에 상제(殤帝)를 부기하고 있다. 또한 《사기》와 《한서》에서는 황후를 〈외척전(外戚傳)〉에서 기술하고 있지만 《후한서》에서는 〈본기〉에 서술하였다. 이러한 편찬의 변화는 후한 시기 6차례에 걸쳐 황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한 역사적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5. 가치와 영향
《후한서》는 왕도질서의 인정, 충정(忠貞)과 명절(名節) 등을 찬양하고 간사함을 비난하여 기본적으로 유가정통사상의 관념을 체현한 사서이다. 이러한 내용은 《후한서》가 정사(正史)로 인정되는 근본적인 배경이다. 유가정통사상의 선양이 《후한서》의 기본 내용이 된 까닭에 대부분의 인물에 대한 《후한서》의 포폄(褒貶)은 유가사상의 표준을 제시하였다. 더욱이 〈열녀전〉을 처음으로 편찬하여 여자 가운데 “재주와 행실이 매우 훌륭한 자[才行尤高秀者]”를 찬미함으로서 이전 사서들이 정통사상에 구속되어 황실 여성 외에는 입전할 수 없다는 금례(禁例)를 폐지하여 후대의 사가들이 〈열녀전〉의 체제를 계승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후한서》가 사학의 명저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편찬에서 매우 커다란 성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전체는 종합적인 편찬방식으로서 이러한 편찬방식에서 어떻게 전체의 내용을 총괄하여 해당 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자세하거나 소략하게 서술하느냐 하는 것이 매우 까다로운 문제이다. 범엽은 후한 역사의 흥망성쇠를 세밀하게 서술함과 동시에 민간사회와 인물 등의 다양한 모습을 서술하는 등 여러 책의 장점을 받아들여 편찬했기 때문에 사료의 취사선택에서 일괄되고 정연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사료를 빠짐없이 다 취했으며 인물평가에서도 포폄(褒貶)이 정확하고 문장 표현도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유지기(劉知幾)가 《후한서》의 서술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두루 미치며, 소략하면서도 빠지는 것이 없다.[简而且周 疏而不漏]”라고 찬미한 것도 인정할 만하다.
6. 참고사항
(1)명언
• “백성은 덕으로 이길 수 있으나 힘으로는 굴복시키기는 어렵다. 선왕은 도를 통치의 근간으로 하고 백성은 화목함에 힘쓰게 함으로써 천하가 화평을 이루어서 재해가 발생하지 않고 화란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百姓可以德勝 難以力服 先王要道 民用和睦 故能致天下和平 灾害不生 禍亂不作]” 〈종리의열전(鍾離意列傳)〉
• “맹민의 자는 숙달이고 거록군 양씨현 사람이다. 객으로서 태원에 살고 있었다. 시루를 어깨에 메고 가다가 땅에 떨어뜨려 깨뜨렸으나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임종이 이를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시루가 이미 깨졌는데 쳐다본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임종은 이 일로 그를 기이하게 여겼고, 〈곽태(郭太)는〉 그에게 학문하기를 권하였다. 십 년 뒤에 맹민의 명성이 알려지자 삼공이 모두 불러 벼슬하게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孟敏字叔達 鉅鹿楊氏人也 客居太原 荷甑墯地 不顧而去 林宗見而問其意 對曰 甑以破矣 視之何益 林宗以此異之 因勸令遊學 十年知名 三公俱辟 竝不屈云” 〈곽태열전(郭太列傳)〉
•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가.[天知 神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 〈양진열전(楊震列傳)〉
2) 색인어:후한서(後漢書), 범엽(范曄), 한서(漢書), 속한서(續漢書), 이현(李賢), 전사사(前四史).
3) 참고문헌
∙(標點校勘)後漢書, (范曄(宋) 撰, 李賢(唐) 等注, 中華書局)
∙後漢書(전11책)(吉川忠夫 訓注, 岩波書店)
∙後漢書(전3책)(汲古書院)
∙全譯後漢書(汲古書院)
∙後漢書劉昭注李賢注の研究(小林岳 著, 汲古書院)
∙후한서 본기(장은수 옮김, 새물결)
【김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