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서의의거례(古書疑義擧例)》는 중국 고전의 독해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난해한 구절에 대해 그 다양한 현상과 원인을 분석하여 총 7권 88가지 사례로 귀납한 청말(淸末) 유월(兪樾)의 저작이다. 유월은 고전 문헌의 난해함이 단지 어휘와 문법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전승과정에서 발생한 텍스트의 변형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러한 여러 가지 현상을 명확히 이해해야만 고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훈고학・어법학・판본학・주석학・교감학・수사학 등 다양한 분과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고전문헌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2. 저자
(1) 성명:유월(兪樾(1821~1907))
(2) 자(字)·호(號):자는 음보(蔭甫), 호는 곡원(曲園)이다.
(3) 출생지역:절강(浙江) 덕청(德淸)
(4) 주요활동과 생애
도광(道光) 30년(1850) 회시(會試)의 복시(覆試)에서 제출한 “花落春仍在[꽃은 떨어졌지만 봄은 여전하네]”라는 시구(詩句)를 당시 시험관이었던 증국번(曾國藩(1811~1872))이 높게 평가하여 진사(進士) 1등으로 선발하였다. 유월은 감사의 의미로 이후 전집(全集)을 내었을 때, “춘재당전서(春在堂全書)”라고 이름 지었다. 진사가 되어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를 지내다가 함풍(咸豐) 2년(1852) 산관(散館)하여 편수(編修)를 제수받았다. 함풍 5년(1855) 하남학정(河南學政)으로 부임하였는데, 출제한 과거(科擧) 시제(試題)가 “경전의 의미를 찢어발겼다[割裂經義]”는 혐의로 어사(御史) 조등용(曹登庸)에게 탄핵을 받아 2년 만에 관직에서 파면당한다.
당시 태평천국(太平天國) 전란의 와중에 특별한 직무가 없었던 유월은 고전문헌을 다시 읽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유월이 학문적으로 각성하는 데에 큰 계기가 되었다. 특히 왕념손(王念孫)(1744~1832), 왕인지(王引之(1766~1834)) 부자의 《독서잡지(讀書雜志)》, 《경의술문(經義述聞)》, 《광아소증(廣雅疏證)》 등의 저작을 접하게 되면서 학문을 향한 뜻을 굳게 다지게 되었고, 왕씨 부자의 관점과 방법을 원용하여 자신이 직접 저술에 착수하게 된다. 이후 저술에 매진하며, 소주(蘇州) 운간서원(雲間書院), 자양서원(紫陽書院), 상해(上海) 구지서원(求志書院), 항주(杭州) 고경정사(詁經精舍) 등 여러 서원의 주강(主講)을 지내면서, 장병린(章炳麟), 대망(戴望), 황이주(黃以周), 주일신(朱一新), 시보화(施補華), 왕이수(王詒壽), 풍일매(馮一梅), 오경지(吳慶坻), 오승지(吳承志), 원창(袁昶)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증국번, 이홍장(李鴻章(1823~1901)) 등과 깊이 교류하였는데, 유월이 자신의 저술을 출판할 때 이들에게 많은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손자 유폐운(兪陛雲(1868~1950))은 학자, 시인 등으로 이름을 알렸다. 증손자 유평백(兪平伯)(1900-1990)은 신문학운동 초기 시인으로 중국백화시창작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며, 청화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5) 주요저작:분량으로는 청조에서 가장 많다는 평가를 받는 유월(兪樾)의 저술은 《춘재당전서(春在堂全書)》 491권에 수록되어 있다. 대표 저술로는 유가경전 주석서인 《군경평의(群經平議)》, 제자서 주석서인 《제자평의(諸子平議)》, 그리고 《고서의의거례(古書疑義擧例)》가 있다.
3. 서지사항
동치(同治) 7년(1868)에 완성하고, 동치 10년(1871) 제일루총서에 편입되어 출간된 《고서의의거례》는 《군경평의》와 《제자평의》를 잇는 유월의 세 번째 학술 저작이다. 흔히 유월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던 왕념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부자의 저작을 유월이 계승하여 저술을 진행했다고 설명하는데, 《군경평의》와 왕인지의 《경의술문》, 《제자평의》와 왕념손의 《독서잡지》, 《고서의의거례》와 왕인지의 《경전석사(經傳釋詞)》를 짝을 이루는 저술로 설명한다. 왕인지의 《경전석사》는 《독서잡지》와 《경의술문》에서 다룬 내용을 허사의 쓰임이라는 관점에서 체계를 세우고 각 항목에 해당하는 사례를 새롭게 배치하였는데, 《군경평의》와 《제자평의》의 내용을 새로운 체계로 재편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고서의의거례》와 《경전석사》는 형식적 친연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법적인 관점에서 작성한 《경전석사》와는 달리, 고전문헌이 전승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고전문헌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작성한 《고서의의거례》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경전석사》보다는 왕념손의 《독서잡지》 중 《독회남내편잡지후서(讀淮南內篇雜志後序)》와 왕인지의 《경의술문》 〈통설 하(通說下)〉와 더 유사하다.
《고서의의거례》는 《황청경해속편(皇淸經解續篇)》본, 《춘재당전서(春在堂全書)》본이 있으며, 1956년 중화서국에서 유사배(劉師培)의 《고서의의거례보(古書疑義擧例補)》, 양수달(楊樹達)의 《고서의의거례속보(古書疑義擧例續補)》, 마서륜(馬敍倫)의 《고서의의거례교록(古書疑義擧例校錄)》, 요유예(姚維銳)의 《고서의의거례증보(古書疑義擧例增補)》 등과 함께 묶어 출간한 교점본 《고서의의거례오종(古書疑義擧例五種)》본, 그리고 《고서의의거례오종》에 양수달의 《고서의의거례재속보(古書疑義擧例再續補)》, 《고서구두석례(古書句讀釋例)》 등을 더한 1992년 대만 세계서국에서 출간한 《고서의의거례등칠종(古書疑義擧例等七種)》본 등이 있다.
4. 내용
《고서의의거례》는 제목 자체에 이 저술의 문제의식과 방법이 간명하게 드러나는데, “고서의의거례(古書疑義擧例)”는 말 그대로 “고서(古書)에서 보이는 의문점[疑義]을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擧例]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고서”는 구경(九經)과 제자서(諸子書)를 지칭하는데, 시기적으로는 대체로 선진(先秦)・양한(兩漢)의 문헌이다. 이 시기의 문헌은 구술・암송・간백 기록이 혼재했던 시기에 탄생하여, 문자 텍스트의 형태로 확립되던 시기, 종이에 필사된 형태로 유통되던 시기, 목판으로 인쇄된 시기를 모두 통과했다. 다시 말해 “고서”는 오랜 기간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전승되었던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다양한 형태로 전승된 문헌은 어법의 변천과 전승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 문헌의 이해를 방해하는 장애가 발생한다. 유월은 고전문헌의 독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어려움을 “의의(疑義)”라고 규정하고, 《군경평의》와 《제자평의》를 저술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렸던 여러 가지 “의의”를 모으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특정한 규칙을 찾아내어 88가지 유형으로 귀납한 후, 그 유형에 해당하는 고전문헌의 사례들을 들어 후학들이 고서를 정확하게 읽고,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였다.
5. 가치와 영향
고전문헌 해독의 어려움에 대해 원인과 현상을 다양한 분과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분석한 《고서의의거례》는 그 복합적인 내용으로 인해 훈고학・어법학・주석학・교감학・수사학 등 다양한 분과의 연구대상으로 거론된다. 그중 특히 고서에서 오류를 일으키는 원인을 기술한 부분은 교감학 분야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청대(淸代) 단옥재(段玉裁(1735~1815)) 등의 고증학자들에 의해 제공된 교감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바탕으로 왕념손과 왕인지가 개발한 교감의 ‘통례(通例)’나 ‘오례(誤例)’를 이어받아 교감의 방법론을 발전시켰으며, 청대 교감이론의 체계화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교감이론서라 평가할 수 있다.
《고서의의거례》는 청말민초(淸末民初)의 학자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고서의의거례》 출간 이후 유사배의 《고서의의거례보》, 양수달의 《고서의의거례속보》, 마서륜의 《고서의의거례교록》, 요유예의 《고서의의거례증보》 등 유월의 기획의도에 호응하여 다양한 사례를 발굴하는 노력이 진행되었고, “의의거례체(疑義擧例體)”의 탄생이라 할 만큼 사례를 들어 난해한 구절의 이해를 구하는 시도가 유행하였다. 일부에서는 이들을 “거례파(擧例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주(周)・진(秦)・양한(兩漢) 시기는 현재에서 멀리 떨어진 과거라 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이 이치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字句)만 따지는 방식으로 주(周)・진(秦)・양한(兩漢)의 글을 읽는다면, 이는 마치 산골에 사는 촌뜨기와 더불어 진(秦)나라의 감천궁(甘泉宮)이나 한(漢)나라의 건장궁(建章宮)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과 같다. 글자체는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에서 예서(隸書)로, 또 혜서(楷書)로 변했고, 서사(書寫) 매체도 죽간에서 비단으로, 또 종이로 여러 차례 변했다. 그런데도 요새 볼 수 있는 목판본을 들고 옛사람들의 진짜 책이라 여긴다면, 마치 죽순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서 대나무 방석을 삶아 먹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아, 이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고서를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이유가 아니겠는가![夫周秦兩漢至於今遠矣 執今人尋行數墨之文法 而以讀周秦兩漢之書 譬猶執山野之夫 而與言甘泉建章之巨麗也 夫自大小篆而隸書 而眞書 自竹簡而縑素而紙 其爲變屢矣 執今日傳刻之書 而以爲是古人之眞本 譬猶聞人言筍可食 歸而煮其簀也 嗟夫 此古書疑義所以日滋也歟]” 〈고서의의거례서(古書疑義擧例序)〉
• 동일한 의미의 글자가 잘못 덧붙여진 경우[兩字義同而衍例]:“(古書)에는 동일한 의미의 두 글자 중 한 글자는 잘못해서 덧붙여진 경우가 있다. 아마도 (古書)의 (箋)과 (注)가 아직 없었을 때, 학자(學者)들이 그 사설(師說)을 따라 입으로 서로 전수(傳受)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훈고(訓詁)의 글자가 잘못하여 정문(正文)에 들어간 것인 듯하다. 《주관(周官)》 〈팽인(亨人)〉의 “職外內饔之爨亨煮(외옹(外饔)과 내옹(內饔)은 부뚜막에서 삶는 것을 담당한다.)”에서는 이미 팽(亨)을 말하였는데, 또 자(煮)를 말하고 있다. 옛날의 경사(經師)들이 서로 전수하면서 이 팽(亨)자를 “팽자(亨煮)의 팽(亨)”이지 “형통(亨通)의 형(亨)”이 아니라고 설명한 것 때문에, 잘못하여 경문(經文)의 “찬팽(爨亨)”이 “찬팽자(爨亨煮)”가 된 것이다. 왕념손(王念孫)은 이 구절의 잘못이 당석경(唐石經)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였는데, 틀렸다.[古書有兩字同義而誤衍者 蓋古書未有箋注 學者守其師說 口相傳受 遂以訓詁之字誤入正文 周官亨人職外內饔之爨亨煮 旣言亨 又言煮 由古之經師相傳 以此亨字乃亨煮之亨 而非亨通之亨 因誤經文爨亨爲爨亨煮矣 王氏念孫謂誤始唐石經 非也]” 권5 〈52(例)〉
• “나는 어려서 덕청(德淸) 유씨(兪氏)의 책을 읽다가 《고서의의거례(古書疑義擧例)》에 이르러서 뛰어난 작품이라고 감탄하였다. 서적 중의 미묘한 말과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단어들, 해석이 분분하여 혼란스러운 것들을 오직 간략히 그 통례(通例)를 들어 여러 책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니, 의심스러운 문장들이 얼음이 녹듯 풀렸다. 고금(古今)에 있지 않은 뛰어남을 드러낸 것인 듯하다. 근래에 소학(小學)을 공부하면서 그 예(例)를 본받았는데, 유서(兪書)에서 갖추지 못한 것 중 수십 조에 대해 의미를 얻게 되어 유서(兪書)의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자 한다. 속초(續貂(훌륭한 작업에 변변치 못한 작업이 뒤따름))라는 비방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幼讀德淸兪氏書 至古書疑義擧例 嘆爲絶作 以爲載籍之中 奧言隱詞 解者紛歧 惟約擧其例 以治群書 庶疑文冰釋 蓋發古今未有之奇也 近治小學 竊師其例 於兪書所未備者 得義數十條 以補兪書之缺 續貂之譏 詎能免乎]” 유사배(劉師培), 《고서의의거례보(古書疑義擧例補)・서(序)》
(2) 색인어:고서의의거례(古書疑義擧例), 군경평의(群經平議), 제자평의(諸子平議), 유월(兪樾), 왕념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독서잡지(讀書雜志), 경의술문(經義述聞), 의의거례체(疑義擧例體), 거례파(擧例派), 교감이론서(校勘理論書)
(3) 참고문헌
• 清史稿・俞樾傳(趙爾巽 等, 中華書局)
• 花落春仍在(張欣, 廣東敎育出版社)
• 兪先生傳(章太炎, 章太炎全集, 上海人民出版社)
• 兪樾全集(汪少華・王華寶 等 整理, 鳳凰出版社)
• 古書疑義擧例(馬敍倫 校錄, 傅杰 導讀, 上海古籍出版社)
• 兪樾訓詁硏究(王其和, 齊魯書社)
• 兪樾《古書疑義擧例》評注(許威漢·金甲, 商務印書館)
• 〈兪樾《古書疑義擧例》의 성과와 한계〉(김효신, 중국학보 97집, 2021)
【김효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