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명(明)나라 때의 유학자인 나흠순(羅欽順)(1465~1547)이 지은 저서로 총 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흠순은 만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일찍이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공부하여 심성(心性)의 참된 이치를 깨달았다. 그런 학문의 과정에서 스스로 치열하게 공부하여 깨우친 바를 기록한 것이 바로 《곤지기(困知記)》이다.
2. 저자/편자
(1)성명:나흠순(羅欽順)(1465~1547)
(2)자(字)·별호(別號):자(字)는 윤승(允升), 호는 정암(整庵)이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3)출생지역:중국 강서성(江西省) 태화(泰和).
(4)주요활동과 생애
나흠순은 명대 중엽에 살았던 학자이다. 그의 조부는 향시를 거쳐 훈도를 지냈고, 부친도 역시 향시를 거쳐 국자감 조교를 지냈다. 19세에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22세에는 군시(郡試)·제학시(提學試)·순안어사시(巡按御史試)에 모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29세에 회시(會試)에 7등으로 합격하고 정시(廷試)에 제일갑(第一甲) 제삼명(第三名)으로 뽑혀 한림원(翰林院) 편수(編修)를 제수 받았다. 이후 남경국자감사업(南京國子監司業)으로 승진하여 좨주(祭酒) 장무(章懋)의 업무를 대신하였다. 얼마 뒤 환관 유근(劉瑾)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나 다시 복직되었다. 이후 남경태상소경(南京太常少卿), 남경이부우시랑(南京吏部右侍郞),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으로 승진하였다. 63세 때 예부상서와 이부상서에 연달아 발탁되었지만 능력 부족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양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관직을 그만두었으며, 8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십여 년 동안 독서궁리와 격물치지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5)주요저작:《곤지기(困知記)》(6권), 《정암존고(整庵存稿)》(20권), 《정암속고(整庵續稿)》(13권)가 있고, 《정의당전서(正誼堂全書)》에 《나정암집(羅整庵集)》(2권)이 수록되어 있다.
3. 서지사항 특징
《중용》 20장의 “혹은 태어나면서 알고, 혹은 배워서 알고, 혹은 애를 써서 알지만, 그 앎에 미쳐서는 똑같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라는 구절에서 이 책의 서명인 《곤지기(困知記)》가 유래하였다.
《곤지기》는 전 6권의 체제로 되어 있으며, 〈곤지기서(困知記序)〉, 〈곤지기 권상(困知記卷上)〉, 〈곤지기 권하(困知記卷下)〉, 〈곤지기 속권 상(困知記續卷上)〉, 〈곤지기 속권 하(困知記續卷下)〉, 〈곤지기 삼속(困知記三續)〉, 〈곤지기 사속(困知記四續)〉, 〈곤지기부록(困知記附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곤지기 권상〉과 〈곤지기 권하〉는 나흠순이 벼슬을 그만 둔 이듬해인 1528년 그의 나이 64세 때에 편차(編次)하였고, 〈곤지기 속권 상〉은 그의 나이 67세인 1531년에, 〈곤지기 속권 하〉는 69세인 1533년에 지었으며, 〈곤지기 삼속〉은 74세인 1538년에, 〈곤지기 사속〉은 그가 죽기 1년 전인 1546년 그의 나이 82세에 지었다. 그리하여 1546년의 자각본(自刻本)에 이르러 《곤지기》는 〈전기(前記)〉 2권‚ 〈속기(續記)〉 2권‚ 〈삼속(三續)〉 1권‚ 〈사속(四續)〉 1권‚ 〈부록(附錄)〉 1권으로 구성되었다.
4. 내용
《곤지기》는 나흠순이 일찍이 자신이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공부하여 깨달아서 심성(心性)의 참된 이치를 보았음을 스스로 서술한 내용이다. 대체적으로 주자학(朱子學)을 따르고 선학(禪學)과 양명학(陽明學)을 배격하였으나 일원기론(一元氣論)을 주장함으로써 주자학과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곤지기서〉에서는 나흠순 자신이 이 책을 짓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도심은 은미하다[道心惟微]”는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구절을 참다운 본체와 연관지어‚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구분이 분명한 뒤에야 대본(大本)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곤지기 권상〉·〈곤지기 권하〉는 각각 81장과 75장으로 되어 있는데, 권상에서는 “천하를 통틀고 고금에 걸쳐 하나의 기(氣)가 아닌 것이 없다. 천 가지 조리와 만 개의 단서가 어지럽게 뭉쳤다 흩어지더라도 끝내 어지러워지지 않는데, 그 소이연(所以然)은 알지 못하지만 그러함이 있는 것, 이것이 이른바 리(理)이다.”라고 하여 리의 독립적 실체성을 부정하고 주기론(主氣論) 또는 리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내세운다. 그리고 권하에서는 그가 어느 날 노승을 만나 “부처가 뜰 앞의 잣나무에 있다.”는 말을 듣고 황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성리의 형이상학적 진리가 아닌 심의 지각의 어떤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이후 격물궁리(格物窮理) 공부 끝에 심성(心性)의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술회하면서 강한 불교비판론을 전개한다.
〈속권 상〉과 〈속권 하〉는 각각 80장과 33장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리란 곧 기의 리[氣之理]로서 구체적인 개체 안에서만 보편적인 리를 볼 수 있다는 리일분수론(理一分殊論)을 전개한다. 〈삼속(三續)〉은 36장‚ 〈사속(四續)〉은 31장으로 되어 있는데, 〈삼속〉에서는 인욕(人欲)을 버리거나 막을 것을 주장하는 정주학(程朱學)의 금욕주의와 달리 욕구의 선천적 필연성을 인정하고 〈사속〉에서는 덕성을 높이고 마음을 보존하며 성을 기를 것을 주장한다. 〈부록〉은 왕양명에게 보내는 편지를 비롯하여 주로 사상적 문답이 담긴 편지글로 이뤄져 있다. 특히 부록의 〈여왕양명서(與王陽明書)〉에서는 왕양명의 격물치지론을 내면만 추구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사실 《곤지기》는 체계적인 저술이 아니라 앞뒤가 다른 336개의 단장들이 무질서하게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관된 근본정신이 있다고 나흠순은 말한다. 그것을 그는 이일분수(理一分殊)라고도 하고 인심도심(人心道心)의 구별이라고도 한다. 《곤지기》의 구조 역시 이일분수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근본정신이 일견 산만한 듯 보이는 《곤지기》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5. 가치와 영향
《곤지기》는 명대(明代) 중기 양명학이 풍미하던 때에 정주학 이론의 비판적 계승을 통해 선학(禪學)과 육왕심학(陸王心學)을 비판함으로써 이학(理學)의 우월성을 확보하고 정주학의 순수성을 지키는 위도(衛道)의 사명을 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당시 정주학의 리(理) 중심적 리기론을 기(氣) 중심의 리기론으로 변용시킴으로서 명청대(明淸代) 기철학이 성행하는 데 하나의 발단을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임계유(任繼愈)는 나흠순에 대해 왕양명 등의 주관유심주의를 비판하고, 후대의 유물주의자 왕부지(王夫之)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하였으며, 장대년(張岱年)은 《곤지기》가 객관유심주의인 정주학과 주관유심주의인 육왕학을 비판했다고 지적하였다.
중국과 달리 정주학이 강하게 유지된 조선의 유학자들도 이 책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곤지기》가 조선에 전래·수용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노수신(盧守愼)이 곤지기의 영향을 받아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1559)과 〈곤지기발(困知記跋)〉(1560)을 지은 것을 보면 대략 이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전후하여 이항(李恒), 노진(盧禛)으로부터 즉각적인 공격이 있었고, 이어서 논쟁이 확대되자 이황·기대승·김인후 같은 학자들이 나서서 힘써 변척하였으며, 윤주(尹澍)·남언경(南彦經)·김계(金啓) 등의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이기의 묘합을 강조하였던 이이(李珥)는 《곤지기》에 대하여 부분적으로는 비판하되 대체를 긍정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 책은 기호학파에 영향을 미쳤으며, 장현광(張顯光)·임성주(任聖周) 등의 학설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한원진(韓元震)의 〈나정암곤지기변(羅整菴困知記辨)〉을 거쳐 한말 이항로(李恒老)의 〈곤지기록의(困知記錄疑)〉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다.
또한 《곤지기》는 일본의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오까다 다께히꼬(岡田武彦), 야미노이 유(山井湧), 아베 요시오(阿部吉雄), 야마시따 류지(山下龍二) 등이 나흠순의 영향을 받았다.
6. 참고사항
(1)명언
• “공자께서 사람을 가르치심은 마음을 보존하고 성(性)을 기르는 일이 아님이 없다.[孔子敎人 莫非存心養性之事]” 〈권상(卷上) 1장〉
• “선학은 결국 일천하니, 만약 우리 도의 견해에서 다시 그 설을 취하여 자세히 연구해보면 털끝만큼도 달아날 곳이 없을 것이다.[禪學畢竟淺 若於吾道有見 復取其說而詳究之 毫髪無所逃矣]” 〈권하(卷下) 40장〉
• “이단의 설이 예로부터 있었지만 그 해 됨을 살펴보면 불씨보다 더 지나친 것은 없었다.[異端之說 自古有之 考其爲害 莫有過於佛氏者矣]” 〈속권 상(續卷上) 1장〉
• “인심과 도심의 구별은 다만 털끝만큼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人心道心之辨 只在毫釐之間]” 〈속권 하(續卷下) 1장〉
(2)색인어:나흠순(羅欽順), 나정암(羅整庵), 곤지기(困知記), 리(理), 기(氣), 리일분수(理一分殊).
(3)참고문헌
• 곤지기 해제(최중석, 한국철학사연구회)
• 곤지기 역주(최중석, 국학자료원)
• 곤지기(困知記)(최진덕, 한국철학윤리교육연구회)
• 〈羅整菴의 理一分殊의 哲學〉(崔眞德, 서강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 〈羅整菴의 氣哲學과 李朝儒學〉(劉明鍾, 《인문과학》3, 1973)
【함현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