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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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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말원초(宋末元初) 왕응린(王應麟)이 지은 학술 필기(筆記)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고증(考證)의 학문 방법을 창안하여 청대(淸代) 고증학의 선구가 되었다. 《몽계필담(夢溪筆談)》, 《용재수필(容齋隨筆)》과 함께 ‘송대 3대 고증학 필기’라 불린다.

2. 저자

(1) 성명:왕응린(王應麟)(1223~1296)
(2) 자(字)·별호(別號):자는 백후(伯厚), 호는 심녕거사(深寧居士)·후재(厚齋).
(3) 출생지역:경원부(慶元府) 은현(鄞縣)(현 중국 절강성(浙江省) 은현(鄞縣))
(4) 주요활동과 생애
왕응린은 남송(南宋) 이종(理宗) 순우(淳祐) 원년(1241), 19세의 나이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의 급제를 위해 계속해서 학문에 정진하였고 34세에 합격을 한다. 이후 태상시주부(太常寺主簿), 태주통판(台州通判), 비서감(秘書監), 중서사인(中書舍人), 휘주지주(徽州知主), 예부상서겸급사중(禮部尙書兼給事中)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송나라가 망하고 원(元)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출사하지 않고 고향에 은거하면서 20년 동안 저술에 종사하였다.
(5) 주요저작
《송사(宋史)》 〈왕응린전(王應麟傳)〉에 열거된 그의 저작은 모두 23종으로 700권에 이른다. 학자에 따라 33종의 저서가 있다고도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14종 뿐이다. 그의 저술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역정강성주(周易鄭康成注)》는 《주역(周易)》의 정현(鄭玄) 주를 정리한 것이다. 《시고(詩考)》는 제(齊)·노(魯)·한(韓) 삼가시(三家詩)의 일문(佚文)을 정리한 것이며, 《시지리고(詩地理考)》는 《시경》의 지리에 대한 연구서이다. 《육경천문편(六經天文編)》은 육경의 천문에 관한 자료를 수집한 것이며, 《한제고(漢制考)》는 한나라의 제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한 것이다. 《한서예문지고증(漢書藝文志考證)》은 반고(班固)의 《한서예문지》와 안사고(顔師古)의 주에 대한 보충이며,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은 《자치통감》 중 지명의 연혁에 대해 정리한 것이다. 《통감문답(通鑑問答)》은 역사 평론서이다. 《옥해(玉海)》는 왕응린이 박학굉사과를 준비하던 15년간의 공부를 정리한 백과사전식의 유서(類書)로 전체 2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이다. 천문(天文)·율헌(律憲)·지리(地理)·제학(帝學)·성문(聖文)·예문(藝文)·조령(詔令)·예의(禮儀)·거복(車服)·기용(器用)·교사(郊祀)·음악(音樂)·학교(學校)·선거(選擧)·관제(官制)·병제(兵制)·조공(朝貢)·궁실(宮室)·식화(食貨)·병첩(兵捷)·상부(祥符) 등의 21문(門)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그 하위에는 240여 개의 항목이 있다. 이에 대하여 《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 “학문을 깊고 넓게 두루 관통하였으니, 당송 시대의 여러 대형 유서 중 가장 뛰어나다.[其貫串奥博 唐宋諸大類書 未有能過之者]”라고 평가하였다.

3. 서지사항

《곤학기문(困學紀聞)》은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권8은 〈설경(說經)〉으로 역(易), 서(書), 시(詩),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대대예기(大戴禮記), 악(樂), 춘추(春秋), 좌씨전(左氏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논어(論語), 효경(孝經), 맹자(孟子), 소학(小學), 경설(經說)로 나뉘어 있다. 권9는 〈천도(天道)〉·〈역수(曆數)〉, 권10은 〈지리(地理)〉·〈제자(諸子)〉, 권11~권16은 〈고사(考史)〉, 권17~권19는 〈평시문(評詩文)〉, 권20은 〈잡지(雜識)〉이다.
책 앞에는 서명인 ‘곤학’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어려서는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았고 만년에는 나라가 망하는 어려움을 만났다. 나이는 늙었으나 촛불이라도 잡고 걸어가며 배움에 정진하려는 뜻을 흩뜨리지 않았다. 곤혹을 겪고서야 배운 것이지만 곤혹을 겪고도 배우지 않는 하등의 사람들과 달라질 수 있기를 바란다.[幼承義方 晚遭艱屯 炳燭之明 用志不分 困而學之 庶自別於下民]” ‘병촉지명(炳燭之明)’은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건본(建本)〉에서 나온 것이다. “젊어서의 배움은 막 떠오르는 태양과 같고, 장년이 되어 배우는 것은 한낮의 태양과 같으며 나이가 들어 배우는 것은 촛불을 들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아무것도 들지 않고 어두운 길을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少而好學 如日出之陽 壯而好學 如日中之光 老而好學 如秉燭之明 秉燭之明 熟與昧行乎]”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나이가 들어서도 배움에 정진하려는 뜻을 담은 것이다.
‘곤이학지(困而學之)’는 《논어(論語)》 〈계씨(季氏)〉에서 나온 것이다.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상급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고, 곤혹을 겪고 나서 배우는 사람은 또 그 다음이며, 곤혹을 겪고서도 배우지 않으면 하등의 사람이 된다.[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서명(書名)의 ‘곤학(困學)’은 이 ‘곤이학지(困而學之)’에서 유래한 것으로 왕응린은 자신이 나면서부터, 혹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곤혹을 겪은 후에야 배운 것이라는 겸손의 표현이다.
《곤학기문》은 원초(元初)에 완성되었으며 왕응린이 세상을 떠난 약 30년 후 지치(至治) 2년(1322)과 태정(泰定) 2년(1325)에 두 차레 간행되었다. 민국(民國) 시기의 사부총간본(四部叢刊本)은 태정 연간본을 재영인한 것으로 청대 주석가들도 이 판본에 근거하여 교감과 주석을 하였다. 현재 유통되는 판본 중 가장 완정한 교점본은 전교본(全校本) 《困學紀聞》(欒保羣·田松靑·呂宗力 校點, 上海古籍出版社, 2008)으로 옹원기(翁元圻)의 《곤학기문주(困學紀聞注)》를 저본으로 한 것이다.

4. 내용

《곤학기문》은 학술 필기이다. 《사고전서》에는 홍매(洪邁)의 《용재수필(容齋隨筆)》과 함께 자부(子部) 잡가류(雜家類) 잡고지속(雜考之屬)으로 분류되어 있다. 같은 학술 필기류이지만 《용재수필》이 시간적 순서대로 기록한 것을 그대로 엮었기 때문에 단편적이고 분류도 되어 있지 않은 것에 비해, 《곤학기문》은 체계적이며 ‘고증’에 집중되어 있다.
내용에 따라 분류가 되어 있는데 설경(說經) 8권, 천도·역수·지리·제자 2권, 고사(考史) 6권, 평시문(評詩文) 3권, 잡지(雜識)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하는 것은 역사에 관한 고증이다. 목차상 ‘고사(考史)’는 20권 중 6권에 불과하지만 경전 및 다른 권의 상당 분량도 역사와 연관된 내용이다. 왕응린은 유가 경전의 철학적 담론에 천착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내용의 진위를 고증하였다. 이는 청대 장학성(章學誠)이 주장한 ‘육경은 모두 역사[六經皆史]’라는 관점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사에서는 광범위한 자료의 섭렵과 대조를 통해 《사기(史記)》부터 북송(北宋) 시기에 편찬된 《신오대사(新五代史)》까지 역대 정사(正史) 중 내용의 진위, 오류, 연대, 지리, 관제(官制) 등을 고증하였다. 청대 고증사학의 3대 대표작인 왕명성(王鳴盛)의 《십칠사상각(十七史商榷)》, 전대흔의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조익(趙翼)의 《이십이사차기(卄二史箚記)》는 ‘고사’편의 체제와 형식을 계승한 것이다.

5. 가치와 영향

‘고증’이라는 용어는 왕응린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곤학기문》은 청대 고증학의 성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 염약거(閻若璩)의 《잠구차기(潛邱箚記)》, 전대흔(錢大昕)의 《십가재양신록(十駕齋養新錄)》 등 청대의 대표적 고증학 저술은 모두 《곤학기문》의 체제와 왕응린의 학문적 태도를 계승한 것이다. 때문에 양계초(梁啓超)는 《곤학기문》을 “청대고증학의 선도”라 하였다.
또한 염약거(閻若璩), 하작(何焯), 전대흔(錢大昕), 전조망(全祖望) 등 청대 학술을 대표하는 대가들이 계속해서 《곤학기문》에 주를 달았다는 점에서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염약거가 《곤학기문주(困學紀聞注)》를 지었고, 이후 하작이 염약거의 주를 보완하고 평어를 더한 것을 ‘이전본(二箋本)’이라 한다. 후에 전조망이 염약거와 하작의 주석과 평어를 보완한 것을 ‘삼전본(三箋本)’이라 한다. 이후 만희괴(萬希槐)가 삼전본에 다시 전대흔의 평교(評校)를 더하여 《곤학기문집증(困學紀聞集證)》을 지었다. 이 책에는 염약거, 하작, 전대흔, 전조망 4인과 원래 삼전본에 포함되어 있던 정요전(程瑤田), 도계서(屠繼序) 2인, 그리고 만희괴 모두 7인의 해석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칠전본(七箋本)’이라 한다. 청대의 다수 저명 학자들이 《곤학기문》을 학문의 종주로 삼고, 주와 평어를 달았다는 점에서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이후 옹원기(翁元圻)는 7인의 주석을 종합하고 자신의 견해를 보충하여 《옹주곤학기문(翁註困學紀聞)》을 지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왕후재 선생의 〈곤학기문〉은 만년의 저술이다. 선생은 많은 서적을 두루 통달하였는데 원나라가 들어선 후 영파(寧波)에 칩거하였다. 거의 30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면서 선유들의 학설을 깊이 연구하고 통달하였으니 한당(漢唐)의 학문의 핵심을 얻었고 송나라 학문의 순수성을 얻었다. 일설만을 주장하지 않고 일가를 표방하지 않았으며 여러 유자들의 중요한 성과를 모두 수집하였다. 인용한 것을 보면 광범위한데 그 본원을 찾기가 어렵다. 염약거(閻若璩), 하작(何焯), 전조망(全祖望) 세 분의 심원하고 고아한 학문으로도 그 출처를 다 밝혀낼 수 없었으니 송나라 사람들의 저작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王厚齋先生紀聞一書 蓋晩年所著也 先生博極羣書 入元後 寓居甬上 足迹不下樓者幾三十年 益沈潛先儒之說而貫通之 於漢唐則取其核 於兩宋則取其純 不主一說 不名一家 而實集諸儒之大成 顧徵引浩博 猝難探其本源 雖以閻潛丘 何義門 全謝山三先生之淵雅 尙未盡詳其出處 蓋由宋人著述不能盡傳故也]” 〈곤학기문(困學紀聞) 옹원기자서(翁元圻自序)〉
‧ “왕응린은 학문이 해박하고 견문이 풍부하여 송대(宋代)에 그와 견줄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비록 그의 학문적 연원도 주자에게서 나온 것이었으나 책 가운데 주자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 여러 대목이다. 예를 들어 《논어주(論語注)》에서 ‘불사주야(不舍晝夜)’의 ‘사(舍)’자 음에 대해, 《맹자주(孟子註)》에서 ‘조교(曹交)가 조나라 임금[曹君]의 아우’라고 한 것과 《대대례기(大戴禮記)》의 주를 정현(鄭玄)이 달았다고 한 것에 대해 모두 시비를 고증하였으며 맹목적으로 편들지 않았다.……한당(漢唐) 시기 유학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근거가 있으므로 공허한 말로 터무니없이 비난할 수 없으며, 정호(程顥)‧정이(程頤)와 주자 등 송대 유학자들 또한 모두 심득(心得)이 없지 않으니 일괄적으로 얕은 식견이라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두 가지를 모두 겸하여 수용하였으며, 같으면 무리가 되고 다르면 공격하는 사사로움이 전혀 없었다.[應麟博洽多聞 在宋代罕其倫比 雖淵源亦出朱子 然書中辨正朱子語誤數條 如論語注不舍晝夜舍字之音 孟子註曹交曹君之弟及謂大戴禮爲鄭康成註之類 皆考證是非 不相阿附……能知漢唐諸儒本本原原 具有根柢 未可妄詆以空言 又能知洛閩諸儒亦非全無心得 未可槪視爲弇陋 故能兼收幷取 絶無黨同伐異之私]”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곤학기문(困學紀聞)〉
(2) 색인어:왕응린(王應麟), 곤학기문(困學紀聞), 학술필기(學術筆記), 차기(箚記), 고증(考證), 고증학(考證學)
(3) 참고문헌
‧ 全校本 困學紀聞(欒保羣·田松靑·呂宗力 校點, 上海古籍出版社)
‧ 王應麟學術思想研究(馬麗麗, 중국 南開大學 박사논문)
‧ 王應麟(1223~1296)의 『困學紀聞』과 淸代 考據學(이범학, 한국학논총)
‧ 〈왕응린 《곤학기문》의 考據學적 성격-‘考史’편을 중심으로 하여-〉(이범학, 한국학논총)
‧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벤저민 엘먼 지음, 양휘웅 옮김, 예문서원)

【안예선】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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