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맹자(孟子)》는 전국시대 유가인 맹가(孟軻)가 당시의 제후, 제자, 사람들과 나눈 대화와 주장을 담은 책이다. 《맹자》는 애초 경서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니었으나 당나라 이후 점차 중요시되다가 송대 주희에 이르러 사서(四書)로 편입되면서 경서에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맹자의 주장은 공자의 사상을 계승함과 동시에 더욱 심화된 형태로 발전시켰으며, 이는 후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침으로써 동아시아 사상의 한 원형으로 기능하였다.
2. 저자
(1)성명:맹가(孟軻)(B.C. 372?~B.C. 289?)
(2)자(字)·별호(別號):자는 자거(子車) 또는 자여(子輿).
(3)출생지역:전국시대 추(鄒)나라
(4)주요활동과 생애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훈도를 받으며 자랐다. 《열녀전》에는 맹자 어머니의 교육열을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일화로 소개하고 있다. 한편 《사기(史記)》에서는 맹자가 자사(子思)의 문인에게 수업을 받았다고 하였다. 맹자는 40여 세 전후에 학문을 이룬 후, 제자들을 가르침과 동시에 제후들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맹자는 추(鄒)나라 출신이었기에 처음에 추나라 목공(穆公)을 알현하고, 이후 제(齊)·송(宋)·등(滕)·노(魯)·위(魏)나라 등을 주유하면서 유가의 이념을 설파하였다. 제나라에서 경(卿)의 지위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등나라에 초빙되기도 하였으나 끝내 자신의 도를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당시의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제후들이 맹자의 인의(仁義)와 왕도(王道)를 지향하는 학설을 우원(迂遠)하고 실정에 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고국인 추나라로 돌아와서 84세로 생을 마쳤다.
3. 서지사항
《맹자》는 맹자의 자작인지 아니면 맹자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인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 등이 맹자의 말을 모아 《맹자》를 편찬한 것인지에 대하여 엇갈린 논의들이 있다. 한편 주희는 “《논어》는 대부분 공자 문하의 제자들의 기록을 모았기에, 경문의 언어의 장단(長短)이 같지 않은 곳이 많다. 이에 비해 《맹자》는 맹자의 자작에 대한 의심이 있기는 하지만, 경문의 문자가 수미일관하여 하자가 없다. 때문에 맹자가 친히 지은 것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그 기록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매우 고명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여, 맹자 자작설과 문인 편저설을 동시에 제시하였다. 그러나 주희의 이 두 주장 중에서 후자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맹자》 경문에서 ‘맹자’라고 칭하거나 제후들의 시호가 보이는 점 등으로 보아, 맹자 사후 문인 중의 고제(高弟)가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맹자》가 세상에 등장한 이후, 곧바로 경서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다. 《한서》 〈예문지〉에는 《맹자》가 〈제자략(諸子略)〉에 수록되어 있으며, 한대(漢代) 이후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기까지도 《맹자》의 이러한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수서》 〈경적지〉와 《당서》 〈예문지〉에 모두 《맹자》를 자부(子部)에 소속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송에 이르러 맹자는 자못 중시되었다. 북송의 저명학자이자 정치가인 왕안석(王安石)은 《맹자해(孟子解)》를 지었으며, 성리학자인 정이천, 장횡거 등도 《맹자》를 표창하였다. 한편 남송의 주희는 정이천의 학설을 계승하여 맹자를 공자의 계승자로 평가함과 동시에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맹자》에 주석을 달고 이를 《사서집주》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맹자》의 지위는 극상승하여 정식으로 제자서(諸子書)에서 벗어나 경서의 반열에 올랐다.
4. 내용
《맹자》는 〈양혜왕〉, 〈공손추〉, 〈등문공〉, 〈이루〉, 〈만장〉, 〈진심〉, 〈고자〉 등 7편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상의 7편은 매편마다 상하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결국 맹자는 1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7편을 상하로 분할하여 14편으로 편집한 것은, 한나라 때 맹자의 주석을 저술한 조기(趙岐)에 의해서이다. 주희가 평가하였듯이, 맹자의 사상은 흔히 공자를 이은 것이라 한다. 이러한 평가에 걸맞게 후대에서는 공맹(孔孟)이라 병칭하기도 한다. 분명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심화계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자가 말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여 후대 유가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는데, 주로 심성론·정치론·경제론 부분에서 돋보인다.
심성론에서 맹자는 사단(四端)을 주장하여 인간의 본성에 관한 유가 이론의 원형을 제시하였으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주장하여 유가의 심성수양론의 원천을 제공하였다. 또한 정치론 분야에서는 최초로 동양정치사에서 매우 민감한 정치적 주장을 내놓았다. 일찍이 공자는 정치에 있어서 백성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이는 민본(民本)을 중시하는 유가의 정치적 이념의 원형을 제시한 것이지만, 위정자가 백성을 중시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서 공자는 답을 회피하였다. 맹자는 공자의 이 정치론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다. 맹자는 이런 위정자는 내쳐야 된다고 극언하였다. 이른바 혁명론(革命論)인 것이다. 맹자의 이러한 정치적 이념은 전제군주국가인 동아시아의 중세 사회에서 항상 군주권(君主權)에 대한 제동 장치의 역할을 하였다. 한편 경제론 분야에서 맹자는 정전제(井田制)를 제시하였는데, 이 주장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의 개혁 논의에 단골 메뉴로 등장할 정도로 그 영향이 지대하였다.
5. 가치와 영향
《맹자》의 인성론과 정치론, 경제론은 유가의 전통 하에 있으면서도 전인미발의 주장이 담겨있다. 종래 유가의 전통과 연속과 단절의 지점에 위치한 맹자의 사상은 주희가 《사서집주》를 통해 주석을 달고 그 지위를 높인 이래 동아시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불가의 심성론에 대적할 유가 심성론의 근원을 《맹자》에서 찾아 구축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명학적 지향을 보이는 유학자들의 경우도, 그들 사상의 근원을 《맹자》에서 찾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는 동아시아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주자학과 양명학의 근원에 《맹자》가 한 축으로 작용하였음을 의미한다.
한편 조선 실학파의 거장인 다산 정약용이 주장한 정치론·경제론·인성론에도 《맹자》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맹자의 방벌론(放伐論)은 〈탕론(湯論)〉으로 계승되었으며, 《맹자》에 실려 있는 정전제와 사단론도 다산의 경제론과 인성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보면 송대 이래 유학이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맹자》는 핵심적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의 새로운 유학사조인 실학을 구축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일정한 직업이 없으면서도 일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직 선비만이 가능한 것이요, 백성의 경우 일정한 직업이 없으면 인하여 일정한 마음이 없어진다.[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 〈양혜왕 상(梁惠王上)〉
•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공손추 하(公孫丑下)〉
•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이 사람에게 내리려 하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게 하며, 그 근골(筋骨)을 수고롭게 하며, 그 체부(體膚)를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궁핍하게 하여, 행함에 그 하는 바를 어지럽게 하니, 이것은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 잘하지 못한 바를 증익(增益)해주고자 해서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고자 하(告子下)〉
(2)색인어:인의(仁義), 왕도(王道), 호연지기(浩然之氣), 사단(四端), 방벌(放伐).
(3)참고문헌
• 국역 孟子(유교문화연구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역주 茶山 孟子要義(이지형 譯, 현대실학사)
• 현토완역 맹자집주(성백효 역, 전통문화연구회)
• 맹자(동양고전연구회, 민음사)
• 孟子正義(焦循, 中華書局)
• 漢文大系(富山房編輯部, 富山房)
• 新釋 孟子全講(宇野精一, 學燈社)
• 標點本 十三經注疏(십삼경주소 정리위원회, 北京大學出版社)
• 十三經注疏 附校勘記(阮元, 藝文印書館)
【이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