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는 송(宋)의 저명한 시인이자 산문가인 육유(陸游)가 지은 필기집(筆記集)이다. 이 책은 전 10권으로, 역사, 지리, 정치, 제도, 문화, 문학, 예술 등,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특히 송대를 연구하는 데에 진귀한 자료를 제공한다. 필치가 간결하고 유려하다. 송대의 필기문(筆記文) 중에서 뛰어난 저작의 하나로 꼽힌다.
2. 저자
(1) 성명: 육유(陸游)(1125~1210).
(2) 자(字)·별호(別號):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
(3) 출생지역:월주(越州) 산음(山陰)(현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4) 주요활동과 생애
육유는 남송(南宋)의 대표적인 문학가로, 시인이자 사인(詞人), 산문가 중의 한 사람이며 역사서(歷史書)도 남겼다. 세 살(1127) 때 북송(北宋)이 금(金)에 의해 망하고 남송이 뒤를 이었다. 30세(1154년) 때, 예부(禮部)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도 주화파(主和派)인 재상 진회(秦檜)에 의해 낙방을 당했다. 효종(孝宗)이 즉위한 뒤 진사출신(進士出身)을 하사받고, 1158년(34세), 복주(福州) 영덕현(寧德縣) 주부(主簿)로 임명을 받아 벼슬길에 진출하였다. 칙령소산정관(勅令所刪定官), 진강(鎭江) 통판(通判), 융흥(隆興) 통판(通判) 등을 거쳐 1170년(46세), 기주(夔州) 통판(通判)이 되었고, 1172년(48세), 사천선무사(四川宣撫使) 왕염(王炎)의 초청을 받아 남정(南鄭)에 갔으며, 곧이어 성도(成都)로 갔다. 이후, 촉주(蜀州)와 가주(嘉州), 영주(榮州), 건안(建安), 무주(撫州), 엄주(嚴州) 등지에서 벼슬을 하였다. 1189년(65세), 실록원검토관(實錄院檢討官)으로 있다가, 11월, 산음에 돌아갔다. 이후, 잠시 사서(史書) 편찬에 참여한 것 외에는, 18년 동안 고향에서 지냈다. 가정(嘉定) 3년(1210년) 1월 26일(음력 1209년 12월 29일),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5) 주요 저작:육유의 저작은 《검남시고(劍南詩稿)》, 《위남문집(渭南文集)》, 《방옹사(放翁詞)》, 《입촉기(入蜀記)》, 《남당서(南唐書)》, 《노학암필기》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특징
《노학암필기》는 육유가 만년에 고향 산음에 돌아가서 지낼 때 지은 것이다. 산음의 경호(鏡湖) 주변의 대나무 숲 속에 초가집을 두 칸 짓고 이름을 ‘노학암(老學庵)’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사광(師曠)의 말과 관련이 있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의하면, 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의 평공(平公)이 악사(樂士) 사광에게 묻기를, 자신의 나이가 70인데 더 배우고 싶지만 너무 늦지 않았는지 걱정이 된다고 하자, 사광이 말하길, “어려서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과 같고,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중천에 떠 있는 햇빛과 같으며, 늙어서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밝은 촛불을 들고 있는 것과 같다.”고 들었는데, 밝은 촛불을 들고 가는 것과 캄캄한 밤길을 그냥 가는 것은 어느 쪽이 더 좋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육유는 〈노학암(老學庵)〉시 주(注)에서, 늙어서도 배우는 것은 촛불을 들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한 사광의 말을 따와서 서재의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다.
《노학암필기》를 지은 시기는 순희(淳熙) 16년(1189)에서 소희(紹熙) 5년(1194)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육유 생전에는 간행되지 않았으며, 이종(理宗) 소정(紹定) 원년(1228)에 아들 육자휼(陸子遹)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모두 10권이었다. 현재에는 《노학암속필기(老學庵續筆記)》 한 권과 일문(逸文) 3조(條)가 전해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진위(眞僞)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4. 내용
《노학암필기》는 육유가 직접 경험하고 보고 들은 일을 비롯하여 책을 읽고 가진 생각 등을 적었는데, 내용이 상당히 광범위하여, 역사, 지리, 현실 정치, 인물의 일화(逸話), 전장제도(典章制度), 민간의 풍속, 기이(奇異)한 전설(傳說), 종교 신앙, 공예(工藝), 의약(醫藥), 문학과 예술, 문자와 음운(音韻)∙훈고(訓詁), 시론(詩論), 시문(詩文)의 고정(考訂)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이러한 다양한 내용을 길고 짧은 편폭으로 나타내며 형식의 구애를 받음이 없이 행문(行文)은 자유롭고 필치는 간결한 맛을 보여, 송대 필기문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5. 가치와 영향
《노학암필기》는 송대 필기문의 대표적인 저작 중의 하나로 내용이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송대의 정치, 역사, 문화, 학술, 문학 등을 연구하는 데에 참고할만한 여러 자료들을 보존하여 그 가치가 비교적 높다. 《송사(宋史)》, 《요사(遼史)》 등의 사서(史書)나 명(明), 청대(淸代)의 지방지(地方誌)에서 자주 언급 혹은 인용이 되며, 후세의 지리류(地理類) 서적에 대해서도 영향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촉(蜀) 땅의 사람 임자연(任子淵)은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선무부사(宣撫副司) 정강중(鄭剛中)이 촉 땅에서 부름을 받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사실은 진회(秦檜)가 그를 해치려고 그런 것이었다. 정공(鄭公)은 촉 땅을 다스리면서 혜정(惠政)을 베풀었기에 사람들은 그래도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는데 며칠이 지나 진회가 그를 탄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사람들마다 크게 탄식을 하였다.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말하길 “정공은 못 돌아오겠네.”라고 하자, 임자연이 대꾸하기를 “진씨는 박정하잖소.”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과감하게 말을 했다고 칭찬했다. [蜀人任子淵好謔 鄭宣撫剛中自蜀召歸 其實秦檜之欲害之也 鄭公治蜀有惠政 人猶覬其復來 數日乃聞秦氏之指 人人太息. 衆中或曰 鄭不來矣 子淵對曰 秦少恩哉 人稱其敢言] (권2)
• 전등(田登)은 군수(郡守)가 되자 자신의 이름 ‘등(登)’자와 발음이 같은 말을 피하여 사용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이것을 어기면 반드시 화를 내었는데, 관리나 병졸 중에 매질을 당하거나 볼기를 맞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온 주(州)의 사람들이 모두 ‘등(燈)’을 ‘화(火)’라고 불렀다. 정원 대보름날에는 등불을 밝히는데, 관청에서는 사람들이 주의 관할 지역에 들어와 노닐며 구경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에 관리가 공고문을 써서 저자 거리에 내걸면서, “우리 주(州)에서는 관례에 따라 3일간 방화(放火)한다.”라고 적었다. [田登作郡 自諱其名 觸者必怒 吏卒多被榜笞 於是擧州皆謂燈爲火 上元放燈 許人入州治遊觀 吏人遂書榜揭於市曰 本州依例放火三日] (권5)
• 내가 남정(南鄭)에 있을 때, 서쪽 변방의 풍속에서는 아버지를 ‘노자(老子)’라고 부르며, 비록 나이가 열일곱, 열여덟 살일지라도 자식이 있으면 역시 ‘노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 이에 서하(西夏) 사람들이 ‘대범노자(大范老子)’, ‘소범노자(小范老子)’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그 사람을 존경하여서 아버지같이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염(建炎) 초에 종여림(宗汝霖)이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있을 때, 그에게 항복하여 복속한 도적 무리 백 여 만 명이 모두 종여림을 ‘종야야(宗爺爺)’라고 불렀는데 대체로 이것과 비슷한 것이다. [予在南鄭 見西郵俚俗謂父曰老子 雖年十七八 有子亦稱老子 乃悟西人所謂大范老子小范老子 蓋尊之以爲父也 建炎初 宗汝霖留守東京 群盜降附者百餘萬 皆謂汝霖曰宗爺爺 蓋此比也] (권1)
(2) 색인어:육유(陸游),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 송대(宋代), 필기문(筆記文)
(3) 참고문헌
• 老學庵筆記(陸游, 中華書局)
• 老學庵續筆記(陸游, 中華書局)
• 老學庵筆記(陸游, 世界書局)
• 老學庵筆記(李劍雄,劉德權 點校, 中華書局)
• 老學庵筆記(楊立英 校注, 三秦出版社)
• 陸游全集校注(錢仲聯, 馬亞中 主編, 浙江教育出版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