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농정전서(農政全書)》는 명말(明末)의 경세가 서광계(徐光啓)가 저술한 종합 농서로 그의 사후 6년 후인 숭정(崇禎) 12년(1639), 문인 진자룡(陳子龍) 등의 정리·산증(刪增)을 거쳐 간행되었다. 전편 12목 60권에 걸쳐 농정(農政)과 농업기술에 대해 광범위한 자료수집 및 해석을 덧붙인 농서의 백과전서이다. 명말에 전래된 서양의 수리(水利) 기술도 포함되어 있다.
2. 저자
(1)성명:서광계(徐光啓)(1592~1633)
(2)자(字)·별호(別號):자는 자선(子先), 호는 현호(玄扈), 세례명은 바오로(保祿), 시호는 문정(文定).
(3)출생지역:상해시(上海市) 서가회(徐家匯)
(4)주요활동 및 생애
서광계는 만력(萬曆) 31년(1603) 남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로차(羅如望)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1604년 진사 급제하고, 한림원 서길사(庶吉士)에 임명된 후 마테오 리치(利瑪竇)와 함께 유클리드 《원론》 전(前) 6권(卷)을 한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을 간행하였고, 같은 해 역시 리치와 함께 실용기하학서 《측량법의(測量法義)》를 번역했다. 리치 사후, 같은 예수회 선교사 우르시스(熊三拔)와 함께 서양 천문학서 《간평의설(簡平儀說)》과 서양 농업기술서 《태서수법(泰西水法)》을 한역하였다. 1626년부터 명의 역법인 대통력(大統曆)의 불비(不備)를 보완하고자 서양천문학에 의한 개력사업을 추진하여 선교사 자코모 로(羅雅谷), 테렌츠(鄧玉函), 아담 샬(湯若望) 등과 함께 티코 브라헤의 천문학 체계를 도입하여 《숭정역서(崇禎曆書)》 137권을 간행했다. 이 때 서광계에 의해 주창된 서법(西法) 개력의 구호인 ‘서양의 재질을 녹여 (중국의 역법인) 대통의 틀에 넣는다.[鎔彼方之材質 入大統之型模]’라는 ‘중서회통(中西會通)’의 논리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서학(西學) 수용의 기본 패러다임으로 기능하였다.
서광계는 예부상서(禮部尙書) 겸 대학사(大學士)를 역임하였고 명말 관직이 가장 높은 개종자였다. 그는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에 대한 최대의 보호자(명말 천주교 삼주석(三柱石)의 한사람)로서 마테오 리치가 주창한 선교방침인 ‘기독교를 통해 유교를 보완’한다는 ‘보유론(補儒論)’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이러한 제교혼합적(諸敎混合的) 성격은 명말의 양명학(陽明學)자에게 잘 나타나는데, 대표적 인물의 하나인 초횡(焦竑)은 서광계가 향시에 응시하였을 때 주고관(主考官)이었고 서광계를 직접 발탁한 인물이다. 명말의 사상운동은 동림당(東林黨)과 복사(復社)에서 드러나듯 흔히 육왕심학(陸王心學)의 공소함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지만 서광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서광계 본인 또한 복사의 흐름을 잇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그의 경세치용사상은 실용을 중시하며 특히 농업을 국가부강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의 평생의 학문이 천산학(天算學), 농학, 병학으로 대표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부친 거상(居喪) 기간 중 그는 상해에서 집에 작은 농원을 만들어 당시 민월(閩粵)지방에서만 심던 고구마와 추운 지방이 원산인 순무의 이종(移種)에 성공하고 《감저소(甘薯疏)》·《무청소(蕪菁疏)》를 저술하였다. 만력 41년~44년(1613~1616)에는 천진(天津)에서 둔전(屯田)하였고, 이후 만력 45년(1617)에서 천계(天啓) 원년(1621) 기간 중 두 차례 천진에서 수도(水稻) 경작에 종사하여, 《북경록(北耕錄)》·《의간령(宜墾令)》 등을 지었다. 엄당(閹黨) 위충현(魏忠賢) 일파에 의해 정국이 좌우되던 천계 4년(1624)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 겸 시독학사(侍讀學士)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숭정 원년(1628) 원직에 복귀할 때까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황정(荒政)을 포함하여 대형 농서의 정리, 편찬 작업에 종사하였다. 초기에는 이 농서를 《종예서(種藝書)》라고 명명하였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하였다.
(5)주요저작:《모시육첩강의(毛詩六帖講意)》, 《영언여작(靈言蠡勺)》, 《기하원본(幾何原本)》, 《측량법의(測量法義)》, 《정법평방산술(定法平方算術)》, 《간평의설(簡平儀說)》, 《태서수법(泰西水法)》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서광계의 사후 그의 문인인 진자룡(陳子龍) 등이 유고를 정리, 수정(10% 삭제, 20~30% 증가)을 거쳐 숭정 12년(1639) 《농정전서(農政全書)》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전편 12목, 60권, 50여 만자, 인용서목 225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각본(原刻本)은 평로당(平露堂)본으로 현존한다. 이외에도 귀주(貴州) 각본(刻本), 무술(戊戌) 각본, 서해루(曙海樓) 각본 등의 판본 등이 존재한다. 평로당(平露堂) 원각본(原刻本)에는 장국유(張國維), 방악공(方岳貢), 왕대헌(王大憲), 주일경(周一敬), 장부(張溥)의 서문이 있다.
주요한 특징은 《제민요술(齊民要術)》 등 기타 농서가 주로 농업기술에 치중한 것과는 달리 《농정전서》라는 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농업기술뿐만 아니라 개간, 수리, 황정을 다루는 농정(農政)을 대폭 포함하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황정의 경우 《제민요술》에서 12종의 구황식물을 다룬 것과는 달리 독립된 목(目)으로 발전시켜 전체 18권의 분량을 점하고, 수리의 경우도 전 9권으로 농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는다. 이는 서광계의 정책목표가 단순한 구황책을 넘어 남방의 농작물을 매년 북방으로 대량 조달해야 하는[南糧北調] 현실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북방의 황지를 개간하는 데 있음을 잘 보여준다. 북방의 개간, 둔전을 위해서는 수리(水利)의 정비가 필수임은 물론이고 또 농작물의 이종 가능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런데 중국의 농업 이론의 지리(地利)적인 ‘풍토론’은 이러한 지역 간 이종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능하였다. ‘풍토론’은 작물의 환경적 조건을 규명하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12분야, 오행설 등과 깊이 관련된 선험적 분류법에 가깝기 때문이다. 서광계는 이를 비판하여 작물의 지역적 제약은 기온·기후 등 천기(天氣)에만 관련되고 땅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여, 땅을 지구 보편적 존재로 여겨 천후의 조건에 맞추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어떤 작물도 이종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고구마와 순무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천주교도인 그가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 포도를 심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한편 수리목의 권19, 권20은 《태서수법》을 그대로 실었는데, 《태서수법》은 서양 농업기술서로 아르키메데스 스크류 등 서양의 양수 기법을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하였다.
4. 내용
전체 12목으로 농본(農本), 전제(田制), 농사(農事), 수리(水利), 농기(農器), 수예(樹藝), 잠상(蠶桑), 잠상광류(蠶桑廣類), 종식(種植), 목양(牧養), 제조(製造), 황정(荒政)으로 구성되어 있다.
농본은 농업이 입국의 근본임을 경사(經史)의 전고를 인용하여 논술한 것이고, 전제는 정전제 등의 제도를 고증하고 이에 관한 입론을 서술한 것이다. 농사는 토지 둔간(屯墾)과 계절과 기후 조건 등을 논의하였고, 수리는 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수리 건설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더불어 서양의 수리 방법과 기계에 대해서도 소개하였다. 농기는 경작, 파종, 수확 및 가공에 쓰이는 농구를 소개하였다. 수예는 농작물과 과수의 재배 기술을, 잠상은 뽕나무 재배와 양잠 기술을, 잠상광류는 주로 면, 마, 칡 등 섬유 작물의 재배와 가공 기술을, 종식은 경제림과 특목 작물, 약용 작물의 재배 기술을 다루었다. 목양은 가금과 가축, 어류, 양봉에 대한 관리 및 수의학 지식을 논의하였다. 제조는 농산품의 저장 및 가공 등 일상 생활과 관련한 상식을 서술하였다. 황정은 역사적인 구황 정책을 검토하고 각종 구황책의 득실을 논의한 후 구황 작물을 소개하였다.
5. 가치와 영향
《농정전서》는 중국의 전통 농업기술을 집대성하였을 뿐 아니라 개간, 수리, 황정으로 대표되는 농정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땅에 대한 보편주의적 인식에 기반하여 지리적 ‘풍토론’을 극복한 점에서 새로운 종자의 도입, 신품종의 개발 등을 사유한 획기적 저작이다. 또한 서양의 농업기술을 적극 수용하여 서광계 자신의 주장인 ‘중서회통(中西會通)’을 실천하였다.
조선의 경우 정조 시기 권농책의 일환으로 서명응이 조선의 농서인 《농사직설(農事直說)》과 서광계의 《농정전서》를 합권하여 《동방농서집성》을 편찬하였고, 이후 실학자를 중심으로 구황책 등의 내용을 조선의 실정에 맞춰 적용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이러한 인물로는 서호수(徐浩修), 서유구(徐有榘), 최한기(崔漢綺) 등을 들 수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수리는 농사의 근본이다. 물이 없으면 밭도 없다.[水利者 農之本也 無水則無田矣]” 〈범례(凡例)〉
• “만약 수예(樹藝)에 진력한다면 〈이종이〉 불가능한 경우란 없다.[果若盡力樹藝 殆無不可宜者]” 〈농본(農本)〉
• “춥고 더움이 서로 다름은 천기가 다하는 바이고 땅과는 무관하다.[寒暖相違 天氣所絶 無關於地] 〈농본(農本)〉
(2)색인어:서광계(徐光啓), 중서회통(中西會通), 보편주의(普遍主義), 풍토론(風土論), 농정(農政), 실학(實學), 서학(西學).
(3)참고문헌
• 中國科學技術典籍通彙 農學卷(河南敎育出版社)
• 中國科學技術史 農學卷(盧嘉錫總主編, 科學出版社)
• 中國古代科學技術史綱 農學卷(路甬祥總主編, 遼寧敎育出版社)
• 徐光啓全集(上海古籍出版社)
• 徐光啓傳(羅光, 傳記文學出版社)
【안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