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맹자정의(孟子正義)》는 청대(淸代)의 경학자(經學者) 초순(焦循)이 찬(撰)한 《맹자》의 주석서이다. 후한의 경학자 조기(趙岐(108~208))의 《맹자주(孟子注)》를 저본(底本)으로 하고 선유(先儒) 60여 가(家)의 설을 참작하여 설명하였다. 청유(淸儒) 정요전(程瑤田)의 《논학소기(論學小記)》와 대진(戴震)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을 인용한 것이 가장 많고, 자신의 견해나 평론, 고증 등은 인용문 사이에 ‘안(按)’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구분하고 있다. 또한 아들 초정호(焦廷琥)의 의견이 6곳에서 기록되어 있다. 청유(淸儒)의 《맹자》 주석서 가운데 가장 완벽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30권.
2. 저자
(1) 성명:초순(焦循(1763~1820))
(2) 자(字)・별호(別號):자는 이당(理堂)이고, 또 이당(里堂)으로도 쓴다. 만년의 호(晩號)는 이당노인(里堂老人)으로서 초순이 45세가 되던 해부터 자칭(自稱)한 호이다.
(3) 출생지역:강소(江蘇) 양주부(揚州府) 감천현(甘泉縣) 황각교진(黃珏橋鎭(현 강소성(江蘇省) 한강현(邗江縣) 황각교진(黃珏橋鎭))) 청대(淸代)의 감천현(甘泉縣)은 강도현(江都縣)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고 두 현 모두 당시의 양주부(揚州府)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초순의 본적지는 양주(揚州), 강도(江都), 감천(甘泉)의 세 곳으로 말해진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초순은 증조(曾祖) 초원(焦源)과 조부(祖父) 초경(焦鏡), 그리고 부친(父親) 초총(焦葱)이 모두 《역(易)》에 정통(精通)하였던 ‘삼세전역(三世傳《易》)’의 서향문제(書香門第) 출신으로서 건륭(乾隆) 28년(1763) 3월 17일에 태어나서 가경(嘉慶) 25년(1820) 9월 4일 향년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적모(嫡母)는 사유인(謝孺人)이고, 친모(親母)는 은유인(殷孺人)이다.
초순은 건가(乾嘉)(건륭(乾隆)・가경(嘉慶)) 학술 정성기(鼎盛期)의 양주학파(揚州學派)를 대표하는 중요 인물이다. 역학(易學)・경학(經學)・수학[算學]・희곡 이론 등으로 장강(長江) 남북에 명성을 날렸고, 전대흔(錢大昕)・왕명성(王鳴盛)・정요전(程瑤田) 등 선배 홍유(鴻儒) 모두가 존경하여 추대하였다. 천문 계산에 능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이예(李銳)・능정감(凌廷堪)과 함께 ‘하늘을 재는 세 벗[談天三友]’으로 불렸고, 경학에서는 강번(江藩)과 ‘이당(二堂)’으로 병칭되었으며, 약관(弱冠)이후 완원(阮元)과 제명(齊名)되었다. 완원은 또 전대흔(錢大昕)과 함께 ‘통유(通儒)’로 추대하였다. 가경(嘉慶) 6년(1801) 39세 때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으나 예부(禮部)의 회시(會試)에서 낙방한 40세 이후에는 벼슬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친모인 은유인을 시봉(侍奉)하면서 포의(布衣)로 늙었고, 친모 은유인이 과세(過歲(가경 10년(1805, 43세)))한 이후 가경 14년(1809, 47세)에 5무(畝)의 땅을 사서 장서루(藏書樓)인 ‘조고루(雕菰樓)’를 짓고 “10여 년 동안 성시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을 정도[足不入城市者十餘年]”로 깊이 은거(隱居)하면서 독서(讀書)와 수관교학(授館教學), 저서입언(著書立言)에 전념하였다. 초순 평생의 저술은 경학(經學)・수학(數學)・사학(史學)・지리(地理)・고건축(古建築)・박물(博物)・문자(文字)・음운(音韻)・의학(醫學)・희곡(戱曲) 이론 등의 분야에 이르는 48종 300여 권이다. 그 가운데 《조고루역학삼서(雕菰樓易學三書)》와 《맹자정의(孟子正義)》가 가장 유행하여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초순은 총영(聰穎)하여 3세 때 ‘재(栽)’와 ‘재(裁)’ 두 글자를 식별할 수 있었고, 건륭(乾隆) 35년(1770) 8세 때 공도교(公道橋) 완씨가(阮氏家)에 놀러 가서 굴원(屈原) 《초사(楚辭)》를 학습했을 때 얻은 지식을 운용하여 빈객들과 ‘풍이(馮夷)’ 두 글자의 독음을 변별(辨別)할 수 있었다. 완승훈(阮承勛)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서 후일(초순 18세 때) 딸을 시집보냈다.
초순은 학문 연구 역정에서 수학(산학(算學), 천문학을 망라함)으로부터 《역》학에 이르렀으며 《역》의 이치를 빌려 자신의 철학 사상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문 역정은 모두 가학(家學)에서 연원하는데, 초순에게는 과거(科擧)를 유일한 목적으로 삼지 말고 학문을 중시해야 한다는 조부와 부친의 간곡한 경고에 따라 어려서부터 경서(經書)를 학습하는 것 외에 언어학, 수학, 의학, 희곡 이론과 같은 다른 심층 학습이 장려되고 허용되었다. 그는 건륭 30년(1765, 3세)에서 건륭 43년(1776, 15세)까지 12년 동안 적모 사유인의 절실한 무육(撫育)을 받았는데, 적모 사씨는 체질이 허약하여 다병(多病)했던 초순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돌보면서 매일 서수(書數)를 가르치고, 《모시(毛詩)》와 효제충신(孝弟忠信)의 고사를 구수(口授)하였다. 건륭(乾隆) 33년(1768) 6세에 처음으로 사숙(私塾)에 들어갔을 때를 전후해서는 또 외숙모[구모(舅母)] 범씨(范氏), 외종 사촌형[표형(表兄)] 범징린(范徵麟), 외삼촌[표숙(表叔)] 왕용약(王容若) 등에게서 자음반절(字音反切), 시(詩)・소(騷)・부(賦)・고문(古文)・음운(音韻)의 변별(辨別), 산학(算學) 등을 배웠고, 건륭 38년(1773) 11세 때는 족부(族父) 초식(焦軾)에게서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배웠으며, 12・3세 때는 부친 초총에게서 《시품(詩品)》과 당대(唐代)의 오언율시(五言律詩), 북송(北宋) 삼소(三蘇)(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의 문장 등을 배웠다. 부친 초총은 당시에 또 사지(史地)・천문(天文)・산술(算術)의 책들을 열람하게 하였고, 건륭 41년(1776) 여름에는 〈소축(小畜) 단(彖)〉의 “구름이 빽빽한데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내가 서쪽 교외에서 왔기 때문이다.[密雲不雨 自我西郊]”가 왜 〈소과(小過) 육오(六五)〉에서 다시 나타나는가를 의심해보라고 가르침으로써 초순의 역학 연구를 인도하였다.
초순은 건륭 44년(1779) 17세에 동자시(童子試)에 응하여 고봉모(顧鳳毛(자(字) 초종(超宗)))와 함께 강소학정(江蘇學政) 유용(劉墉)의 보학생원(補學生員)이 되었고, 건륭 45년(1780) 18세에 현지의 관학인 양주(揚州) 안정서원(安定書院)에 입학하였다. 유용은 초순의 탄탄한 산학 실력을 인정하고, 또 경학(經學) 공부를 건의하였다. 동창생 지우(摯友) 고초종(顧超宗)은 자기 부친의 경학을 전해주어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초순은 건륭 46년(1781) 19세 때부터 경학 연구에 뜻을 세우고 《모시(毛詩)》로부터 시작하였으며, 급고각각본(汲古閣刻本)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를 구입하여 《이아(爾雅)》를 처음 읽고, 육전(陸佃)과 나원(羅願)의 책을 보충한 《모시조수초목충어석(毛詩鳥獸草木蟲魚釋)》을 썼다. 건륭 47년(1782) 약관(弱冠)에 어려서는 동유(同遊)하고 커서는 동학(同學)했던 완원(阮元)과 제명(齊名)되기 시작했고, 가학(家學)인 역학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맹자정의(孟子正義)》를 계획하였다. 초순은 완원의 족자부(族姊夫)였는데, 한 살이 어렸던 완원은 초순을 족저부(族姐夫)로 불렀다. 건륭 50년(1785) 23세 정부(丁父)와 적모(嫡母)의 정우(丁憂)에 거자업(擧子業)을 중단하고 오로지 《역》의 서적들을 두루 구하여 열독하였으나 부친이 인도해준 의혹에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건륭 52년(1787) 25세 때 지우 고초종이 기증해준 매문정(梅文鼎)의 《매씨총서(梅氏叢書)》를 통해 비로소 구장(九章)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건륭 60년(1795, 33세)에 산동학정(山東學政) 완원의 초대에 응하여 멀리 산동으로 갔고, 건륭 52년(1796, 34세)에 절강(浙江)으로 부임하는 완원을 따라 항주(杭州)에서 머물렀을 때 진구소(秦九韶)의 《수서구장(數書九章)》과 이야(李冶)의 《측원해경(測圓海鏡)》・《익고연단(益古演段)》을 얻어서 처음으로 ‘동연구용(洞淵九容)’의 오의(奧義)와 천원술(天元術)・대연술(大衍術)을 익혔다. ‘동연(洞淵)’은 인명(人名) 또는 서명(書名)으로 추측되고, ‘구용(九容)’은 직각삼각형[구고(句股)]의 방법을 가리킨다. 초순은 이들 산학(算學) 연구의 성과로서 가경 원년(1796) 34세에 《석고(釋孤)》 3권・《석륜(釋輪)》 2권・《석타(釋橢)》 1권을 썼고, 가경 2년(1797) 35세에는 《가감승제석(加減乘除釋)》 8권을 썼으며, 가경 4년(1799) 37세에는 진구소와 이야의 천원술(天元術)과 대연술(大衍術)을 천술(闡術)한 《천원일석(天元一釋)》 2권을 썼고, 가경 6년(1801) 39세에는 이야의 두 책을 천술한 《개방통석(開方通釋)》 1권을 썼다. 이들 수학 연구서는 초순 역학 연구의 기초로서 실제로 이를 통하여 14세 때 부친이 제시해 준 의혹을 비로소 해결할 수 있었고, 40세 이후에 자신이 발명한 해석 원칙들, 즉 방통(旁通)・시행(時行)・상착(相錯) 등도 수학 연구의 성과였다.
초순은 가경 6년(1801) 39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으나 가경 7년(1802) 40세 때 북경(北京)에서 있었던 예부(禮部)의 회시(會試)에서는 낙방하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회시에 응시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친모인 은유인을 봉양하면서 수관교학(授館教學)과 독서에 전념하였다. 초순은 대진(戴震)을 사숙(私淑)하고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을 심복하였는데, 가경 8년(1803) 41세 때 그 소증(疏證)의 체례를 본뜬 《논어통석(論語通釋)》 15편을 지었다. 가경 9년(1804) 42세에 수리(數理)의 방법을 이용하여 《역》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연구실을 ‘의동연구용수주《역》실(倚洞淵九容數注《易》室)’로 명명하고 《역통석》을 쓰기 시작했다. 41세에 가거(家居)한 이래 역학 연구에 잠심(潛心)하여 가경 12년(1807) 45세에 이르러서는 약 40권의 《역통석(易通釋)》・《역장구(易章句)》・《역도략(易圖略)》 초고를 완성하고, 이를 《역학삼서(易學三書)》로 초정(初定)하면서 영후재(英煦齋)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병(病)이 위중함에도 수차례 수정 작업을 계속하여 가경 17년(1812) 50세 때 다시 완원에게 지정(指定)을 부탁하였다. 가경 18년(1813) 51세 때 《역통석》 20권을 완성하였고, 가경 21년(1816) 54세에 이르기까지 《역도략》 8권, 《역장구》 12권을 완성하였다. 이들 《역학삼서》는 가경 14년(1809) 47세에 지은 조고루(雕菰樓)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조고루역학삼서(雕菰樓易學三書)》로 명명되었다.
초순은 가경 20년(1815) 53세 때부터 자신이 발명한 역리(易理)를 다른 경전(經傳) 연구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는데, 54세에는 《논어보소(論語補疏)》를 완성하였고, 또 약관 때 뜻을 세웠던 《맹자정의》를 쓰기 위한 준비로서 아들 초정호(焦廷琥)와 함께 《맹자장편(孟子長編)》 30권을 편찬하였다. 가경 22년(1817) 55세 때 문집 《조고집(雕菰集)》 24권을 자정(自訂)하고, 《역도략》・《역통석》・《역장구》를 편집 순서로 하는 《조고루역학삼서》 40권을 수사(手寫)했다. 가경 23년(1818) 56세 때 《맹자정의》 편찬을 시작하고 또 《군경보소(群經補疏)》를 산정(刪定)하였다. 57세 때 《맹자정의》 30권의 초고(草稿)를 완성하고, 아울러 옛 원고들을 산정하였다. 가경 25년(1820) 58세 때 《맹자정의》를 수정하고 손으로 쓴 원고 3권을 완원에게 보내어 질정(質定)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족질(足疾)이 재발하고, 학질에 걸려서 완성하지 못하고, 9월 4일 진시(辰時)에 향년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초순은 평생 병약하여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학우들은 매우 많았다. 그가 남긴 252편의 서신에서 언급한 학인 중 건가학(乾嘉學)을 대표하는 저명한 인사들만을 예로 들면, 완원(阮元), 이예(李銳), 손성연(孫星衍), 강성(江聲), 강번(江藩), 전대흔(錢大昕), 왕광희(汪光爔), 단옥재(段玉裁), 왕념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능정감(淩廷堪), 왕명성(王鳴盛), 왕중(汪中), 고봉모(顧鳳毛) 등이다.
(5) 주요저작 : 경학에서는 《조고루역학삼서(雕菰樓易學三書)》 40권(《역통석(易通釋)》 20권, 《역장구(易章句)》 12권, 《역도략(易圖略)》 8권), 《역화(易話)》 2권, 《역광기(易廣記)》 3권, 《육경보소(六經補疏)》 20권(《논어보소(論語補疏)》 3권, 《주역보소(周易補疏)》 2권, 《상서보소(尙書補疏)》 2권, 《모시보소(毛詩補疏)》 5권, 《춘추좌전보소(春秋左傳補疏)》 5권, 《예기보소(禮記補疏)》 3권), 《군경궁실도(群經宮室圖)》 2권, 《우공정주석(禹貢鄭注釋)》 2권, 《맹자정의(孟子正義)》 30권, 《논어통석(論語通釋)》 1권 등이 있고, 천문・수학에서는 《이당학산기(里堂學算記)》 5종 5권(《가감승제석(加減乘除釋)》 8권, 《천원일석(天元一釋)》 2권, 《석호(釋弧)》 2권, 《석륜(釋輪)》 2권, 《석타(釋橢)》 1권), 《개방통석(開方通釋)》, 《개방석례(開方釋例)》, 《승방석례(乘方釋例)》, 《초리당천문역산고(焦里堂天文曆算稿)》 등이 있으며, 경사학에서는 《북호소지(北湖小志)》 6권, 《한기(邗記)》 6권, 《양주부지(揚州府志)》 8권, 《양주족징록(揚州足徵錄)》 27권 등이 있고, 의학에서는 《이옹의기(李翁醫記)》, 《의설(醫說)》, 《종두의서(種痘醫書)》, 《사진오험편(沙疹吾驗篇)》 등이 있고, 문학에서는 《극설(劇說)》, 《홍미취죽사(紅薇翠竹詞)》, 《신풍탕구기(神風蕩寇記)》, 《조고루사화(雕菰樓詞話)》, 《화부농담(花部農譚)》, 《곡고(曲考)》 등이 있다. 문집으로는 《조고집(雕菰集)》 24권이 있다. 초순의 저서는 모두 대략 48종 300여 권이다.
3. 서지사항
이 책은 본래 초순이 건륭(乾隆) 47년(1782) 약관(弱冠) 때 쓸 뜻을 세웠던 책으로서 송유(宋儒) 손석(孫奭)의 위서(僞書) 《맹자정의(孟子正義)》(《십삼경주소・맹자주소(孟子注疏)》)를 읽고, 그 해석의 체례(體例)가 맞지 않고 인용이 거칠어서 한대(漢代) 조기(趙岐)의 본주(本注)만을 묵수할 뿐 널리 두루 채택하지 못하며, 또 문장의 뜻이 장황하고 비속하다는 문제에 불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초순은 경학(經學) 연구에서 “전으로 경을 풀이하지 전이 경을 어겨서는 안 된다[以傳解經 傳不違經]”나 “전은 경을 깨뜨릴 수가 없고, 소는 주를 깨뜨릴 수가 없다[傳不破經 疏不破注]”는 원칙을 가장 싫어하였다. 초순의 경학 연구 방법은 우인(友人) 황승길(黄承吉(1771~1842))과 학문을 토론하였을 때 제경(諸經)에 대한 당송(唐宋) 제유(諸儒)의 《정의(正義)》(《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가 일가(一家)의 주본(注本)만을 묵수하는 할 뿐 두루 종합하고 널리 채택하지 못하는 한계를 공감하고 《역(易)》・《맹자(孟子)》・《주관(周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쓰기로 서로 약속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초순은 《조고루(雕菰樓易學三書)》를 완성한 후, 약관 때의 입지(立志)로부터 35년이 지난 54세 때(가경 21년, 1816) 《맹자》 주석에 착수하였는데, 아들 초정호(焦廷琥)의 협조 아래 2년에 걸쳐서 경사전주(經史傳注) 및 청유(淸儒)의 책 가운데서 《맹자》와 관련된 자료를 일일이 수집하여 《맹자장편(孟子長編)》 14질(帙) 30권을 편성하였다. 그 후 56세(가경 23년, 1818) 12월 초에 다시 번잡하고 부족한 부분을 삭제 보충하며, 조기(趙岐)의 《맹자장구》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청유(淸儒) 60여 가(家)의 견해를 자신의 의견으로 절충하고 주해(注解)를 더하여 해석한 《맹자정의》를 쓰기 시작하였다. 57세(1819년) 7월에 초고(草稿) 30권을 완성한 뒤 다시 한 권씩 수정 보완하여 직접 베꼈다. 또 직접 손으로 쓴 원고 3권을 완원(阮元)에게 보내어 질정(質定)을 구하였다. 그러나 족질(足疾)이 다시 재발하고, 학질을 앓게 되면서 12권까지만을 완성하고 향년 58세를 일기로 임종(臨終(가경 25년, 1820))하였다. 그 후 아들 초정호가 부친의 작업을 계승하였으나 그도 반여 년 만에 병종(病終(도광道光 원년, 1821))하자 다시 초순의 동생 초징(焦徵)이 이어받아 도광(道光) 5년(1825)에 이를 간각인행(刊刻印行)하였다. 《맹자정의》는 초순・초정호・초징 세 사람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 책이라고 할 수 있으나 초정호의 ‘안어(按語)’는 6곳에 불과하며, 그 내용 대부분 판본교정과 글자해석 예증을 증가한 것이므로 여전히 초순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조기(趙岐)의 《맹자장구(孟子章句)》를 저본으로 하고 있다. 청유(淸儒) 가운데 정요전(程瑤田)의 《논학소기(論學小記)》와 대진(戴震)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을 인용한 것이 가장 많다. 초징이 간각인행한 판본은 《초씨총서(焦氏叢書)》본으로 전해진다. 그 밖의 판본으로는 도광(道光) 9년(1829)에 완원(阮元)이 편찬한 《황청경해(皇清經解)》본과, 광서(光緖) 2년(1876) 형양(衡陽)의 위륜선(魏綸先)이 도광 5년 판본을 복교(復校)한 《초씨유서(焦氏遺書)》본 등이 있다. 현재 가장 유행하는 판본은 청(淸) 함풍(咸豐) 10년(1860)에 보간(補刊)된 《황청경해(皇清經解)》본을 저본으로 하여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이 1987년에 출판한 《맹자정의(孟子正義)》 점교본(點校本)이다.
4. 내용
초순은 《역》의 이치에 정통(精通)하여 복희(伏羲)・문왕(文王)・주공(周公)・공자(孔子)의 뜻을 심득(深得)한 최고의 책이 《맹자》라고 보았고, 또 역대의 《맹자》 주석에서 조기(趙岐)의 《맹자장구(孟子章句)》가 맹자를 가장 깊이 이해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기의 《장구》를 저본으로 삼았는데, 다만 그것이 한대(漢代) 훈고학의 병폐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통핵(通核)’이라는 자신의 방법으로 해석하였다. ‘통핵’이란 모든 경을 주(主)로 삼고 제자백가를 통섭하며 문사(文辭)를 조화시켜 도리(道理)를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사실로서 고증할 뿐만 아니라 의리(義理)로서도 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순은 수리(數理)를 이용하여 《주역》을 해석하였으며, 《주역》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다른 경(經)을 통석(通釋)하였고, 한학가(漢學家)의 고증은 세미(細微)한 데에 그 폐단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통핵(通核)의 학문을 주장하였는데, 초순 가장 만년의 저작인 《맹자정의》가 그 전형이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권1 〈맹자제사(孟子題辭)〉, 권2・3 〈양혜왕 상(梁惠王上)〉, 권4・5 〈양혜왕 하(梁惠王下)〉, 권6・7 〈공손추 상(公孫丑上)〉, 권8・9 〈공손추 하(公孫丑下)〉, 권10・11 〈등문공 상(滕文公上)〉, 권12・13 〈등문공 하(滕文公下)〉, 권14・15 〈이루 상(離婁上)〉, 권16・17 〈이루 하(離婁下)〉, 권18・19 〈만장 상(萬章上)〉, 권20・21 〈만장 하(萬章下)〉, 권22・23 〈고자 상(告子上)〉, 권24・25 〈고자 하(告子下)〉, 권26・27 〈진심 상(盡心上)〉, 권28・29 〈진심 하(盡心下)〉, 권30 〈맹자편서(孟子篇敍)〉이다.
《맹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맹자의 성선론(性善論)과 인간・금수 구분[인금지변(人禽之辨)] 등의 논제(論題)이다. 초순 《맹자》학의 특징이나 독창성 또한 여기에 있는데, 맹자(孟子)와 조기(趙岐)는 비록 식색(食色) 등의 정욕(情欲)을 인성(人性)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였으나 선성(善性)의 요소로는 긍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순은 인간의 원시적인 식색의 성[정욕(情欲)]이 예문(禮文)의 규범을 받아들인 후 문화적 가치를 나타내며, 이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불가능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식색의 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초순은 식색으로 성선(性善)을 설명해야 사람들이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겨서 대략 아홉 가지로 성선을 논증한다. ① 인간은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성은 선하다. ② 인간은 능지(能知)하므로 인성은 선하다. ③ 인간은 교육으로 밝아지므로 인성은 선하다. ④ 인간은 정(情)에 정연(精硏)의 욕구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인성은 선하다. ⑤ 인간은 자신의 “욕(欲)”을 자연히 필연(必然)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인성은 선하다. ⑥ 인간은 존현(尊賢)하고 채선(采善)할 줄 알기 때문에 인성은 선하다. ⑦ 인간은 신명(神明)의 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성은 선하다. ⑧ 인간은 권선(權善)을 알아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인성은 선하다. ⑨ 인간은 정욕(情欲)을 “방통(旁通)”할 수 있기 때문에 인성은 선하다. 초순의 이러한 성선 논증은 동시에 성(性)・영(靈)・정(情)・욕(欲)・덕(德)・재(才)・지(知)・지(智)로서 인간과 금수의 구분을 토론한 것이다.[人禽之辨]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할 것은, 초순이 비록 식색의 정욕을 선성(善性)으로 인정하였지만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식색의 성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5. 가치와 영향
초순의 《맹자정의》는 조기의 《맹자장구》, 주희(朱熹)의 《맹자집주(孟子集註)》와 더불어 역대의 《맹자》 주석서 중 3대 주석서로 손꼽힌다. 일본의 《한문대계(漢文大系)》 권1 《맹자정본(孟子定本)》에도 주요하게 선록(選錄)되었다.
한인(漢人)의 《맹자》 주해서 중 현존하는 것은 조기(趙岐)의 《맹자장구》뿐이다. 따라서 초순의 《맹자정의》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기 및 한유(漢儒)의 맹자 이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또 이 책은 청나라 이래의 《맹자》에 관한 연구 결과를 수록하고 있으므로 《맹자》에 대한 청유(淸儒)들의 기본적인 이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청인(淸人)의 《맹자》학을 연구하려면 초순의 《맹자정의》가 가장 대표적인 전적임에 틀림없다.
《맹자정의》는 《조고루역학삼서》와 함께 초순의 ‘통핵’의 학문을 대변한다. 완원은 “《맹자》의 말을 《역》에 관통시켜서 《논어》・《중용》・《대학》과 서로 표리가 되게 하고 남김없이 밝혔는데, 종래의 《맹자》 해석서에는 이러한 실사구시가 없었으니 어찌 겨우 조기의 공신에 지나지 않을 뿐이겠는가?[且於孟子言通於易 堪與論語中庸大學相表裏者 闡發更無餘蘊 從來解孟子者 無此實事求是也 夫豈僅爲趙氏之功臣而已哉]”라 하였고(〈통유양주초군전(通儒揚州焦君傳)〉), 주중부(周中孚)는 “혹은 조기의 뜻을 펼쳐서 말하고, 혹은 조기와 다르게 해석하며, 혹은 오로지 맹자를 보익하고, 혹은 다른 경을 인용하여 해석한 것을 겸비하여 참고하게 하였다.[或申趙義 或與趙殊 或專翼孟 或雜他經 兼存備錄以待參考]”라고 하였으며(《정당독서기(鄭堂讀書記)》, 권12), 범희증(范希曾)은 “청유의 《맹자》 주석 가운데 초순의 《맹자정의》가 가장 완비하다.[淸儒注孟子 焦書最完善]”고 한다(〈서목답문보정(書目答問補正)〉). 초순의 선선 논증과 인간・금수 구분 변증(辨證)은 특히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맹자의 학문은 공자를 조술한 것이고, 공자의 학문은 복희・신농・요・순・문왕・주공을 조술한 것이다. 육가의 《신어》 〈도기편〉에서는 ‘선성이 천문을 앙관하고 지리를 부찰하여 건곤을 그렸고 이로써 인도를 정하였다. 백성들이 비로소 깨우쳐 부자의 친(親)과 군신의 의(義)와 부부의 도(道)와 장유의 서(序)를 알게 되었고 이에 백관이 서게 되었으며 왕도가 이에서 생기게 되었다.’고 하였고, 《백호통》은 그 이론을 더욱 펼쳐서 ‘옛날에는 삼강(三綱)과 육기(六紀)가 아직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백성들은 다만 제 어미를 알 뿐 제 아비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제 몸의〉 앞가림을 할 줄 아나 뒤 가림을 할 줄 몰랐다. 그들은 누워서 코 골며 단잠을 자고, 다니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배가 고플 때는 먹을 것을 찾고, 배가 부르면 남은 것을 버렸다. 그들은 짐승의 고기에 있는 털 채 씹어 먹으며 피를 마시고, 생가죽과 갈대로 옷을 해 입었다. 이즈음에 복희가 나타나 올려다보며 하늘에서 무늬를 관찰하고, 굽어보며 땅에서 나타난 지리를 본받았다. 복희는 이로써 남편과 아내의 연을 맺어주고, 오행의 순서를 정리하고, 처음으로 인도(人道)를 마련하고, 팔괘(八卦)를 그려서 천하를 다스렸다.’고 하였으며, 〈계사전〉에서는 ‘신명의 덕을 통해서 만물의 실정을 분류했다.’고 하였다. ‘신명의 덕’은 곧 성선(性善)을 말한 것이다. 선(善)은 영(靈)이고, 영(靈)은 신명(神明)이다.[孟子之學 述孔子者也 孔子之學 述伏羲神農堯舜文王周公者也 陸賈新語道基篇云 先聖仰觀天文 俯察地理 圖畵乾坤 以定人道 民始開悟 知有父子之親 君臣之義 夫婦之道 長幼之序 於是百官立 王道乃生 白虎通暢其說云 古之時未有三綱六紀 民人但知其母 不知其父 能覆前而不能覆後 臥之詓詓 起之吁吁 饑卽求食 飽卽棄餘 茹毛飲血而衣皮葦 於是伏羲仰觀象於天 俯察法於地 因夫婦 正五行 始定人道 畫八卦以治下 繫辭傳云 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 神明之德 卽所謂性善也 善卽靈也 靈卽神明也]” 《맹자정의》 권10 〈등문공 상〉
• “음식・남녀는 인간의 큰 욕구의 소재이다. 욕구가 여기에 있으므로 성도 여기에 있게 된다. 인간의 성이 이러하니 만물의 성도 이러하게 된다. 다만 만물은 음식・남녀만 알 뿐이고 그 적당함은 알 수가 없다.……사람은 음식・남녀를 알고 거기에 성인의 가르침을 거쳐 경작의 적당함과 혼인의 적당함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사람의 성에 불선함이 없는 까닭이다.(飮食男女 人之大欲存焉 欲在是 性卽在是 人之性如是 物之性亦如是 唯物但知飮食男女 而不能得其宜……人知飮食男女 聖人敎之 則知有耕鑿之宜嫁娶之宜 此人之性無不善也)” 《맹자정의》 권22 〈고자 상〉
• “상고의 백성들은 처음에 아버지가 있음은 모르고 어머니가 있음만을 알아서 금수와 다름이 없었다. 복희씨가 혼인을 가르쳐주고 인간의 도를 정해주어서야 지우를 불문하고 모두 변화되어 부부와 부자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금수와 물고기를 잡아먹었는데 주리면 먹고 배부르면 버리곤 하였다. 신농씨가 농사법을 가르쳐주어 지우를 불문하고 모두 불로 구워먹고 낟알을 식량으로 할 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利)이다.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이(利)와 불리(不利)의 사이에 있다. 이와 불리란 곧 의(義)와 불의(不義)이고 의와 불의란 곧 적당함과 부당함이다. 적당함이란 곧 지혜를 가리킨다.……지혜가 있으면 사람이고 지혜가 없으면 금수이다.[上古之民 始不知有父 唯知有母 與禽獸同 伏羲敎之嫁娶 定人道 無論賢智愚不肖 皆變化而知夫婦父子 始食鳥獸贏蛖之肉 飢則食 飽棄餘 神農敎之稼穡 無論賢智愚不肖 皆變化而知有火化粒食 是爲利也 人之所以異於禽獸者 在此利不利之間 利不利卽義不義 義不義卽宜不宜 宜卽智也……智 人也 不智 禽獸也]” 《맹자정의》 권17 〈이루 하〉
• “자신의 마음으로 타인의 마음에 통하는 것이 인(仁)이다. 그 부당함을 알고 그것을 적당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의(義)이다. 인의는 변통시키는 데 있다. 사람은 변통시킬 수 있으므로 성이 선하게 되고 만물은 변통시킬 수 없으므로 성이 선하게 되지 못한다.[以己之心通乎人之心 則仁也 知其不宜 變而之乎宜 則義也 仁義由於能變通 人能變通 故性善 物不能變通 故性不善]” 《맹자정의》 권22 〈고자 상〉
(2) 색인어:초순(焦循), 초리당(焦里堂), 맹자정의(孟子正義), 성선(性善), 인금지변(人禽之辨), 가이이(可以移), 가이능(可以能), 음식남녀(飮食男女), 변통(變通)
(3) 참고문헌
• 《孟子正義》(焦循 撰, 沈文倬 點校, 中華書局, 1996)
• 《中國思想通史》 第5卷(侯外慮, 人民出版社出版, 1963)
• 《焦循硏究》(何澤恒, 大安出版社, 1990)
• 〈惠棟與焦循〉(本田 濟, 《東洋思想硏究》, 東京, 創文社, 1987)
• 《焦循儒學思想與易學硏究》(陳居淵, 齊南, 齊魯書社, 2000)
• 《焦循年譜新編》(賴貴三, 臺北, 里仁書局, 1994)
• 《焦循評傳》(劉瑾輝, 揚州, 廣陵書社, 2005)
• 《中國近三百年學術史》(梁啓超, 東方出版社, 1996)
• 《中國近三百年學術史》(錢穆, 商務印書館, 1997)
• 〈焦循對孟子心性論的詮釋及其方法論問題〉(李明輝, 《臺大歷史學報》 24期, 1999, 71-102쪽)
• 〈焦循的學問〉(坂出祥伸著, 廖肇亨譯, 《中國文哲硏究通信》, 제10권, 제1기, 143-159쪽)
• 《청대철학》(王茂・蔣國保・余秉頤・陶淸著, 安徽人民出版社, 1992, 김동휘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1995)
【유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