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몽구(蒙求)》는 한자를 배우는 어린이를 위하여 당나라 학자 이한(李澣)이 편찬한 교재로, 1구 4자 600구, 모두 2,400자로 된 사언고시(四言古詩)이다. ‘몽구(蒙求)’란 ‘어린이가 요구해서 의문을 해결한다’는 뜻인데, 《주역(周易)》 몽괘(蒙卦)의 괘사(卦辭) “내가 어린이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나에게 구한다[匪我求童蒙 童蒙求我]”에서 따온 제목이다. 중국 역대의 뛰어난 인물과 그 행적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외우기 쉽게 4언으로 운을 맞춰 지은 인물고사집(人物故事集)이다.
2. 저자
(1) 성명:이한(李澣),
(2) 자(字)·별호(別號):미상(未詳).
(3) 출생지역:군망(郡望)은 조군(趙郡), 이관(里貫)은 안평(安平), 거주지는 동군(東郡), 요주(饒州), 하남부 河南府 양적현(陽翟縣) 등.
(4) 주요활동과 생애
활동이나 생애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에서도 이한(李澣)과 이한(李翰)의 두 가지 표기가 뒤섞여, 이를 고증하는 논문까지 나왔다. 조선후기 홍익주(洪翼周)(1797~1834)가 이 책을 주석한 《몽구주해(蒙求註解)》의 소인(小引)에서 저자를 ‘오대 이한(五代李澣)’, 본문 첫 부분에서는 ‘후당 이한 찬집(後唐李澣撰集) 삼한 홍익주 집주(三韓洪翼周集註)’라고 소개하여 《몽구》의 저자를 후당 때 인물 이한으로 보고 있으나, 《몽구》의 서문을 쓴 이화(李華)(?~767)의 생존 연도와 비교해보면 당나라 인물이 확실하다.
천보(天寶)(742-756) 중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위현위(衛縣尉)에 임명되고, 761년에 시어사(侍御史)에 임명되었다. 신주사창참군(信州司倉参軍)이 되었다가 임기가 끝나자 요주(饒州)에 머물러 살았으며, 후에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막하의 장서기(掌書記)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한림학사(翰林学士)로 활동했다.
(5) 주요저작:미상(未詳)
3. 서지사항
《몽구》는 4언 8구 1조마다 압운을 하면서 압운에 따라 4언 8구 74조 592구를 구조화하였다. 8구마다 환운할 때 평성 다음에 반드시 측성을 두고 다시 평성을 배치하는 한편, 전체적으로는 평-상-거-입의 사성을 구분해서 체계적으로 압운하였다. 마지막 4구는 인물고사가 아니라 책을 마무리하며 어린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기를 당부하는 수속시(收束詩)이다
《몽구》는 고주본 이외에도 송나라 서자광(徐子光)에 의해 보완된 주석본이 널리 이용되었다. 일본에는 서자광 주석본 이전의 고주본[書陵部本ㆍ眞福寺本] 및 표제본(標題本)[長承本ㆍ正倉院本ㆍ傳教家本ㆍ觀智院建保本ㆍ觀智院承永本ㆍ西來寺本ㆍ龍谷大學本ㆍ古活字合刻本蒙求標題]이 많이 존재했다고 한다. 에도시대 오카 하쿠(岡白駒)(1692-1767)의 《전주몽구교본(箋註蒙求校本)》은 1767년에 초간된 이후, 에도말기에서 메이지초기에 이르기까지 사민(士民)의 교과서로서 널리 활용되었다.
한편 중국ㆍ일본ㆍ한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거듭 속찬되었다. 중국의 예를 보면, 송나라 때 왕령(王令)의 《십칠사몽구(十七史蒙求)》, 범진(范鎭)의 《본조몽구(本朝蒙求)》, 유각(劉珏)의 《양한몽구(兩漢蒙求)》, 서백익(徐伯益)의 《훈녀몽구(訓女蒙求》가 나왔고, 원나라 때는 호병문(胡炳文)의 《순정몽구(純正蒙求)》가 나왔다. 차운의 예로는 왕탁(王涿)의 《차운몽구(次韻蒙求)》와 오정수(呉庭秀)의 《신찬몽구(新撰蒙求)》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에서도 선비 집안에서 이 책을 아동용 교재로 널리 사용하였으며, 홍양호의 증손자인 홍익주(洪翼周)(1797-1834)가 이 책에 자세한 주해를 붙인 《몽구주해(蒙求註解)》를 간행하였다. 홍익주는 《몽구》의 본문을 8자 한 구절 씩 큰 글자로 쓴 다음, 행을 바꾸어 두 칸 아래부터 작은 글자로 주해를 하였다. 8자 본문의 내용이 4자씩 다른 경우, ○를 넣어 내용을 구분하였다. 《몽구주해》의 발문은 홍익주의 둘째 아들 홍우경(洪祐慶)이 1839년에 썼는데, 자구가 매우 간략하면서도 뜻이 깊어 선비 집안에서 매일의 학습서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내용
한 인물의 고사를 8자로 쓴 11개 구를 제외한 285구는 각기 2가지씩의 고사나 일화를 묶어 짝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 8자 2구 16자는 이한이 열심히 공부하라고 덧붙인 말이다. 내용은 남북조 시대까지의 역사, 인물, 일화가 주를 이루고 인용된 책은 정사(正史)가 중심이 되었으나, 유가(儒家)의 13경 등 경사자집(經史子集)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자구가 간략하면서도 의미가 풍부하여 어린아이들이 읽고 외우기에 편하며, 문인(文人)들이 글을 지을 때에도 좋은 참고가 된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한 차례 소개했지만, 제갈량(諸葛亮)은 공명와룡(孔明臥龍)ㆍ제갈고려(諸葛顧廬)ㆍ양유건괵(亮遺巾幗) 등 자와 성을 바꿔서 세 차례 소개되었으며, 도잠(陶潛)도 무릉도원(武陵桃源)ㆍ도잠귀거(陶潛歸去)ㆍ연명파국(淵明把菊) 등 세 차례 소개되었다. “굴원택반(屈原澤畔) 어부강빈(漁父江濱)”같이 한 인물의 고사만으로 8자 대구를 이룬 경우도 있다.
“복파표주(伏波標柱) 박망심하(博望尋河)”ㆍ“손강영설(孫康映雪), 차윤취형(車胤聚螢)”ㆍ“서시봉심(西施捧心) 손수요절(孫壽折腰)”같이 주어는 물론 술어와 객어까지도 대구를 이루는 경우도 많지만, 억지로 대구를 이루다보니 가독성이 떨어지는 구절도 더러 있다.
5. 가치와 영향
어린이 교재 가운데 위로는 《천자문》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삼자경》을 열어주었는데, 편폭이나 함량으로는 그보다 뛰어나다. 중국의 역대 제현·열사·문장가 등을 어린이들에게 쉽게 소개함으로써 한자문화권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교육할 수 있어서 널리 읽혔다.
《송사(宋史)》 〈맹촉세가(孟蜀世家)〉를 보면, 맹창(孟昶)의 아들 맹현각(孟玄珏)이 취학할 때 기거사인(起居舍人) 진악(陳卾)을 교수로 삼았는데, 진악은 이한의 《몽구》와 고측(高測)의 《운대(韻對)》를 모방해서 《사고운대(四庫韻對)》 40책을 만들어 올렸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나라시대에 관학(官學)인 대학료(大學寮)만이 아니라 귀족의 사학(私學)도 크게 발달하였는데, 812년에 후지와라노 후유쓰구(藤原冬嗣)가 건립한 권학원(勸學院)은 대학료를 능가하여, “권학원의 참새는 몽구를 재잘거린다(勸學院の雀は蒙求を喋る)”라는 속담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러한 속담이 성립하였다는 사실 자체로 당시 이미 『몽구』가 교육의 텍스트로서 널리 활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유배지에서 《속몽구(續蒙求)》를 엮어 본문을 거의 완성하고 분주(分註)를 작성한 후, 유배에서 돌아와 오랜 기간에 걸처 개정하였다. 유희춘은 〈속몽구제(續蒙求題)〉에서, 이한의 《몽구》와 범진의 《송조몽구》를 보완하고, 명나라 때까지의 인물고사를 선별하여 4책으로 정리하고, 스스로 분주를 더하여 《속몽구》를 편찬한다고 하였다. 이한의 《몽구》는 상고에서부터 남북조시대까지로 그치고 범진의 《몽구》는 송나라 초에 한정되어 있어, 수나라부터 명나라까지의 인물고사를 망라한 것이 없는 데다, 범진의 《몽구》는 전체 책이 동방에 전래하지 않아서 읽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유희춘은 공자가 ‘찬역(贊易)’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 인물의 언행을 기록해서 적덕(積德)의 방편으로 삼고자 《속몽구》를 엮었다고 밝혔다.
유희춘의 《속몽구》는 《몽구》와 달리 인물의 일화가 수록된 소재를 명확하게 밝히는 한편, 인물의 출처행장에 관한 언론을 덧붙였다. 모두 107종의 책으로부터 592인의 인물일화와 제가논평을 추출하여 정리하였는데, 특히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중시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이릉이 처음 시를 썼고, 전횡은 노래로 느꼈네.[李陵初詩 田橫感歌]”
• “묵자는 실이 물드는 것을 슬퍼했고, 양주는 갈림길에서 울었네.[墨子悲絲 楊朱泣岐]”
• “손강은 눈에 비춰 읽었고, 차윤은 반딧불 모아 읽었네.[孫康映雪, 車胤聚螢]”
• “두강은 술을 만들었고, 창힐은 문자를 만들었네.[杜康造酒, 蒼頡制字]”
• “몽염은 붓을 만들고, 채륜은 종이를 만들었네.[蒙恬製筆, 蔡倫造紙]”
(2) 색인어:몽구(蒙求), 이한(李澣), 대구(對句), 사자성어(四字成語), 훈몽서(訓蒙書),
(3) 참고문헌
• 續蒙求(柳希春)
• 蒙求註解(洪翼周)
• 譯註 蒙求(柳在泳, 崔瑞任 共譯, 이회)
• 《蒙求》作者李瀚生平事迹考实(李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