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묵자(墨子)의 사상이 담긴 저서로 묵자와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묵가학파의 학설을 정리한 책이다. 묵자가 직접 쓴 것은 아니고 묵자의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해두었다가 묵자 사후 이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이 책은 묵가(墨家)가 와해된 후에 중국에서도 사실상 거의 잊히다시피 했다가, 청나라 고증학 시기에 비로소 재평가되었다.
2. 저자/편자
(1)성명:묵적(墨翟)(B.C. 479?~B.C. 381?)
(2)자(字)·별호(別號):존칭으로 묵자(墨子)라고 불린다. 묵(墨)이라는 성을 갖게 된 것은, 죄인의 얼굴에 먹물로 문신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묵자 자신의 피부가 대단히 검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3)출생지역:묵자의 출생지와 관련해서는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순자(荀子)》 〈수신(修身)〉에 대한 양경(楊倞)의 주석과 《문선(文選)》 〈장적부(長笛賦)〉의 주에 인용된 《포박자(抱朴子)》 등에서는 그를 송(宋) 출신으로 간주한다. 반면 《여씨춘추(呂氏春秋)》 〈당염(當染)〉의 고유(高誘)의 주석에서는 그를 노(魯)나라 등(滕) 지역 출신이라고 하였는데, 양계초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이 설을 지지하였다. 또 《묵자》 주석의 대가인 필원(畢沅)은 묵자를 초(楚)나라 출신이라고 보았다.
(4)주요활동과 생애
손이양(孫詒讓)은 《묵자간고(墨子間詁)》에서 묵자는 주(周)의 정왕(定王) 때에 태어나 안왕(安王) 말년에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묵자의 사적은 확실하지 않지만, 일찍이 유학을 공부했으나 유가의 번잡한 예(禮)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학설을 창설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봉건제를 시인하고 도덕을 존중하는 등 유가와 일치하는 주장도 적지 않지만, 유가의 번잡한 의례(儀禮) 때문에 백성이 가난하게 되는 것을 ‘비(非)’라고 하여, 반동적으로 예악을 경시하고 근로와 절약을 중시했다.
유가가 중시하는 주(周)나라의 문화주의를 물리치고, 하(夏)나라의 소박주의를 치세의 원리로 삼았다. 특히 하나라의 우(禹)왕을 존숭해 그의 실천정신과 희생정신을 따르려 노력했다. 묵자가 살던 시대는 전국시대로서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가 요동치던 불안한 시대였다. 따라서 묵자는 분쟁을 제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자기의 주요 임무로 삼았다. 그는 바쁘게 유세하고 자기의 이상을 선전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러므로 “묵자의 집 굴뚝은 검어질 틈이 없다[墨突不黔]”라는 말까지 전해오고 있다.
3. 서지사항
《묵자》를 최초로 언급한 것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인데, 여기에는 원래 《묵자》 71편이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전하는 《묵자》는 53편이다. 11세기 송나라 장군방(張君房)이 감수한 도교 교리의 해설서인 《도장(道藏)》에 따르면 《묵자》 71편 가운데 〈절용 하(節用下)〉 등의 8편이 누락됐다고 밝히고 있다. 후한 초기에서 당대(唐代)에 이르는 동안 8편이 누락된 것이며, 그 이후 또 10편이 사라진 것이다. 진한(秦漢) 시대만 하더라도 공묵(孔墨)으로 병칭될 정도로 명성을 떨쳤던 묵가 학단의 기본 텍스트가 도중에 전체의 1/4 가량이 사라졌다는 것은 묵가의 전통이 얼마나 철저히 단절됐는지를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묵가의 전통이 완전히 끊어졌던 것은 아니다. 서진 때 노승(魯勝)은 《묵변주(墨辯注)》를 썼고, 《통지(通誌)》 〈예문략(藝文略)〉에 따르면 《묵자》의 제l편 〈친사(親士)〉에서 제13편 〈상동 하(尙同下)〉에 이르는 편장을 따로 묶은 판본이 크게 유행했고 악대(樂臺)가 주석을 단 적이 있는데, 비록 지금은 모두 없어졌지만 묵가의 전통이 면면히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당대(唐代)에는 위징(魏徵)이 《묵자치요(墨子治要)》를 썼으며, 마총(馬總)은 《묵자절록(墨子節錄)》을 지었고, 원(元)의 도종의(陶宗儀)는 《묵자절초(墨子節鈔)》를 지었다.
명대(明代)에 도장본(道藏本) 속에 끼어 있던 《묵자》 15권이 처음으로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판본이다. 이후로 명대에는 묵자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의 저술이 대거 나오기 시작하는데, 1625년 귀유광(歸有光), 문진맹(文震孟) 공저의 《묵자평점(墨子評點)》을 비롯해서 이지(李贄)의 《묵자비선(墨子批選)》, 모곤(茅坤)의 《묵자비교(墨子批校)》, 당요신(唐堯臣)의 《묵자교정(墨子校定)》, 심율(沈律)의 《묵자류찬(墨子類纂)》, 잠암자(潛庵子)의 《묵자산정(墨子刪定)》, 진심(陳深)의 《묵자품절(墨子品節)》, 진인석(陳仁錫)의 《묵자기상(墨子奇賞)》 등이 그것이다.
청대에는 훈고학이 크게 발달함에 따라 《묵자》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연구 성과 역시 대단히 많아졌다. 마숙(馬驌)의 《묵자여묵자(墨子與墨者)》, 부산(傅山)의 《묵자대취편석(墨子大取篇釋)》, 진몽뢰(陳夢雷)의 《묵자휘고(墨子彙考)》, 필원(畢沅)의 《묵자주(墨子注)》, 장혜언(張惠言)의 《묵자경설해(墨子經說解)》, 강유고(江有誥)의 《묵자운독(墨子韻讀)》, 주역동(朱亦棟)의 《묵자서찰기(墨子書札記)》, 홍이훤(洪頤煊)의 《묵자총록(墨子叢錄)》, 왕염손(王念孫)의 《묵자잡지(墨子雜志)》, 소시학(蘇時學)의 《묵자간오(墨子刊誤)》, 유월(兪樾)의 《묵자평의(墨子平議)》, 대망(戴望)의 《묵자교기(墨子校記)》, 도홍경(陶鴻慶)의 《독묵자찰기(讀墨子札記)》, 왕수단(王樹枬)의 《묵자각주보정부고정묵자경하편(墨子斠注補正附考定墨子經下篇)》, 손이양(孫詒讓)의 《묵자간고(墨子閒詁)》, 왕개운(王闓運)의 《묵자주(墨子注)》, 조요상(曹耀湘)의 《묵자전(墨子箋)》, 왕경희(王景曦)의 《묵상(墨商)》, 우창(于鬯)의 《묵자교서(墨子校書)》, 양계초(梁啟超)의 《묵학미(墨學微)》, 《묵자학안(墨子學案)》, 《묵경교석(墨經校釋)》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필원이 주석을 겸해 펴낸 《묵자주》를 필원본이라고 하는데, 《묵자교주(墨子校注)》를 펴낸 북경대 교수 오육강(吳毓江)은 필원본에 대해 《묵자》 원본과 함께 영원히 남을 기념비적인 업적이라고 극찬하였다. 또한 손이양은 1907년 《묵자간고(墨子閒詁)》를 펴내는데, 이것이 《묵자》 연구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손이양본’이다. 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묵자》에 대한 연구는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오늘날까지 묵학(墨學)에 대한 연구는 묵자의 생애와 사상을 비롯해서 주석 작업까지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4. 내용
《묵자》는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권1의 〈친사(親士)〉‚ 〈수신(修身)〉‚ 〈소양(所梁)〉‚ 〈법의(法儀)〉‚ 〈칠환(七患)〉‚ 〈사과(辭過)〉‚ 〈삼변(三辨)〉 7편 가운데 앞의 두 편은 유가와는 기본관점이 다르지만 유가의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묵자가 유가를 떠나 자신의 학파를 이루던 가장 초기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고, 후대의 유가가 슬쩍 끼워 넣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양계초는 첫 머리에 나오는 3편은 묵가사상이 아니고 후대인의 개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았으며, 〈법의〉에서 〈삼변〉까지의 4편은 묵학의 개요를 기술한 것인 만큼 무엇보다 먼저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의 5편은 《맹자(孟子)》와 유사한 것으로 문답체 형식이며 묵자의 제자가 기록에 의거하여 보충한 것이다.
둘째 부분은 〈상현(尙賢)〉 3편, 〈상동(尙同)〉 3편, 〈겸애(兼愛)〉 3편, 〈비공(非攻)〉 3편, 〈절용(節用)〉 2편, 〈절장(節葬)〉 1편, 〈천지(天志)〉 3편, 〈명귀(明鬼)〉 1편, 〈비악(非樂)〉 1편, 〈비명(非命)〉 3편 등의 묵가 10론(十論) 23편과 〈비유(非儒)〉 1편을 포함한 24편이다. 《묵자》의 핵심부분으로 묵학의 대강목(大綱目)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부분인 권10과 11의 〈경 상(經上)〉‚ 〈경 하(經下)〉‚ 〈경설 상(經說上)〉‚ 〈경설 하(經說下)〉‚ 〈대취(大取)〉‚ 〈소취(小取)〉의 6편은 묵경(墨經) 혹은 묵변(墨辯)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는 논리, 윤리,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산학(算學), 기하학, 광학(光學), 역학(力學) 등에 관한 것도 언급되어 있다. 이 부분은 묵자의 학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대체로 묵자의 후학들에 의해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넷째 부분인 권12에서 13의 〈경주(耕柱)〉‚ 〈귀의(貴義)〉‚ 〈공맹(公孟)〉‚ 〈노문(魯問)〉‚ 〈공수(公輸)〉 이 5편은 묵자의 후학들이 묵자의 일생의 언행을 모아 기록한 것인데, 각 편의 앞 글자 둘을 따서 제목을 붙인 것이 《논어(論語)》와 유사하다.
다섯째 부분인 권14‚ 15에 실린 〈비성문(備城門)〉, 〈비고림(備高臨)〉, 〈비제(備梯)〉, 〈비수(備水)〉, 〈비돌(備突)〉, 〈비혈(備穴)〉, 〈비아부(備蛾傅)〉, 〈영적사(迎敵祠)〉 〈기치(旗幟)〉, 〈호령(號令)〉, 〈잡수(雜守)〉 등의 11편은 방어전술과 수성(守城)의 공구에 대한 묵자의 저작으로 금골리(禽滑釐) 및 그 제자들이 기록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으로 묵자 만년 혹은 금골리의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 추정된다.
이상과 같이 내용상으로도 정치사상‚ 사회사상‚ 윤리사상‚ 철학사상 등이 매우 풍부하다. ‘상현(尙賢)’이 정치의 근본이라 여겨 세습제도를 반대하고 유능한 자를 선발할 것을 주장했고 ‘절용(節用)’‚ ‘절장(節葬)’‚ ‘비악(非樂)’ 등은 공리사상(功利思想)에 입각한 생활방식에 대한 주장이다. 겸애를 기치로 하고 교상리(交相利)를 실질적인 내용으로 하는 윤리사상을 전개했으며 철학적으로는 한편으로 천지(天志)‚ 명귀(明鬼)를‚ 또 한편으로는 비명(非命)을 주장하며 적극적인 유위로 운명을 개척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5. 가치와 영향
묵자는 변화와 혼란으로 요약되는 춘추시대의 근본적인 사회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였던 사상가다. 그러나 묵가의 활동은 전국시대의 종말과 함께 급격히 쇠퇴하고, 한나라에 이르러 유교가 국교로 확립되자 사상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묵자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100여 년 남짓 되었다. 흔히 묵자의 사상은 공자(孔子)의 사상에 대한 반발로 이해된다. 공자가 사회적 혼란을 주나라의 예의 제도를 유신(維新)함으로 극복하려고 하였던 반면, 묵적은 모든 구성원들 상호간의 사랑인 겸상애(兼相愛)와, 아울러 상호간의 물질적 이익 증대를 뜻하는 교상리(交相利)를 통해서 사회적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간단히 말해 공자가 통치자 계층의 도덕성 제고에 관심을 가졌다면, 묵적은 피통치자 계층의 민생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묵자 사상의 특성은 순수 도덕적 가치의 측면에서 겸애주의, 경제적 자치의 측면에서 공리주의, 사회적 가치의 측면에서는 평화주의로 대표되며 이러한 특성들은 현대의 혼란상을 해결하는 요소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자 성리학이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있던 조선에서 《묵자》는 주로 정통 성리학자들에 의해 배척되었으나,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주목받기도 하였다. 이익(李瀷)은 “묵가의 사상을 비유하면서 현재의 유가들의 행동을 보면 자신들이 비난하고 있는 묵가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비난할 것”이라고 하였다.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서(湛軒書)》에서 “묵씨(墨氏)의 겸애와 근검과 절용은 세상의 급박한 사정에 대비하여 위로는 시속을 구제하고 아래로는 사사로움을 잊을 수 있게 하였으니 또한 보통사람들보다 월등히 현명하다.”고 하였으며,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묵적(墨翟)이 지녔던 재능과 지혜는 장수가 될 만하다. 남의 사력(死力)을 얻을 수 있었으니 크게 사람들보다 뛰어난 자질이 아니면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여 묵자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의 실학자들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묵자의 사상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수용하기도 하였다.
6. 참고사항
(1)명언
• “편안한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이요, 만족할 재산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만족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非無安居也 我無安心也 非無足財也 我無足心也]” 〈친사(親士)〉
• “저 사람 중에 그 장점 때문에 죽지 않을 자 드물다.[彼人者寡不死其所長]” 〈친사(親士)〉
• “일찍이 혼란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살펴본 적이 있는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난다.[當察亂何自起 起不相愛]” 〈겸애 상(兼愛上)〉
• “백성에겐 세 가지 근심이 있다.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추위에 떠는 자가 입을 것을 얻지 못하는 것, 피로한 자가 휴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백성들의 커다란 근심이다. 그렇다면 만약 큰 종을 두드리고 북을 치며, 거문고를 뜯고, 우와 생을 불면서, 방패와 도끼를 들고 춤을 추어야 한다면, 백성들의 입고 먹을 재물은 앞으로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民有三患 飢者不得食 寒者不得衣 勞者不得息 三者民之巨患也 然卽當爲之撞巨鍾擊嗚鼓彈琴瑟吹竽笙而揚幹戚 民衣食之財 將安可得乎]” 〈비악 상(非樂上)〉
•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는 것은 성왕의 도요, 천하의 큰 이익이다.[去無用之費 聖王之道 天下之大利也]” 〈절용 상(節用上)〉
(2)색인어:묵자(墨子), 묵적(墨翟), 묵경(墨經), 묵변(墨辯), 겸애(兼愛), 공리(公利), 절용(節用), 절장(節葬), 비공(非攻), 교리(交利), 공수반(公輸般).
(3)참고문헌
• 墨子(墨翟 著, 涵芬樓)
• 墨子(畢沅(淸) 撰, 浙江書局)
• 墨子(梁啓超 著, 大澤龍二郞 補譯, 吉野直治)
• 墨子(金學圭 지음, 民音社)
• 묵자-겸애와 비공을 통해 이상사회를 추구한 사상가-(신동준 저, 인간사랑)
• 묵자(박문현 옮김, 지만지)
【함현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