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백공육첩(白孔六帖)》은 100권으로, 《당송백공육첩(唐宋白孔六帖)》이라고도 한다.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가 편찬한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과 송(宋)나라 공전(孔傳)이 속편(續編)한 《육첩신서(六帖新書)》를 합편(合編)한 유서(類書)이다. 그러나 누가 합편하였는지는 미상이다.
2. 편자
(1) 성명:백거이(白居易)(772~846), 공전(孔傳)
(2) 자(字)·별호(別號):백거이의 자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향산거사(香山居士)이다. 공전의 자는 聖傳인데, 일설에 처음 이름은 약고(若古), 자는 세문(世文)이라고도 한다.
(3) 출생지역:백거이는 태원(太原)(현 산서성(山西省)에 속함) 사람으로, 낙양(洛陽)(현 하남성(河) 南省에 속함)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후에 하규(下邽)(현 섬서성(陝西省) 위남(渭南) 동 북쪽)로 옮겨 살았다. 공전은 연주(兖州) 선원(仙源)(현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동북쪽) 사람이다.
(4) 주요활동과 생애
백거이는 두보(杜甫)·이백(李白)과 더불어 당(唐)을 대표하는 삼대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정원(貞元) 연간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관직은 한림학사(翰林學士)·좌습유(左拾遺)·형부상서(刑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新樂府)’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공전은 공자(孔子)의 47대손으로, 좌조의대부(左朝議大夫)·지주(知州) 등을 역임하였다.
(5) 주요저작:백거이의 저서로 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白香山詩集)》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시가 작품 수는 3,800여 수이고, 그중에서 〈비파행(琵琶行)〉·〈장한가(長恨歌)〉·〈유오진사시(遊悟眞寺詩)〉는 불멸의 걸작이다.
공전의 저서로는 《동가잡기(東家雜記)》, 《공자편년(孔子編年)》, 《삼계집(杉溪集)》이 있다. 《백공육첩》은 백거이의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과 공전의 《육첩신서(六帖新書)》를 합편한 것이다.
3. 서지사항
백거이의 《백씨육첩사류집》은 또한 《백씨경사사류(白氏經史事類)》·《육첩(六帖)》·《사류집요(事類集要)》·《백씨육첩(白氏六帖)》(이하 《백첩(白帖)》으로 칭함)이라고도 불리는데, 30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성어(成語)·고실(故實)을 뽑아 분류 배열함으로써 문장 인용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는데, 그 체제는 《북당서초(北堂書鈔)》와 같다. 각 권의 권수(卷首)에 ‘총목(總目)’이 있는데, 모두 235목(目)으로 되어 있으며 1,367문(門)으로 분류하였다. 따로 503소목(小目)을 덧붙였다. 그 인용이 난잡하고 대부분 출처를 명기하지 않았다. 남송(南宋) 조중덕(晁仲德)(조공무(晁公武)의 증조)이 그 출처를 고증하여 일일이 주를 단 이후, 그 가치가 배가되었다.
북송(北宋) 말, 공전은 《백첩》의 체제를 모방하고 당 이래 “시(詩)·송(頌)·명(銘)·찬(贊)과 기묘한 기록[詩頌銘贊 奇編奧錄]”을 취하여 분류·편집함으로써, 백거이의 《육첩》을 이은 《육첩신서》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또한 《후육첩(後六帖)》·《속육첩(續六帖)》(이하 《공첩(孔帖)》으로 칭함)이라고도 불린다. 30권으로 되어 있다. 남송 소흥(紹興)(1131~1162) 초기에 완성하였으며, 건도(乾道) 2년(1166)에 처음 판각하였다. 모두 1,371문으로 분류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백씨(白氏)’·‘공씨(孔氏)’를 앞에 붙여 칭함으로써 두 책을 구별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책을 자못 중시하였으나, 홍매(洪邁)가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속전(俗傳) 천박한 책이라 할 수 있는 《운선산록(雲仙散錄)》과 같은 유(類)는 모두 가장 가소로운 책이데, 공전의 《속육첩》은 그 책의 내용을 모두 기재하여 스스로 자신의 책을 더럽혔다.[俗傳淺妄書如雲仙散錄之類 皆絶可笑 孔傳續六帖悉載其中事 自穢其書]”라고 지적한 것으로 보아, 자료 인용 상에 있어 또한 정밀하지 못한 점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송백공육첩》은 위의 두 책을 합편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서명이다. 두 책은 원래 각 30권이었으나, 합편 이후에는 100권이 되었다. 《백첩》을 위주로 하고 《공첩》의 각 사류(事類)를 그 아래에 덧붙였다. 아울러 1,399문으로 분류하였다. 《백첩》보다는 32문이 많아졌으며, 《공첩》보다는 28문이 증가되었다. 각 문류(門類) 앞에 ‘白’자로 표지를 단 것은 백거이 책 중의 원문을 가리키며, ‘孔’자로 표지를 단 것은 공전 책 중의 원문을 가리킨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서 “이 책은 두 부의 책을 합편하여 한 부의 책으로 만들었는데, 누가 합쳤는지는 모른다. 또한 100권으로 만들었는데, 이 역시 누가 나누었는지 알 수 없다.[此本編兩書爲一書 不知何人所合 又作一百卷 亦不知何人之所分]”라고 하였다.
서명 중의 ‘육첩(六帖)’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백씨육첩》 송간본(宋刊本)은 수(數) 권(卷)을 합쳐 1책(冊)으로 하여 모두 6책으로 만들었는데, 각 책의 판심(版心)에 ‘첩일(帖一)’·‘첩이(帖二)’……‘첩육(帖六)’으로 표기를 해놓았다. 아마 이것이 곧 ‘육첩(六帖)’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아닌지 모르겠다. 정대창(程大昌)은 《연번로(演繁露)》에서 ‘육첩(六帖)’은 당 개원(開元) 연간의 과거(科擧)시험인 ‘첩경(帖經)’의 방법으로 인해 얻어진 이름이라고 여겼다. 《사고전서총목》은 “진사 첩경과는 절대로 상관이 없으며, 그 뜻을 어디서 취했는지는 상세하지 않다.[與進士帖經絶不相涉 莫詳其取義所在]”라고 하여 그것의 유래에 대해 의문의 태도를 유지하였다.
판본에 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대(淸代) 초기 계창위(季滄葦) 소장(所藏)의 송 소흥(1131~1162) 간본은 서명을 《백씨육첩사류집》이라 하였는데, 공전 속서(續書) 이전의 판본이다. 1923년 강안(江安) 부증상(傅增湘)이 그것을 구하였으며, 1933년 오흥(吳興) 장씨(張氏)가 그것을 100부 영인하였다. 부증상은 이 책을 영인하는 발문(跋文) 중에서 송본(宋本)과 통행본의 다른 점을 지적하였다. 이 발문은 《장원군서제기(藏園群書題記)》 권4에 보인다. 육심원(陸心源) 또한 송본을 가지고 있는데, 부증상이 영인한 것과 같다. 뒤에 일본(日本) 정가당문고(靜嘉堂文庫)로 들어갔다. 남송 초기에 양백암(楊伯嵒)이 《백첩》과 《공첩》의 미비한 점을 증보(增補)하기 위해 《육첩보(六帖補)》라는 책을 편찬하였는데, 모두 20권이나 되었다. 《육첩보》의 판본으로는 《사고전서》본이 있다. 《당송백공육첩》의 판본으로는 명대(明代) 가정(嘉靖) 간본과 《사고전서》본이 있다.
4. 내용
이 책은 각종 전적(典籍) 중의 성어·전고를 저록하고 있으며, 구절을 뽑거나 요점을 간추려서 놓았는데, 과거시험을 위한 종합적인 유서로 주로 시문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그 내용은 천문·지리·동물·식물·과학기술·정치·경제·문학·예술·역사·풍속 등등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자연계와 인간사회의 많은 방면을 언급하고 있으며, 아울러 백과전서와 자료 휘편(彙編)의 이중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현존본 《백공육첩》은 원래의 책과는 달리, 문류(門類)로는 나누어져 있지 않고 천여 개의 자목(子目)만이 있다. 매 조(條)마다 【白】·【孔】 두 글자로 두 책의 원문을 구분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이 책은 당대(唐代) 이전의 사료 및 당송의 시문(詩文)을 저록(著錄)하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당대 유서는 현존하는 것이 많지 않은데 《백씨육첩》이 그런대로 격식을 갖추고 있어서 유서의 내용과 형식의 변화를 탐구할 때 참고가 될 수 있다.
《백공육첩》은 기타 유서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고적(古籍) 일문(逸文)을 보존하고 있어 자연히 후세 학술연구에 있어 집일(輯逸) 방면에 일정한 공헌을 하였다. 예를 들면, 남당(南唐) 후주(後主) 이욱(李煜)의 시집은 일찍이 실전(失傳)되었는데, 《공첩》 중에서 그의 시 10구(句)를 여섯 군데서 인용하고 있다. 이 밖에 고서의 교감(校勘) 방면에서도 이 책은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당나라 위응물(韋應物)이 지은 〈장안우풍저(長安遇馮著)〉라는 시가 있는데, 《백공육첩》 권3 ‘춘(春)’문(門)의 《공첩》에서 이 시의 2구를 인용하고 그 아래에 위시(韋詩) 〈장안우빈자(長安遇貧者)〉라고 주를 달았다. 제목이 《위소주집(韋蘇州集)》과 다르다.
유서로서의 《백공육첩》은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많은 인용문에 대해 근본적으로 어떠한 해석도 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인들은 그것을 거의 이용할 수 없다. 둘째, 어떤 자료는 출처를 명기하지 않았거나, 혹은 단지 하나의 서명만을 명기하여 검색에 불편하다. 셋째, 어떤 자료는 비록 출처를 명기하였지만, 오히려 잘못 명기하였다. 예를 들면, 권1 ‘월(月)’문의 《공첩》에서 “嘗聞古老言 疑是蝦蟆精”과 “臣有一寸刃 可刳凶蟆腸” 등의 시구(詩句)를 인용하였는데, 이 시구들은 모두 한유(韓愈)의 〈월식시효옥천자작(月蝕時效玉川子作)〉에서 나왔다. 그런데 《공첩》은 오히려 이 시구들을 이백(李白)의 〈고풍(古風)〉 인문(引文) 뒤에 두고 ‘同上’이라고 표기하였다. 이 사실은 이 시구들이 이백의 〈고풍〉에서 나온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규장총목(奎章總目)》 유사류(類事類)에는 중국본 유서 32종(유서가 아닌 책도 있음)이 저록되어 있는데, 《백공육첩》이 그중의 하나에 속한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이리[狽]는 앞다리가 너무 짧아 길을 갈 때마다 늘 두 마리의 이리[狼]를 타고 가니, 이리[狼]를 잃어버리면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일이 어그러진 것을 일러 낭패(狼狽)라고 칭한다.[狽前足絶短 每行常駕兩狼 失狼則不能動 故世言事乖 稱狼狽]” 《백공육첩·낭(狼)》
• “남조(南朝) 제(齊)나라 우원(虞愿)이 진안태수(晉安太守)를 하고 있었다. 군에서는 예로부터 비단뱀이 나왔는데 쓸개를 약으로 쓸 수 있었다. 이 뱀을 우원에게 선물로 준 자가 있었는데 우원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30리 밖에 놓아주었다. 하룻밤이 지나자 다시 옛날 있던 곳으로 왔는데, 우원이 다른 곳으로 보내게 하자 또 다시 돌아왔다. 논자(論者)들이 어진 마음이 가져온 결과라고 여겼다.[齊虞愿爲晉安太守 郡舊出蚦蛇 膽可爲藥 有以此蛇餉愿者 愿不忍殺 放三十里外 經宿 復來故處 愿使送他處 又復歸 論者以爲仁心所致]” 《백공육첩·사(蛇)》
• “창희(昌狶)가 우금(于禁)에게 항복하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태조(太祖)에게 마땅히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우금은 또 창희와 친분이 있었지만 우금이 ‘제공(諸公)들은 명령을 듣지 못했는가? 포위한 뒤에 항복하면 용서하지 않는 것이니 비록 친분이 있으나 감히 법을 어길 수 없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베었다.[昌狶降于禁 諸將皆以當送太祖 禁又與狶有舊 禁曰 諸公不聞令乎 圍而後降 不赦 雖舊不敢失法 泣涕斬之]” 《백공육첩·항(降)》
(2) 색인어:백공육첩(白孔六帖), 당송백공육첩(唐宋白孔六帖), 백거이(白居易), 백씨육첩사류집(白) 氏六帖事類集, 공전(孔傳), 육첩신서(六帖新書), 육첩(六帖), 부증상(傅增湘), 육심원(陸心源), 양백암(楊伯嵒), 육첩보(六帖補), 유서(類書)
(3) 참고문헌
• 한·중 유서문화 개관(최환, 영남대학교출판부)
• 中國類書槪說(劉葉秋 지음, 金長煥 옮김, 학고방)
• 中國古代的類書(胡道靜, 中華書局)
• 中國類書(趙含坤, 河北人民出版社)
• 〈試論《白孔六帖》的幾個問題〉(宋建昃, 《河南大學學報》(社會科學版) 2001年 01期)
• 〈《白孔六帖》校補劄記〉(李文瀾, 《魏晉南北朝隋唐史资料》 2014年 00期)
• 〈《白氏六帖事類集》之‘六帖’考〉(張雯, 《古籍整理研究學刊》 2019年 03期)
【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