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법언》은 서한 말기에서 동한 초기에 활동했던 양웅(楊雄)이 자신에게 묻는 각종 질문과 그것에 답한 내용을 정리하여 엮은 책이다. 서한 말기의 혼란한 시기에 많은 제자(諸子)들이 각기 자신들의 지식으로 시대를 역행하게 하고 성인들을 비방하며, 교묘한 말로 궤변을 늘어놓아 시정(時政)을 교란시키고, 대도(大道)를 무너뜨리고 대중들을 미혹하여 스스로 그릇된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성인들과 견해가 판이하게 다르고 시비관념도 경서(經書)와 현저하게 다른 것을 목도한 양웅은 유가(儒家) 경전(經典)의 말로 바로잡기 위해 성인 공자(孔子)의 《논어(論語)》를 모방하여 《법언》을 저술하였다. 아울러 평소 한대의 사부(辭賦)가 더 이상 본래의 풍간(諷諫)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 강력한 유가의 정통적 유가학자 입장에서 ‘선왕(先王)이 전하는 규범의 말인 경전’을 부각시키고자 정치와 경제·사회·역사·문화·교육·군사·문학·예술·과학·고금의 인물·역사사건·제자백가·고전문헌 등의 제도와 문물을 총망라해서 서술하였다. 천하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공자와 맹자(孟子)에 근거하여 유가의 법도와 규범을 다시 세우고자 한 대유학자의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세상에 대한 성찰을 엿볼 수 있다.
2. 저자
(1)성명:양웅(楊雄)(B.C. 53∼A.D. 18)
(2)자(字)·별호(別號):자는 자운(子雲).
(3)출생지역:촉군(蜀郡) 성도(成都)(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 비현(郫縣) 우애진(友愛鎭))
(4)주요활동과 생애
양웅은 서한 선제(宣帝) 감로(甘露) 원년에 나서 왕망(王莽) 천봉(天鳳) 5년에 죽었으니, 서한 말기부터 왕망이 건국한 신(新) 왕조 시기를 살았던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부가(辭賦家)·언어학자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박학다식하였으나 말을 더듬어 유창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사부에 능하였다. 40여 세에 경사(京師)로 나아가 낭(郎)이 되었다. 양웅은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어도 영리(榮利)를 도모하지 않고 욕심이 없었다. 문장(文章)으로 황제인 성제(成帝)의 눈에 띄어 급사황문(給事黃門)이란 관서(官署)의 말단 관리로 들어갔으며, 이후 서한 왕조에서는 성제를 거쳐 애제(哀帝)·평왕(平王)을 차례로 섬겼다.
그는 공자에게 뿌리를 두며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도통(道統)을 계승하는 유자(儒者)로 자처하였으나, 특히 순자가 제기한 ‘원도(原道)’와 ‘징성(徵聖)’·‘종경(宗經)’의 관점을 새롭게 확대 발전시켰다. 《법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문예이론의 범주에 포함된 내용들도 적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만년에는 오로지 철학과 저술 활동에만 몰두하다가 71세에 죽었는데, 《한서(漢書)》 권87 〈양웅전(楊雄列傳)〉에 자세한 생평(生平)이 전한다.
(5)주요저작
양웅의 주요 저작에는 철학 저서인 《태현경》과 《법언》 외에도 언어학 저서로 《훈찬편(訓纂篇)》이 있고, 최초의 방언학 저서인 《방언(方言)》이 있다. 문집에는 명대(明代) 장부(張溥)의 《한위육조백삼가집(漢魏六朝百三家集)》에 《양시랑집(楊侍郞集)》이 전하고, 청대 엄가균(嚴可均)이 집록한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의 《전한문(全漢文)》의 권51~54에 양웅의 전체 저작과 일부 고서에 흩어진 단락과 잔본(殘本)들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한서》 〈예문지〉에는 양웅의 부(賦) 12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존하는 10편은 대부분 모방 작품이다.
양웅은 평소 사마상여가 지은 부(賦)는 체재가 넓으면서도 크며 문체의 수식이 풍부하면서도 전아(典雅)해서 마음속으로 훌륭하다고 흠모했다. 심지어 마치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신령한 조화가 이른 것인가?”라고 할 정도로 늘 그의 작품을 모방하고 그의 작품을 본보기로 삼았다. 그래서 사마상여의 〈상림부(上林賦)〉와 〈자허부(子虛賦)〉를 모방한 〈감천부(甘泉賦)〉와 〈우렵부(羽獵賦)〉·〈장양부(長楊賦)〉·〈하동부(河東賦)〉 등을 지었는데, 이 작품들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한대(漢代)의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모방하여 지은 〈반이소(反離騷)〉를 통해 굴원이 멱라(汨羅)강에 투신자살한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반복해서 설명하면서 자신의 인생관을 피력하였다. 아울러 동방삭(東方朔)의 〈답객난(答客難)〉을 모방해서 지은 〈해조(解嘲)〉와 〈해난(解難)〉을 지었다. 개천설(蓋天說)의 부당함을 논하고 혼천설(渾天說)을 주장한 〈난개천팔사(難蓋天八事)〉를 지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다른 저작인 《창힐훈찬(蒼頡訓纂)》 같은 자서(字書)와 《속사기(續史記)》 같은 역사서는 실전(失傳)되었다. 남조의 동진(東晉) 영화(永和) 11년(355년)에 상거(常璩)가 편찬한 《화양국지(華陽國志)》 〈서지(序志)〉에 양웅의 《촉왕본기(蜀王本紀)》라는 사서(史書)가 있었음이 보이는데, 《관잠(官箴)》 같은 작품처럼 잔문이 일부 전하고 있다. 양웅은 대학자로서 역량을 발휘하여 《우잠(虞箴)》을 본떠 《주잠(州箴)》을 저술했고, 《한서》 〈예문지(藝文志)〉의 유가류(儒家類)에는 그의 저술로 《악(樂)》 4편이 보이며, 고전의 주석에도 조예가 깊어 《맹자(孟子)》의 주석도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3. 서지사항
《법언》은 ‘법도(法度)에 맞는 말’이란 의미이고, 《양자법언(楊子法言)》이라 일컫기도 한다. 《한서》 〈양웅전〉에는 양웅이 경서를 제외한 유가의 서적 가운데 《논어》보다 더 위대한 것이 없다고 여겨 이를 모방해 《법언》을 지었다고 했고, 13편의 편명과 저술의도가 기록되어 있다. 《법언》의 편장 구조는 〈학행(學行)〉·〈오자(吾子)〉·〈수신(修身)〉·〈문도(問道)〉·〈문신(問神)〉·〈문명(問明)〉·〈과견(寡見)〉·〈오백(五百)〉·〈선지(先知)〉·〈중려(重黎)〉·〈연건(淵騫)〉·〈군자(君子)〉·〈효지(孝至)〉의 13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에 《법언》을 저술한 이유를 밝힌 서문(序文)이 덧붙여 있다. 각 편은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대부분이 문답이나 해설 혹은 반박 등으로서 양웅 자신이 교학(敎學)했던 상황을 반영하거나 스스로 질문을 하고서 그에 답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법언》은 《논어》처럼 각 편의 첫머리에 나오는 두 글자를 취해 편명(篇名)을 지었을 뿐,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법언》의 주해(注解)는 진(晉)나라 이궤(李軌)에 의해 이뤄졌고, 가장 오래된 판본은 송 치평(治平) 2년(1065)의 국자감 각본이며, 이 판본의 끝에는 작가 미상의 《법언음의(法言音義)》가 실려 있다.
송대에 사마광(司馬光)은 이궤의 주해본과 당대(唐代)의 유종원(柳宗元), 송대의 송함(宋咸)과 오비(吳秘), 자신의 주석을 합해 《법언집주(法言集注)》를 지었는데, 흔히 ‘오신주본(五臣注本)’이라고 부른다. 이 판본은 송대 이후 유행했고, 특히 명대(明代)에 이르러 세선당(世善堂) 고춘(顧春)이 《육자전서(六子全書)》에 수록한 《찬도호주양자법언(纂圖互注楊子法言)》이 널리 유포되었다. 청대 유월(兪樾)이 교감(校勘)한 《양자법언평의(楊子法言平議)》는 《제자평의(諸子平議)》에 수록되어 있다. 1933년에 왕영보(汪榮寶)가 이궤 이후의 모든 주석과 교감을 참조하고, 경사자집에 걸친 모든 영역의 문헌들을 섭렵해서 자신의 주석과 판단으로 《법언》에 가장 신뢰할 만한 주석서를 만든 것이 《법언의소(法言義疏)》인데, 오늘날 가장 신뢰할 만한 판본이다.
4. 내용
《법언》은 형식적으로 《논어》의 문답 형식을 통해 학문과 인생을 밝히고 있다. 《법언》의 출발점은 전통적인 유학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제자(諸子)들의 학설 중에 계승할 것은 계승하고 혁신할 것은 혁신하였으며, 공자와 맹자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법언》에서 양웅은 당시에 유행하던 천인감응(天人感應)과 참위신학(讖緯神學)의 미신을 강렬하게 반대하였다. 맹자의 천명순환론(天命循環論)도 반대하였는데 이는 공자의 도에 대한 왜곡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둘째, 양웅은 천명(天命)과 인사(人事)의 범주를 구분하였다. 천명은 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행하는 것이 없지만, 인사는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 결정하기 때문에 “존재하거나 없어질 수도 있고, 살거나 죽을 수도 있다.[可以存亡 可以死生]”(〈문명(問明)〉)고 하였다. 인류 사회의 역사는 부단히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 것은 날로 새롭고[爲政日新]”(〈선지(先知)〉), “경전도 삭제하거나 더할 수 있다[經可損益]”(〈문신(問神)〉)는 결론을 도출하여 전통 유학을 개조하는 이론적인 무기로 삼았다.
셋째, 양웅은 ‘선악(善惡)이 혼재(混在)’하는 인성론(人性論)을 제기하였다. 그는 사람이 출생할 때부터 완벽하고 성숙한 본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행위와 노력에 따라 인성도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차원에서 배움의 행위가 곧 인격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여겨 “배우면 단정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삐뚤어지게 된다.[學則正 否則邪]”(〈학행(學行)〉)”고 하였다. 즉, 배움을 통해 지식을 계속해서 습득하고 확대시켜 나가면 천지의 변화와 나라의 흥망성쇠까지 예측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당시에 유행하던 천인감응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한 재이설(災異說) 및 연금술(鍊金術), 장생술(長生術) 등에 대해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던 양웅이 기존 유가의 특정 학파나 학통에 귀속되기보다는 자신의 고유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취사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5. 가치와 영향
양웅의 《법언》은 한나라의 《논어》로 불리고, 주자가 편찬한 성리학 해설서인 《근사록》은 송나라의 《논어》로 불린다. 공자의 《논어》와 아울러 3대 《논어》로 병칭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양웅은 학자 겸 문인으로서 한나라의 유학을 부흥시켰다는 평가와 함께 동한(東漢)의 왕망(王莽)을 찬미하는 글을 짓고 왕망 정권에 협조한 것으로 인해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와 북송의 소식(蘇軾),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등에게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지탄과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법언》은 내용이 풍부하고, 견해와 관점이 심오하면서도 해박하여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비주의적 세계관이나 예언(豫言), 참위설(讖緯說)에 반대하였던 동한(東漢)의 환담(桓譚)과 왕충(王充)·장형(張衡)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유가적 대의명분을 주창한 당대(唐代)의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과 왕안석(王安石) 등에게도 존숭을 받았으며, 그들의 철학과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양웅은 사부가로 유명해져서 벼슬살이도 하였지만, 만년에는 사부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사부를 짓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벌레 모양을 새기는 것과 같다.……장부(壯夫)가 되어서는 그것을 짓지 않는다.[童子雕蟲篆刻……壯夫不爲也]”(〈오자(吾子)〉)고 하였고, 또 “시인의 부는 화려하면서 법도에 맞지만, 사인의 부는 화려하면서도 지나치게 수식되어 있다.[詩人之賦 麗以則 辭人之賦 麗以淫]”(〈오자(吾子)〉)는 견해를 피력하여 초사와 한부의 우열과 득실을 논하였는데, 이러한 평론은 사부의 발전과 후세 부에 대한 평가에 일정 정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유협(劉勰)과 한유(韓愈)의 문학이론에 대한 영향은 지대했다.
양웅은 산문(散文)에도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 그가 지은 〈상서간물허선우조(上書諫勿許單于朝)〉는 한편의 우수한 정론문(政論文)인데, 필력이 굳세면서 정련(精鍊)되어 있고, 언어는 평범하지만 기세는 막힘이 없으며, 이치를 전개한 것은 치밀하였다. 《법언》은 《논어》를 모방하였으므로 문학기교는 선진(先秦)시기 제자(諸子)의 우수함을 계승하였고, 말은 간단하지만 의미는 풍부하므로 당대(唐代) 고문가(古文家)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양웅은 연주체(連珠體)를 처음으로 쓰고 지은 사람인데, 후세에 본받아 쓴 작가들이 매우 많았다. 《법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문예 이론의 범주에 포함된 내용들도 적지 않다. 《법언》에서 문학은 응당 ‘유가의 경서를 으뜸으로 삼고[宗經]’, ‘유가의 성인을 증거로 삼으며[徵聖]’, 유가의 저작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6. 참고사항
(1)명언
• “사람이 〈예의를〉 배우지 않으면 근심이 없더라도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人而不學 雖無憂 如禽何]” 〈학행(學行)〉
• “말하는 것이 경박하면 우환을 부르고, 행동이 경솔하면 죄를 부르고, 행동거지가 가벼우면 치욕을 부르고, 좋아하는 것이 가벼우면 음란을 부른다.[言輕則招憂 行輕則招辜 貌輕則招辱 好輕則招淫]” 〈수신(修身)〉
• “성인은 자신의 원칙을 중시하지만 자신의 봉록은 가볍게 여기고,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봉록은 중시하지만 자신의 원칙은 경시한다.[聖人重其道而輕其祿 衆人重其祿而輕其道]” 〈오백(五百)〉
• “군자는 벼슬하러 나가면 자신의 주장을 실행하려 하지만, 집에 거하면 자신의 이상을 밝히려 한다. 일을 함에 싫어하지 않고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한가로운 날이 있겠는가?[君子仕則欲行其義 居則欲彰其道 事不厭 敎不倦 焉得日]” 〈오백(五百)〉
(2)색인어: 양웅(楊雄), 법언(法言), 정통유가(正統儒家), 이궤(李軌), 사마광(司馬光), 왕영보(汪榮寶), 법언의소(法言義疏).
(3)참고문헌
• 法言義疏(汪榮寶, 中華書局, 1993)
• 諸子平議(兪樾, 中華書局, 1997)
• 楊雄集校注(張震澤 校注, 上海古籍出版社, 1993)
• 楊雄文集箋注(鄭文 箋注, 巴蜀書社, 2000)
• 楊雄集校注(林貞愛 校注, 四川大學出版社, 2001)
• 法言全譯(文白對照諸子集成, 廣西敎育出版社 外2出版社, 1995)
• 太玄校注(劉韶軍 著, 華中師範大學出版社, 1996)
• 法言注(韓敬, 中華書局, 1997)
• 法言全譯(韓敬, 巴蜀書社, 1999)
• 法言(이연승,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4)
【이장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