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사문유취(事文類聚)》는 중국 상고시대로부터 송대(宋代)까지의 고금의 사실과 시문(詩文)을 모아 분류한 백과사전식의 유서(類書)이다. 《사문유취》의 초기본은 주희(朱熹)의 제자였던 송(宋)나라 축목(祝穆)이 전집(前集) 60권, 후집(後集) 50권, 속집(續集) 28권, 별집(別集) 32권으로 편찬하였다. 후에 이를 기초로 원(元)나라 부대용(富大用)이 신집(新集) 36권, 외집(外集) 15권을 보충하였고, 또 원나라 축연(祝淵)이 다시 유집(遺集) 15권을 보충하였다. 초기본 《사문유취》의 정식 명칭은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이고 증보본 《사문유취》의 정식 명칭은 《신편고금사문유취(新編古今事文類聚)》이다. 편의를 위해 흔히 《사문유취》라고 부른다.
2. 편자
(1) 성명:축목(祝穆)(?~1255)
(2) 자(字)·호(號):어릴 때 이름은 병(丙)이고 자는 백화(伯和)·화보(和甫)이며 만년에 스스로를 장은노인(樟隐老人)이라 칭하였다. 시호는 문수(文修)이다.
(3) 출생지역:송나라 때 신안(新安)(안휘(安徽) 흡현(歙縣))
(4) 주요활동과 생애
축목의 증조부인 축확(祝確)은 주희(朱熹)의 외조부이고, 부친 축강국(祝康國)은 주희의 외사촌 동생이다. 축목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숭안(崇安)에 이주하여 주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만년에는 복건의 건양(建陽)에 이주하여 방대한 유서인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와 종합 지리지 《방여승람(方輿勝覽)》을 편찬하였다. 축목은 저술 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판각(板刻)에도 힘써 많은 도서를 간행하였다. 그는 또 유명한 장서가이기도 하다.
(5) 주요저작:유서인 《사문유취(事文類聚)》 170권, 지리지인 《방여승람(方輿勝覽)》 70권 등
3. 서지사항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문유취(事文類聚)》의 각본(刻本)은 원대의 각본이다. 이 송대의 각본에는 원나라 축연(祝淵)이 증보한 유집(遺集)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축목(祝穆)이 초편(初編)한 전집(前集), 후집(後集), 속집(續集), 별집(別集)과 부대용(富大用)이 보충한 신집(新集)과 외집(外集)까지 들어 있다. 이보다 앞선 시기인 송대 각본(刻本)의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뒤 명대(明代)에 이르러 1604년에 당부춘(唐富春)이 교감하여 목판본으로 중각본(重刻本)을 냈다.
조선의 경우 《왕조실록》에 보면 1481년에 명(明)으로부터 《사문유취》 한 질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뒤로 4년 후인 1485년에 《사문유취》의 간행이 조정에서 논의되었다가 1493년에 조정의 주도로 금속활자 갑진자(甲辰字)로 간행되었다. 갑진자본 《사문유취》의 저본(底本)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지만, 남아 있는 영본(零本)으로부터 원대의 각본(刻本)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신묘년(辛卯年)인 1831년에 명나라 당부춘의 교감본을 저본으로 하여 《사문유취》를 번각하여 발행하였다. 이 신묘본(辛卯本)이 조선에서 가장 널리 유행하였다. 《사문유취》는 거질의 유서였으므로 여러 축약본과 초본(抄本)이 만들어졌다. 19세기 즈음부터는 축약본은 《사문유취초(事文類聚抄)》, 《상교사문유취초(詳校事文類聚抄)》 또는 《사문초(事文抄)》 등의 이름으로 축약본이 간행되었는데, 모두 상업적 이익을 염두에 둔 방각본이다.
신묘본을 기준으로 《사문유취》는 목록 1책, 전집(前集) 60권 16책, 후집(後集) 50권 14책, 별집(別集) 32권 9책, 신집(新集) 36권 10책, 속집(續集) 28권 10책, 외집(外集) 15권 5책, 유집(遺集) 15권 5책, 총 70책이다.
4. 내용
신묘본에 수록된 항목의 내용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각각의 집부(集部)마다 총부(總部)를 나누었고 다시 소목(小目)을 덧붙이고 조례(條例)에 따른 예문을 제시하고 있다. 각 부류(部類)마다 군서(群書)의 요긴한 말을 머리에 놓고, 다음에는 고금(古今)의 사실(事實)을 놓고 다음으로 고금(古今)의 문집(文集)에서 예문을 취하였다.
그중 전집은 총목(總目), 천도부(天道部), 천시부(天時部), 지도부(地道部), 제계부(帝系部), 인도부(人道部), 사진부(仕進部), 퇴은부(退隱部), 선불부(仙佛部), 민업부(民業部), 기예부(技藝部), 낙생부(樂生部), 영질부(嬰疾部), 신귀부(神鬼部), 상사부(喪事部)로 이루어졌다.
후집은 인륜부(人倫部), 창기부(娼妓部), 노복부(奴僕部), 초모부(肖貌部), 곡채부(穀菜部), 임목부(林木部), 죽순부(竹荀部), 과실부(果實部), 화회부(花卉部), 인충부(鱗蟲部), 개충부(介蟲部), 모린부(毛鱗部), 우충부(羽蟲部), 충치부(蟲豸部)로 이루어졌다.
별집은 유학부(儒學部), 문장부(文章部), 서법부(書法部), 문방사우부(文房四友部), 예약부(禮樂部), 성행부(性行部), 사진부(仕進部), 인사부(人事部)로 구성되었다.
신집은 삼사부(三師部), 삼공부(三公部), 성관부(省官部), 성속부(省屬部), 육조부(六曹部), 추밀원부(樞密院部), 어사대부(御史臺部), 제원부(諸院部), 국사원부(國史院部), 제사부(諸寺部), 제감부(諸監部), 전사부(殿司部), 제고국(諸庫局)로 이루어졌다.
속집은 거처부(居處部), 향차부(香茶部), 연음부(燕飮部), 식물부(食物部), 등화부(燈火部), 조복부(朝服部), 관리부(冠履部), 의금부(衣衾部), 악기부(樂器部), 가무부(歌舞部), 새인부(璽印部), 진보부(珍寶部), 기용부(器用部)로 이루어졌다. 다만 조선간본에서 속집은 신집 뒤에 위치한다.
외집은 동궁관부(東宮官部), 목친부부(睦親府部), 왕부관부(王府官部), 절사부(節使部), 총군사부(統軍司部), 제사사부(諸使司部), 제제거부(諸提擧部), 노관부(路官部), 현관부(縣官部)로 이루어졌다.
유집(遺集)은 삼사부유(三師部遺), 추밀원부유(樞密院部遺), 성관부유(省官部遺), 제원부유(諸院部遺), 동군관부유(東宮官部遺), 국사원부유(國史院部遺), 육조부유(六曹部遺), 사감부유(寺監部遺), 성속부유(省屬部遺), 봉작부유(封爵部遺), 왕부관부유(王府官部遺), 절사부유(節使部遺), 전사부유(殿使部遺), 총군사부유(總軍司部遺), 부사부유(府司部遺), 감사부유(監司部遺), 제제거부유(諸提擧部遺), 노관부유(路官部遺), 궁관부유(宮觀部遺)로 이루어졌다.
5. 가치와 영향
《사문유취》는 조선시대 전반을 거쳐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한 대표적인 유서(類書)이다.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에서는 중국의 많은 유서들 중에서도 주문(朱門)의 《사문유취》를 가장 존중하였다. 지금도 한국 내 여러 도서관에 다양한 판본과 여러 종의 필사본 《사문유취》가 소장되어 있어 《사문유취》가 널리 읽혔음을 증명해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수많은 중국서적이 조선에 유입되었지만, 《사문유취》와 같이 유입된 후 곧바로 조정의 주도로 금속활자로 간행되었고 또 후대에 이르러서는 상업출판의 대표적인 형태인 방각본(坊刻本)으로 출시된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에 머물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비로움에 머문다.(《대학》)[爲人子止於孝 爲人父止於慈 大學]” 《사문유취·후집》 권4, 〈인륜부〉
• “아버지가 그것을 짓고, 자식이 그것을 계승했다.(《중용》)[父作之 子述之 中庸]” 《사문유취·후집》 권4, 〈인륜부〉
(2) 색인어: 사문유취(事文類聚), 축목(祝穆), 유서(類書), 신편고금사문유취(新編古今事文類聚),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부대용(富大用), 축연(祝淵)
(3) 참고문헌
• 《韓國文獻學硏究-國文學硏究의 基礎》(류탁일, 서울 아시아문화연구, 1989)
• 〈《事文類聚》考略-朝鮮嶺營新刊本을 중심으로〉(민경삼, 《中國語文論叢》18, 2000)
• 〈《新編古今事文類聚》에 관한 一考察 : 萬曆 壬辰版과 관련하여〉(박경안, 《경기향토사학》 제10집, 2005)
• 〈《事文類聚》的成書與版本〉(沈乃文, 《文獻》, 2004)
• 〈《事文類聚》의 조선 수용과 전개-관판본으로부터 방각본, 필사본에 이르기까지-〉(최영화, 《열상고전연구》 52, 2016)
【최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