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설부(說郛)》는 원말명초(元末明初) 도종의(陶宗儀)가 편찬한 총서(叢書)이다. 한위(漢魏) 시대부터 원대(元代)까지의 경사(經史), 전기(傳記), 잡기(雜記), 시화(詩話) 등을 초록한 것이다. 도종의가 생전에 편찬한 100권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유통되는 《설부》는 명초본(明抄本)을 모아 후대에 편찬한 것으로 100권본과 120권본이 있다.
2. 저자
(1) 성명:도종의(陶宗儀)(1322~1403)
(2) 자(字)·호(號):도종의의 자는 구성(九成), 호는 남촌(南村)이다.
(3) 출생지역:황암(黃岩) 청양(清陽(현 중국 절강성(浙江省) 태주시(台州市) 노교(路橋)))
(4) 주요활동과 생애
도종의는 원(元)나라 지정(至正) 8년(1348) 33세 때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였으나 낙제하였다. 그 후 절동(浙東)과 절서(浙西)를 돌아다니며 장저(張翥), 이효광(李孝光), 두본(杜本)을 사사했다. 시문을 지을 때에는 모두 법도가 있었고 또한 자학(字學)에 매진하였다. 절동선위사 도원수(浙東宣慰使都元帥) 태불화(泰不華)와 남대어사(南臺御史) 축려(丑驢)가 행인(行人)과 교관(教官)으로 그를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도종의는 모두 거절하였다. 명(明)나라가 들어서자 홍무(洪武) 4년(1371) 조서로 천하의 인재들을 불러들이라 하였는데 추천하는 자가 모두 도종의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홍무 29년(1396) 문하생들을 이끌고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여 《서경(書經)》 〈대고(大誥)〉를 읽고 초전(鈔錢)을 하사받고 돌아왔다. 운간(雲間)(현재 상해(上海) 송강(松江))에 은거하면서 평생 저술활동에 힘썼으며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소전(小篆)에 능하였다.
(5) 주요저작:《철경록(輟耕錄)》, 《서사회요(書史會要)》, 《남촌시집(南村詩集)》, 《국풍존경(國風尊經)》, 《사거비유(四書備遺)》, 《고당류원(古唐類苑)》, 《초망사승(草莽私乘)》, 《유지속편(遊志續編)》, 《고각총초(古刻叢鈔)》, 《원대액정기(元代掖庭記)》, 《금단밀어(金丹密語)》, 《창랑탁가(滄浪棹歌)》, 《순화첨고(淳化帖考)》를 지었고 《설부(說郛)》 100권을 편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3. 서지사항
급고각구장(汲古閣旧蔵)의 명초본((明抄本)(현재 임해시박물관(臨海市博物館) 소장))은 66권으로 366종의 책이 수록되어 있다. 급고각본에 실려 있는 양유정(楊維楨) 서문에 의하면 “천태(天台)의 도군(陶君) 구성(九成)이 경사(經史), 전기(傳記)부터 아래로는 백가(百家)들의 잡설의 책 천여 가(家)에 이르기까지 취하여 60권을 편찬하였는데 모두 수 만여 조로, 이름 붙이기를 ‘설부’라고 하였다. [天台陶君九成取經史傳記 下迄百氏雜說之書千餘家 纂成六十卷 凡數萬餘條 名之曰說郛]”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서문 끝에 ‘지정 신축년 가을 9월 망전 2일[時至正辛丑 秋九月望前二日]’이라고 한 것을 통해 이 초본이 원 순제(順帝) 때인 1361년 전에 성립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손작(孫作)의 《창라집(滄螺集)》에 실려 있는 〈도선생소전(陶先生小傳)〉과 함분루본(涵芬樓本)의 양유정의 서문에 따르면 도종의가 생전에 《설부》를 증보하여 100권으로 편찬하였다고 하였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원・명대까지 《설부》는 초본의 상태로 전해졌기 때문에 여러 판본으로 유통되었다. 1927년에 경사도서관(京師圖書館(현재 중국국가도서관))의 주임이었던 장종상(張宗詳)이 급고각본을 제외한 명초본들(북평도서관(北平圖書館)의 만력간초본(萬曆間抄本), 쌍감루(雙鑑樓)의 명초본 3종, 함분루(涵芬樓)의 명초본, 서안옥해루(瑞安玉海樓)의 명초본)을 교감하여 상해상무인서관(上海商務印書館)에서 출판하였다. 일명 함분루본이라고 불리며 100권 725종의 책이 수록되어 있는데 앞의 30권은 전술한 급고각본의 것과 대부분 일치한다.
한편 명 숭정(崇禎) 연간에 도정(陶珽)은 여러 명초본을 참고하여 항주 완위산당(宛委山堂)에서 120권의 《설부》를 간행하였다. 일명 완위산당본이라고 불린다. 이 판본은 총 1,360종 중 124종의 경우 서명만 있고 내용이 없으며 장종상의 100권본과 비교하면 206종이 빠져 있다. 또한 이 판본은 청 순치(順治) 4년(1647)에 중간(重刊)되었으나 청조의 검열로 북방민족에 대한 서적이 누락된 채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었다. 도정은 후에 《속설부(說郛續)》 46권도 출판하는데 이는 도종의 사후 명대 필기류를 모은 것이다.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가 1988년에 출판한 《설부삼종(說郛三種)》은 장종상의 100권본과 도정의 120권본 및 《속설부》를 포함하여 편찬된 것이다.
4. 내용
설부(說郛)라는 서명(書名)은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문신(問神)〉에 “혹자가 물었다. ‘성인의 경전(經典)은 사람들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할 수 없습니까?’ 양자가 말하였다.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늘을 만약 잠깐 사이에 잴 수 있다면 만물을 덮어주는 것이 얕을 것이고, 땅을 만약 잠깐 사이에 측량할 수 있다면 만물을 실어주는 것이 엷을 것이다. 위대하도다. 천지는 만물을 둘러싸는 성곽이며, 오경(五經)은 여러 학설을 포용하는 성곽이다.’[或問 聖人之經不可使易知與 曰 不可 天俄而可度 則其覆物也淺矣 地俄而可測 則其載物也薄矣 大哉 天地之爲萬物郭 五經之爲衆說郛]”라고 한 것에서 나왔다. 즉 ‘설부’란 오경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학설을 모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도종의는 《설부》에 진한(秦漢)부터 송원(宋元)까지의 경사전기(經史傳記), 각종 잡서(雜書), 고고박물(考古博物), 산천풍토(山川風土), 충어초목(蟲魚草木), 시사평론(詩詞評論), 고문기자(古文奇字), 기문괴사奇聞怪事 등의 폭넓은 분야를 망라하여 초록(抄錄)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설부》는 현재 원본이 소실된 《수신기(搜神記)》, 《노학암속필기(老學庵續筆記)》, 《사시(事始)》, 《속사시(續事始)》 등과 같은 서적을 수집, 요약하였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있다. 특히 중국 당대(唐代) 소설 연구에서 작품 내용의 교감, 작자 고증 등의 분석에 주요 사료로써 인용된다.
조선에서는 권문해(權文海)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수(卷首) 〈편집서적목록(纂輯書籍目錄) 중국제서(中國諸書)〉에 인용문헌으로 《설부》를 실었다. 허균(許筠)도 《한정록(閑情錄)》 제1문(門) 〈은둔(隱遁)〉의 순창산인(順昌山人)조와 13문 〈현상(玄賞)〉의 조자고(趙子固)조에 《설부》를 인용하였음을 밝혔다. 그 외에도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에서도 《설부》를 인용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설부》를 29개의 조목에 걸쳐 인용하고 도정의 《속설부》 역시 5개의 조목에서 인용하였다.
한편 홍직필(洪直弼)은 그의 문집 《매산집(梅山集)》에서 욱문박(郁文博)이 《설부》를 교정한 후 지은 시에 차운(次韻)하였는데, 그 시에서 “마음을 바르게 갖는 것이 참된 유자이니, 어찌 정신을 수고스럽게 하여 《설부》를 교정하였는가. 완물(玩物)은 예로부터 뜻을 잃게 하였으니 후인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구나.[用心端的是眞儒 何苦勞神較說郛 玩物由來都喪志 不知能補後人無]”라고 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배우는 자가 이 책을 얻으면 들은 바를 열게 되고 본 바를 넓히게 되는 것이 많을 것이다.[學者得是書 開所聞擴所見者多矣]” 《설부》 〈양유정(楊維楨) 서(序)〉
• “욱문박이 집에 머무르면서 도구성(陶九成)의 설부 120권을 교간(校刊)하고 스스로 시를 읊기를, ‘삼림에 숨어 사는 백발의 늙은 선비가 일 년 내내 만권루(萬卷樓)에서 설부를 교정하네. 안력과 심력 모두 다하였는데 후인들에게 유익할까 모르겠구나.[文博家居 校刊陶九成說郛一百二十卷 自賦詩云 白頭林下一耆儒 終歲樓間校說郛 目力心思俱竭盡 不知有益後人無]’라고 하였다.” 《전지유사(前志遺事)》
• “일찍이 책상 위에 《설부》를 놓아두었다. 객이 우연히 그 책 한 권을 뽑아 채소를 심는 것에 관한 말이 있는 것을 보고 물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설부》는 농사에 관한 책이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유가서 한 권을 얻어 빈 면에 잡병을 앓은 경험을 몇 조목으로 써놓았는데 객이 마침 보고는 의가서醫家書라고 여겼다. 이는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니 학식이 넓은 선비도 간혹 이러한 병통이 있다. 기효람紀曉嵐이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교감할 때에 권질이 너무 많아 두루 열람할 겨를이 없어 왕왕 한 두 군데를 우연히 들춰 보고 소홀히 하여 결국 그 전부라 단정하곤 하였다. 이 어찌 객이 《설부》를 본 것과 다르다 하겠는가. 세상에서 한 가지 일을 가지고 한 시대를 가늠하고, 한 마디 말로 한 사람을 단정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은 종류이다.[嘗丌寘說郛 客偶抽其一卷 見有種菜語 退告人曰 說郛農圃書也 又嘗得儒書一冊 有錄雜病經驗數條于其空葉者 客適見以爲毉家書 是誠陋者耳 博雅之士 亦或有此病 紀曉嵐校勘四庫全書 編袟浩瀚 未暇編閱 往往偶摘其一二疎失 遂蔽其全部 是何異客之觀說郛者耶 世之以一事盖一時 一言蔽一人者 皆此類也.]” 《수여삼필(睡餘三筆)》
(2) 색인어:도종의(陶宗儀), 도정(陶珽), 욱문박(郁文博), 설부삼종(說郛三種), 양유정(楊維楨), 장종상(張宗詳)
(3) 참고문헌
• 說郛三種(陶宗儀等編, 上海古籍出版社)
• 南村輟耕錄(陶宗儀, 木鐸出版社)
• 説郛版本諸説と私見(倉田淳之助, 東方学報 卷25, 1954)
• 汲古阁藏明抄六十卷本《说郛》考述(徐三见, Southeast Culture No.6, 1994)
• The Textual History of Tao Zongyi’s Shuofu: Preliminary Results of Stemmatic Research on the Shengwu Qinzheng Lu(Christopher P. Atwood, Sino-Platonic Papers, no.271, 2017)
【박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