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정관응(鄭觀應)은 청말민초(淸末民初) 광동(廣東) 향산현(香山縣) 사대부집안 출신으로 과거(科擧)에 실패한 뒤 상업에 뛰어들어 외국회사의 매판(買辦)으로 활동했다. 서양세력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에서 성장한 까닭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외국 문화를 접했고 이후에도 매판으로서 상업 최전선에서 서양의 선진 상업기술을 배웠다. 1882년, 대신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중국 최초의 신식 기업인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 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직간접적으로 상해 기기직포국(上海機器織布局), 개평탄광(開坪炭鑛) 운영에 참여하여 매판으로서 얻은 경영 지식을 중국 최초의 공사(公司) 운영에 접목시켰다. 그리고 이때 얻은 경험과 시국에 대한 생각을 집대성하여 1894년 《성세위언(盛世危言)》 5권 (정문(正文) 57편, 부록과 후기 30편을 합쳐 모두 87편)을 출간했다.
현실에 대한 단편적인 지적이 아닌 전반적인 서양의 정치, 경제시스템에 주의한 것이어서 출판되자 황제는 물론 양무운동을 이끌던 관료들과 일반 백성들까지 《성세위언》 읽기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뒤이어 중국은 갑오전쟁에서 일본에 패했고, 강유위(康有爲)의 무술변법(戊戌變法)이 수구파들의 반대로 실패하자 중국 조야(朝野)는 더욱 새로운 중국 모습에 목말라 하였고 정관응의 시의적절하고 현실적인 대안은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다.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8개국 연합군이 북경(北京)을 침범한 직후 출간된 《성세위언》 수정판은 10여 만 권이 넘게 팔림으로써 중국 근대 출판사에서도 중요한 획을 그었다.
2. 저자
(1) 성명:정관응(鄭觀應) (1842~1922)
(2) 자(字)·별호(別號):자는 정상(正翔), 호는 도제(陶齊) 혹은 거역(居易).
(3) 출생지역:광동성(廣東省) 향산현(香山縣)
(4) 주요활동과 생애
정관응은 남경 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842년 광동성 향산현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수차례 응시했다가 낙방하자 서당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아버지 밑에서 열여섯 살 때까지 유교 경전을 배웠다. 고향이 홍콩과 인접했기에 자연스럽게 외국 문화를 접했고 지인의 소개로 상해 외국회사에서 장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 20여 년간 매판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국가와 민족의 존망을 인식하게 되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첫 번째 저서인 《구시게요(救時揭要)》를 출간했다. 이후 두 번째 저서인 《역언(易言)》을 통해 양무운동에서 시작된 군비 확충 문제와 산업 발전, 광산 개발을 통한 자원 확보, 통신 시설의 확충을 포함하는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주장은 양무 관료 이홍장의 공감을 얻어 윤선초상국 운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진적이고 원칙적인 일처리 방식은 전통적 인맥관계에 익숙해있던 양무 관료들의 질시와 모함을 받아 1885년 홍콩 방문 중 사법 당국에 구금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세계 시장에 유동성 위기가 불어 닥치자 그가 관여했던 상해기기직포국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과감한 증자가 부실을 일으켰다는 여론 공격에 그는 심신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1892년 성선회(盛宣懷)의 요청으로 다시 초상국에 들어가 운영을 하면서 전반적인 사회제도 개혁을 다룬 《성세위언》을 집필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중심 사상이 중국 전통 사상에서 출발해 시대적 역사 인식을 거쳐 《역언》에서보다 훨씬 풍부하고 명확하고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그는 이미 세계가 무역 경쟁 체제에 돌입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1902년까지 10여 년간 초상국의 해운 업무를 관장하며 중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전신, 철로 등 근대화 사업에 깊숙이 참여하여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배경인 성선회가 원세개(袁世凱)와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자 초상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지지했고, 경제적으로 상인의 이익이 보장되어야만 민족 기업이 발전하여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민국성립 이후 이미 칠순을 넘긴 정관응은 초상국의 이사로 참여하는 것 외에 많은 시간을 교육에 쏟았다. 여전히 ‘商戰(무역전쟁)을 배우는 것이 兵戰(무력전쟁)을 배우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習兵戰不如商戰]’는 논지로 내실 있는 상업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잦은 병에 시달리던 정관응은 1922년 5월, 81세로 상해 초상국 관사에서 세상을 떠난 뒤 다음해 고향인 향산에 묻혔다.
(5) 주요저작:《구시게요(救時揭要)》, 《역언(易言)》, 《성세위언(盛世危言)》
3. 서지사항
《성세위언》의 판본은 20여 종에 이르러 중국 근대 출판사상 판본이 가장 많은 책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 1895년 이후 몇 년 동안 유신운동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독자들의 수요에 맞추어 앞다투어 출간을 했기 때문이다. 정관응의 손을 거쳤다고 확정할 수 있는 판본은 1894년 본, 1895년 증간본, 1900년 증간본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세위언》에 대한 연도별 개략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1894년 3월, 《성세위언》 5권(정문(正文) 57편, 부록과 후기 30편을 합쳐 모두 87편)이 굉도당(宏道堂)에서 출간되었다. 1895년 6월, 강소포정사(江蘇布政使) 등화희(鄧華熙)는 광서제(光緖帝)의 허가를 얻어 2,000부를 인쇄하여 대신들에게 읽도록 했다. 1895년 12월, 변방 강화와 상공업의 발전 문제 등을 보완하여 8권 증간본을 출간했다. 1896년 1월, 한림원 편수 채원배(蔡元培)는 ‘서양의 제도를 근간으로 근세의 문제를 잘 지적한 책[基于西方制度, 指近世題之書]’이라고 추천했다. 1897년 12월, 대신 장지동(張之洞)은 ‘적절한 진단을 한 책[良藥之方]’이라고 추천했다. 1898년 1월 상서 손가내(孫家鼐)는 광서제에게 추천했다. 1900년 가을, 〈의원(議院)〉을 특히 강조하고 〈원군(原君)〉, 〈자강론(自强論)〉을 통해 전제 독재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내용을 포함하여 14권으로 증간본을 출간했다. 1907년 9월 오문(澳門)(마카오)에서 《성세위언후편(盛世危言後編)》을 출간했다. 1910년 겨울, 《성세위언후편》을 3차례 수정하여 상해한화각서점(上海翰華閣書店)에서 인쇄하려 하였으나 마침 중화민국이 성립하자 비교적 큰 폭의 수정을 시도했다. 1921년 《성세위언후편(盛世危言後編)》이 마침내 상해한화각서점(上海翰華閣書店)에서 출간되었다.
4. 내용
이 책은 유생 출신으로 서양의 기업에서 매판으로 활동하여 당시 서양의 선진 상업 기술을 접한 정관응이 시대 상황과 중국 내부의 문제를 전통으로부터 시작하여 해결책을 제시한 책으로 부국강병, 백성들의 행복에 주안점을 맞추었다.
최초 판본에는 〈도기(道器)〉, 〈학교(學校)〉, 〈서학(西學)〉, 〈여교(女敎)〉, 〈고시상(考試上)〉, 〈고시하(考試下)〉, 〈장서(藏書)〉, 〈의원(議院)〉, 〈일보(日報)〉, 〈이치상(吏治上)〉, 〈이치하(吏治下)〉, 〈유력(游歷)〉, 〈공법(公法)〉, 〈통사(通使)〉, 〈금연상(禁煙上)〉, 〈금연하(禁煙下)〉, 〈전교(傳敎)〉, 〈판노(販奴)〉, 〈교섭(交涉)〉, 〈서리(書吏)〉, 〈염봉(廉俸)〉, 〈건도(建都)〉, 〈교양(敎養)〉, 〈훈속(訓俗)〉, 〈옥수(獄囚)〉, 〈의도(醫道)〉, 〈선거(善擧)〉, 〈세칙(稅則)〉, 〈국채(國債)〉, 〈상전(商戰)〉, 〈상무(商務)〉, 〈철로(鐵路)〉, 〈전보(電報)〉, 〈우정상(郵政上)〉, 〈우정하(郵政下)〉, 〈은행상(銀行上)〉, 〈은행하(銀行下)〉, 〈주은(鑄銀)〉, 〈개광(開鑛)〉, 〈방직(紡織)〉, 〈기예(技藝)〉, 〈새회(賽會)〉, 〈농공(農功)〉, 〈간황(墾荒)〉, 〈한요(旱潦)〉, 〈치하(治河)〉, 〈방해상(防海上)〉, 〈방해하(防海下)〉, 〈방변상(防邊上)〉, 〈방변하(防邊下)〉, 〈연병(練兵)〉, 〈수사(水師)〉, 〈선정(船政)〉, 〈민단(民團)〉, 〈화기(火器)〉, 〈미병(弭兵)〉 등을 논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성세위언》은 갑오전쟁 전후 중국 내에서 민족 위기감이 극도에 달했을 때 출간되어 사회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광서제는 이를 대신들에게 읽도록 명하였고 양무대신 장지동은 중국을 치료할 수 있는 좋은 처방이라 극찬했다. 이 책의 중요 내용들은 1898년 시작된 백일유신(百日維新) 이후 유신파는 물론 혁명파에게도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채원배,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손중산(孫中山) 모두 ‘商戰(무역전쟁)을 배우는 것이 兵戰(무력전쟁)을 배우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習兵戰不如商戰]’는 개념에 따라 ‘상업을 국가의 근간으로 삼는다[以商立國]’는 새로운 정책 수립을 주장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담론으로 논쟁하였지만 전통 관념과 시대적 변화에 따른 국제 질서 안에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함으로써 상층 지도층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6. 참고사항
(1) 명언
‧ “商戰(무역전쟁)을 배우는 것이 兵戰(무력전쟁)을 배우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習兵戰不如商戰]” 〈상전상(商戰上)〉
‧ “솜씨 좋은 아낙네가 쌀이 없다고 한탄만 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옛날 방식을 바꾸어 다른 사람에게 배워서라도 부국강병의 실제적인 효과를 볼 수 있어야 한다.[巧婦寧能爲無米之炊. 亟宜一變舊法,取法于人,以收富强之實效]” 〈상전하(商戰下)〉
‧ “부유해진 다음에야 강해질 수 있고 강해진 다음에야 부를 지킬 수 있다.[能富以後可以致强, 能强以後可以保富]” 〈상전하(商戰下)〉
(2) 색인어:정관응(鄭觀應), 성세위언(盛世危言), 상전(商戰), 변법(變法), 부강(富强)
(3) 참고문헌
‧ 鄭觀應集(夏東元, 上海人民出版社)
‧ 鄭觀應(夏東元, 廣東人民出版社)
‧ 盛世危言-난세를 향한 고언(鄭觀應 저, 이화승 옮김, 책세상)
‧ 〈習兵戰不如商戰-從盛世危言看鄭觀應的經濟思想〉(聶好春, 北京聯合大學學報,2006.9)
‧ 〈盛世危言硏究的進展與問題-鄭觀應盛世危言出版120周年學術硏討會側記(張中鵬, 近代史硏究, 2015)
【이화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