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상서정의(尙書正義)≫는 중국 당대(唐代)의 5가지 《경서(經書)》에 대한 관찬(官撰) 주석서(注釋書)인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한 책이다. 《오경정의》는 당의 태종(太宗)이 공영달(孔穎達)・안사고(顔師古) 등을 시켜 오경의 해석서를 만들게 하고 이와 같은 책 이름을 하사(下賜)하였으므로, 널리 한(漢)・위(魏)・육조(六朝)의 주석 속에서 적당한 설을 모았으며, 나중에 두 번의 교정(校正)을 거쳐 확정하였다. 이 가운데 《상서정의》는 공영달이 동진(東晉) 때 매색(梅賾)이 헌상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저본으로 한 것으로, 한(漢)나라 공안국의 전(傳)과 《금문상서(今文尙書)》의 내용이 포함되어 총 58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공영달의 소(疏)가 달려 있다. 모두 20권이다.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에 포함되어 있다.
2. 저자
(1) 성명:공영달(孔穎達)(574〜648)
(2) 자(字)・별호(別號):자는 충원(衝遠), 중달(仲達), 작호 곡부현공(曲阜縣公), 시호는 헌(憲).
(3) 출생지역:중국 허베이성(河北省) 기주(冀州) 형수현(衡水縣)
(4) 주요활동과 생애
공영달은 574년 북제(北齊)에서 공안(孔安)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공석(孔碩)이다. 8살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장성하면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씨상서(鄭氏尚書)》, 《왕씨역(王氏易)》, 《모시(毛詩)》, 《예기(禮記)》에 명석하였고, 아울러 역술과 산술에 뛰어났다. 대업(大業)(중국 수나라 양제(煬帝) 때의 연호(605~618)) 연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하내군(河內郡 )박사로 제수되었다. 당시 황제였던 양제가 천하에 널린 유학자들을 소집하면서 공영달도 여기에 참가하였다. 당시 공영달이 으뜸으로 나오자 선배 유학자들은 공영달을 못마땅하게 여겨 자객을 보내 공영달을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양현감이 공영달을 숨겨준 덕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뒤에 태학박사가 되었지만 당시 수나라의 정국이 양제의 실책으로 혼란해지자 전란을 피해 숨었다가, 당나라의 진왕인 이세민이 왕세충을 정벌할 때 공영달을 진왕부 학사로 천거하였다.
626년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황제로 즉위한 뒤, 공영달은 국자박사가 되었으며, 급사중으로 전임되었다. 공영달은 태종이 정무를 수행할 때 여러 차례 충언을 올려서 많은 예우를 받았다. 또한 632년에는 국자사업으로 제수되었고, 1년 뒤에는 태자우서자가 되고 국자사업을 겸임하였으며, 위징과 함께 수서의 편찬에 참여하여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638년에는 국자좨주가 되고 동궁의 시강으로 임명되어, 태자인 이승건을 보좌하면서 우지녕과 함께 이승건에게 수차례 간언을 올리기도 하였다. 643년에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났고, 648년에 세상을 떠나 태상경으로 추증되고 헌(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영달은 당나라의 유학자로서의 활동이 가장 돋보이는 편이다.
(5) 주요저작 : 《수서(隋書)》 및 《오경정의(五經正義)》 170권 공동편찬.
3. 서지사항
《상서》는 진 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 이후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으로 나뉘어 그 체제가 복잡하게 되었고, 《고문상서》에 대한 위작(僞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 위작 논쟁은 이후 동양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매색의 《고문상서》가 송대(宋代)를 거쳐 명청대(明淸代)에 위작으로 확증되면서 《위공전고문상서(僞孔傳古文尙書)》로 불리게 되었다. 동진(東晉) 때 매색이 헌상한 《고문상서》를 저본으로 하여 한나라 공안국의 위전(僞傳)과 《금문상서》의 내용이 포함되어 총 58편으로 이루진 《상서전(尙書傳)》은, 당나라 때 이르러 공영달이 《상서정의(尙書正義)》를 편정할 때 이것을 정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널리 세상에 통용되었다. 공영달의 소(疏)(정의(正義))가 달린 《상서정의》는 《오경정의》로 편입되면서 국학에 채택되었고, 송나라의 채침(蔡沈)의 《서경집전(書經集傳)》도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모두 20권이다. 청(淸)나라 완원(阮元)이 십삼경주소를 편찬할 때 《상서정의》를 저본으로 사용하였다. 이 책이 1,700년간 경전으로서 동양 사회에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들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높다.
4. 내용
《상서》는 동양의 가장 오래된 사서(史書)이자 공문서(公文書)이다. 이는 유학 최고(最古)의 경전(經典)으로 《서경(書經)》으로 불리기도 한다. 《상서》의 ‘상(尙)’은 ‘상(上)’의 뜻이며, ‘서(書)’는 사관(史官)이 기록한 글이나 공문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서’는 상고시대(上古時代)의 글이란 뜻이다. 《상서》는 〈우서(虞書)〉 5편, 〈하서(夏書)〉 4편, 〈상서(商書)〉 17편, 〈주서(周書)〉 32편으로 모두 58편이다. 여기에는 중국 전설상의 성군(聖君)인 요(堯)와 순(舜)에서부터 춘추(春秋)시대 열국(列國)의 기록까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공영달이 《오경정의》를 편찬할 때, 그 경학정신은 수대(隋代)의 통일 과정에서 정한 경학 의식을 답습하게 되었는데, 그 중 《상서정의》는 유현(劉炫)과 유작(劉焯)을 비롯한 의소가(義疏家)들을 참고하였다. 《상서정의》가 수나라 통일 후의 경학 정책인 북학 즉 ‘정현의 진고문학’을 방기(放棄)하고 남학 즉 ‘매색의 위고문학’을 종주로 하였던 것은 바로 치도治道를 견합牽合하여 통일된 수나라 정권의 유리한 운영을 위해서였다. 이는 유가의 경상덕교(綱常德敎)를 널리 펼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위고문상서 매색본이 매우 뛰어난 경전이었기 때문에, 이의 내용에 근간하여 《상서정의》를 지었다.
5. 가치와 영향
유현과 유작은 본래 북방학자로서 수나라 통일 후에 남방학을 종주로 하고 북방학을 버리는 경학정신을 가진 학자였다. 당시 북인은 한학(漢學)을 돈독하게 지키고 질박(質朴)을 근본에 두었는데, 남인들은 명리(名理)를 잘 말하고 화사(華詞)를 증식(增殖)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상서》교본으로 당시 남방에서 유행하던 위공안국전 매색본을 채택하고 북방에서 유행하고 있던 진고문본인 정현본을 폐기하여 유현‧유작의 의소(義疏)를 참고하여 《상서정의》를 지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영달 역시 유현과 유작의 이러한 경학의식을 따라서 위공안국전을 교본으로 채택하였던 것에 그 일단의 경학적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경학사적으로 《상서》에 관한 주해서는 무수히 많은데, 《상서정의》는 당의 《오경정의》에 소속되는 것으로, 《상서》의 주해서로서 가장 먼저 편찬되었고, 이에 근간하여 이후 송대 《서경집전》이 편찬되면서, 기존의 당대 《상서정의》의 고주소(古注疏) 계열과 새로운 송대 《서경집전》의 신주소(新注疏) 계열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각기 신주소 계열의 명대 《서전대전》, 고주소 계열의 청대 《상서주소》로 이어지면서 후대 경학사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정의(正義)》에서 말한다. 우(禹)가 제순(帝舜)을 위하여 모려(謀慮)하기를 ‘임금은 임금 노릇 하는 일을 매우 어렵게 여기고 신하는 신하 노릇 하는 직분을 매우 어렵게 여길 수 있다면 위에서 시행하는 정교(政敎)가 잘 다스려질 것이며, 〈정교가 잘 다스려지면〉 아래에 있는 백성들이 모두 교화되어 빨리 그 덕을 닦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제순이 말하기를 ‘옳소. 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임금과 신하가 모두 스스로 어렵게 여길 것이오. 아울러 선(善)으로써 자기를 돕기를 원한다면 아랫사람들의 선한 말이 은복(隱伏)된 바가 없고 초야에 유일(遺逸)된 현인이 없게 될 것이니, 현인들이 빠짐없이 다 쓰인다면 만국(萬國)이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다. 남의 윗자리에 앉은 자는 여러 사람의 말을 상고하여 옳고 그름을 깊이 관찰해서 자기의 그릇된 견해는 버리고 남의 옳은 견해를 따르며, 호소할 곳 없는 환과(鰥寡)와 고독(孤獨)을 가혹하게 학대하지 않고 반드시 불쌍히 여기며, 의지할 곳 없는 곤고(困苦)하고 빈궁(貧窮)한 사람들을 방치하지 않고 반드시 가엾게 여겨야 하는데, 오직 제요(帝堯)만이 이에 능히 행할 수 있고, 여타의 사람들은 잘하지 못하는 바이다.’라고 하였으니, ‘어렵게 여김[克艱]’이 쉽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正義曰 禹爲帝舜謀曰 君能重難其爲君之事 臣能重難其爲臣之職 則上之政敎乃治 則下之衆民 皆化而疾修其德 而帝曰 然 信能如此 君臣皆能自難 竝願善以輔己 則下之善言無所隱伏 在野無遺逸之賢 賢人盡用 則萬國皆安寧也 爲人上者 考於衆言 觀其是非 舍己之非 從人之是 不苛虐鰥寡孤獨無所告者 必哀矜之 不廢棄困苦貧窮無所依者 必愍念之 惟帝堯於是能爲此行 餘人所不能 言克艱之不易也]” 《상서정의(尙書正義)》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
• “《정의(正義)》에서 말한다. 이 또한 그 본성을 말한 것이다. ‘휘어서 굽게도 하고 곧게도 한다.’는 것은, 〈나무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굽게 구부리기도 하고 곧게 펴기도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쇠는 고쳐서 변경할 수 있다.’는 것은 녹여서 그릇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무는 휘어서 굽게도 곧게도 할 수 있고, 쇠는 사람의 뜻대로 변경할 수 있으니, 그것은 사람들의 용도를 위해 만들어야 된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물은 적시면서 내려가니 관개(灌漑)할 만하고, 불은 불꽃을 튀기면서 올라가니 취찬(炊爨)할 만하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물은 순음(純陰)이기 때문에 적시면서 내리흘러 음습(陰濕)한 곳으로 가고, 불은 순양(純陽)이기 때문에 불꽃을 튀기면서 피어올라 양건(陽乾)한 곳으로 간다. 목(木)과 금(金)은 음양(陰陽)이 서로 섞였기 때문에 구부리고 펴고 변경할 수 있는 것이다[正義曰 此亦言其性也 揉曲直者 爲器有須曲直也 可改更者 可銷鑄以爲器也 木可以揉令曲直 金可以從人改更 言其可爲人用之意也 由此而觀 水則潤下 可用以灌漑 火則炎上 可用以炊爨 亦可知也 水旣純陰 故潤下趣陰 火是純陽 故炎上趣陽 木金陰陽相雜 故可曲直改更也]” 《상서정의》 〈주서(周書) 홍범(洪範)〉
(2) 색인어:상서정의(尙書正義),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공영달(孔穎達), 매색(梅賾), 안사고(顔師古), 고문상서(古文尙書), 금문상서(今文尙書), 유현(劉炫), 유작(劉焯), 오경정의(五經正義)
(3) 참고문헌
• 《譯註 尙書正義》(김동주 역, 전통문화연구회, 전7권)
• 《尙書集釋》(屈萬里, 聯經出版事業公司)
• 《尙書源流及傳末》(劉起釪, 遼寧大學出版社)
• 《尙書學史》(劉起釪, 中華書局)
• 〈丁若鏞의 〈尙書正義〉 변증에 대한 연구〉, 장병한, 《한국실학연구》제3집, 한국실학연구회. 2001.6.
• 〈심대윤의 《서경채전변정》에 대한 연구:大同의 實德・實用・主義的 內聖外王論》과 福善禍淫論을 중심으로〉, 장병한,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2013.12.
• 〈漢代 尙書學의 성립과 정치적 意義〉, 정병섭, 《동양철학연구》제57집, 동양철학연구회, 2009.2.
• 〈書經의 해설〉, 黃義敦, 《동국사학》제8호, 동국사학회, 1965.
【장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