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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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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몽(噩夢)》은 왕부지(王夫之)가 말년인 1682년(64세)에 지은 책이다. 젊은 시절인 38세에 저술한 《황서(黃書)》와 함께 왕부지 정치철학의 핵심 역할을 하며, 그가 당시의 상황에서 실제적인 관점으로 개혁적인 의견을 제기한 것이다.
왕부지는 이 책에서 군현제(郡縣制)와 정전제(井田制)를 비롯한 중국 전통의 정치 제도와 경제 제도를 분석하고, 백성에게 적합한 제도가 무엇인지를 논한다. 그는 정치란 군주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 저자

(1) 성명:왕부지(王夫之)(1619~1692)
(2) 자(字)·호(號):자는 이농(而農), 호는 선산(船山), 강재(薑齋), 일호도인(一瓠道人), 선산선생(船山先生), 석당선생(石堂先生).
(3) 출생지역:형주부(衡州府) 성의 남쪽인 회안봉(回雁峰) 왕아평(王衙坪)(現 호남성(湖南省) 형양시(衡陽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왕부지는 1619년 9월 1일(음력)에 유학자 집안의 아버지 조빙(朝聘)(50세)과 어머니 담(譚) 부인(47세)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맏형(개지(介之))으로부터 글을 배웠고, 《십삼경(十三經)》을 비롯하여 많은 고전을 읽었다. 1637년(19세) 봄에 고향의 처사인 도만오(陶萬梧)의 딸(16세)과 결혼하였다. 1638년(20세)에 장사(長沙)의 악록서원(岳麓書院)에서 공부하였고, 1642년(24세) 4월에 맏아들인 물약(勿葯)을 낳았으나, 1643년 11월에 물약이 죽었다.
1644년(26세) 3월에 이자성(李自成)에 의해 명 왕조가 멸망하였고, 그해 5월에 오삼계(吳三桂)가 청(淸)나라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北京)을 함락하였다. 왕부지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비분시(悲憤詩)〉를 지었다. 그해 8월에 둘째 아들인 반(攽)을 낳았고, 12월 중순에 남악(南嶽)의 흑사담(黑沙潭) 부근에 ‘속몽암(續夢庵)’이라는 초옥을 지었다. 1645년(27세) 5월에 청나라 군대가 남경(南京)을 공격하여 홍광제(弘光帝)인 주유숭(朱由崧)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속비분시(續悲憤詩)〉를 지었다. 1646년(28세) 여름에 상음(湘陰)에 가서 첨도어사(僉都御史)인 호북순무(湖北巡撫) 장광(章曠)에게 상서(上書)하여 남북독사(南北督師)와 농민 봉기군을 연합하여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자는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해 11월에 부인이 죽었다. 1647년(29세)에 청나라 군대가 형주(衡州)를 점령하자 하여필(夏汝弼)과 함께 상향현(湘鄕縣) 남쪽 백석봉(白石峰)으로 도피했고, 8월에 둘째 형이 죽었으며, 오래지 않아 아버지와 숙부가 잇달아 죽었다.
1648년(30세) 봄 《역(易)》의 이치를 강술하고, 10월에 관사구(管嗣裘)‧하여필‧승성한(僧性翰) 등과 함께 남악의 방광사(方廣寺)에서 청나라에 항거하는 군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피신하다가, 1650년(32세) 봄에 계림에서 정의가(鄭儀珂)의 딸(18세)과 재혼하고, 8월에 어머니가 죽었다. 1651년(33세) 1월에 아내‧조카와 함께 형양으로 돌아왔다. 1653년(35세) 2월에 셋째 아들인 물막(勿幕)을 낳았다.
1654년(36세) 8월에 청나라 정부의 수색을 피해 다시 유랑 생활을 시작했고, 겨울에 상령(常寧)에서 《주역》과 《춘추》를 강의했다. 1655년(37세) 봄에 침주(郴州) 흥령산(興寧山)의 절에 기거하면서 《주역외전(周易外傳)》을 쓰기 시작하였고, 그해 8월에 《노자연(老子衍)》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1656년(38세)에 서장원(西庄源)으로 돌아왔고, 그해 3월에 《황서(黃書)》를 집필했으며, 같은 해 5월에 넷째 아들인 어(敔)를 낳았다. 1657년(39세) 4월에 유랑 생활을 마치고 ‘속몽암’으로 돌아왔다. 그해 12월에 유근노(劉近魯)를 방문하였고, 이후에 유근노의 장서 6천여 권을 자주 빌려 보았다.
1660년(42세)에 셋째 아들인 물막이 죽었으며, 후에 형양현(衡陽縣) 금난향(金蘭鄕) 고절리(高節里)에 초옥을 짓고 이름을 ‘패엽려(敗葉廬)’라고 하였다. 1661년(43세) 6월에 둘째 부인인 정씨가 죽었다. 1662년(44세)에 ‘패엽려’에 거하면서 남명(南明)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삼속비분시〉를 지었다. 1664년(46세)에 둘째 아들인 반이 유근노의 딸과 결혼하였다. 1665년(47세)에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을 수정하고, 1666년(48세)에 ≪사서훈의(四書訓義)≫를 집필하였다. 1669년(51세)에 장씨(張氏) 부인을 세 번째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해 봄에 《오십자정고(五十自定稿)》를 편찬했으며, 여름에 《속춘추좌씨전박의(續春秋左氏傳博議)》 상‧하권을 찬술하였으며, 그해 겨울에 초당을 지어 ‘관생거(觀生居)’라고 이름 지었다.
1672년(54세)에 ‘관생거’에서 살았지만, 여름과 가을에는 ‘패엽려’에 머물렀다. 그해 8월에 친구인 방이지(方以智)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1674년(56세)에 오삼계의 군대가 호남성의 각 곳을 공격하자, 제자인 당단홀(唐端笏)과 함께 배를 타고 도피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1675년(57세) 가을에 ‘관생거’에 돌아온 후, 석선산(石船山) 기슭에 초당을 지어 ‘상서초당(湘西草堂)’이라고 이름 짓고, 그곳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1678년(60세) 윤3월에 오삼계가 형주에서 황제로 칭하면서 국호를 ‘대주(大周)’라고 하며 그의 무리들이 강제로 권진표(勸進表)를 쓰라고 하자, 그것을 거절하고 깊은 산 속으로 피난하여 〈볼계부(祓禊賦)〉를 지었다. 1679년(61세)에 청의 군대가 형주를 수복하자 장유모(章有謀)와 함께 청의 군대를 피해 숲속에 들어갔고, 1682년(64세) 10월에 《악몽(噩夢)》 1권을 썼으며, 1685년(67세)에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9권을 썼고, 9월에 《주역내전(周易內傳)》 6권과 《주역내전발례(周易內傳發例)》 1권을 지었다. 1686년(68세) 봄에 맏형이 죽었다. 1688년(70세)에 《칠십자정고(七十自定稿)》를 편찬했다. 1691년(73세) 병환 중에 《독통감론》 30권과 《송론(宋論)》 15권의 집필을 완성하고, 1692년(74세) 1월 2일(음력)에 상서초당에서 사망하였다.

(5) 주요저작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 《주역내전(周易内傳)》, 《주역외전(周易外傳)》,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상서인의(尙書引義)》, 《사서훈의(四書訓義)》, 《독통감론(讀通鑑論)》, 《사문록내‧외편(思問錄内)‧外篇》, 《설문광의(說文廣義)》, 《송론(宋論)》, 《춘추패소(春秋稗疏)》, 《춘추가설(春秋家說)》, 《춘추세론(春秋世論)》, 《속춘추좌씨전박의(續春秋左氏傳博議)》, 《장자통(莊子通)》, 《노자연(老子衍)》, 《예기장구(禮記章句)》, 《시광전(詩廣傳)》, 《황서(黄書)》, 《소수문(搔首問)》, 《주역내전발례(周易内傳發例)》,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 《사해(俟解)》, 《악몽(噩夢)》 외 다수

3. 서지사항

《악몽(噩夢)》은 총 1권이다. 1쪽의 간결한 서문과 55쪽 분량의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장이나 절로 나누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 《악몽(噩夢)》은 왕부지가 1682년(64세)에 지은 것으로, 《선산전서(船山全書)》 제12책(船山全書編輯委員會編校, 嶽麓書社, 1992)에 실려 있다.

4. 내용

왕부지는 《악몽》에서 군주에 대해, 세상의 사람들을 신하로 삼을 수 있지만 토지를 사사롭게 가질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 토지가 있고, 사람들은 그 토지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생존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왕부지에 의하면 정치가 피폐해지고 민중이 고통에 휩싸인 것은 세금이 균등하게 걷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르게 사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경제의 소득과 분배가 민중들에게 고르게 행사되지 않고, 일부 세력들에게 집중될 때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위태롭게 됨을 염려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악몽》에서 전통 사회에서 시행되어왔던 다양한 법과 제도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민본주의의 관점에 입각한 법과 제도의 운용을 강조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왕부지의 《악몽》은 정치에서 민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악몽》은 민중을 억압하고 독재정치를 강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이 아니다. 《악몽》은 민중을 사랑하고 존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민중을 위한 실제적인 일을 할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책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지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토지와 같은 것은 왕이 사사롭게 얻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토지가 있고, 사람은 그 위에서 생존하며, 재물로 인하여 길러진다.[若土則非王者之所得私也. 天地之間有土 而人生其上, 因資以養焉.]”
• “사람은 각각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본받고, 사물은 각각 그것이 보유한 것을 취하며, 일은 각각 갖춘 것에서 밑천으로 삼는다.[人各效其所能, 物各取其所有, 事各資於所備.]”
• “백성을 기르는 도는 가르침과 기름이 합하여서 쓰임을 이룬다.[牧民之道, 敎養合而成用.]”
(2) 색인어:왕부지(王夫之), 선산(船山), 악몽(噩夢), 정치철학(政治哲學), 경제사상(經濟思想)
(3) 참고문헌
• 噩夢(船山全書編輯委員會編校, 船山全書 第12冊, 嶽麓書社)
• 王夫之評傳(蕭萐父‧許蘇民, 南京大學出版社, 2002)
• 王船山硏究著作述要(朱迪光, 湖南大學出版社, 2010)
• 〈略論《噩夢》要旨-王夫之改革論〉(趙民伊, 零陵師專學報, 1993)
• 〈王夫之《噩夢》要旨〉(蕭平漢, 船山學刊, 2002)
• 〈王船山思想國際學術硏討會 相關論文題錄索引〉(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中心, 2019. 10)
• 〈紀念王船山誕辰400周年 王船山思想國際學術硏討會 論文集〉上‧下(2019. 10)

【이철승】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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