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 말기의 귀족 안지추(顔之推)가 자손을 위하여 저술한 교훈서이다. 가족·도덕·대인관계를 비롯하여 구체적인 경제생활·풍속·학문·종교 나아가서는 문자·음운(音韻) 등 다양한 내용을 구체적인 체험과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하여 논하였다. 당시 귀족생활의 실태를 확인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20편으로 되어 있다.
2. 저자/편자
(1)성명:안지추(顔之推)(531∼590?)
(2)자(字)·별호(別號):자(字)는 개(介)이다. 안개(顔介), 혹은 안추(顔推)라 부르기도 한다.
(3)출생지역:강릉(江陵)(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縣))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임기시(臨沂市) 비현(費縣) 동쪽)이다.
(4)주요활동과 생애
안지추의 할아버지인 안견원(顔見遠)은 박학다식하고 지행(志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남제(南齊)의 남강왕(南康王) 소보융(蕭寶融)을 쫓아서 형주(荊州)에 출진하였고 이 연유로 온 집안이 금릉(金陵)에서 호북 지역인 강릉(江陵)으로 이주하였다. 양 무제(梁武帝)가 제(齊)를 차지하자 단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대부의 충절을 보여주었다.
안지추의 아버지 안협(顔協)은 군서(群書)를 섭렵하고 초서와 예서에도 뛰어났다. 저술로 《진선전(晉仙傳)》과 《일월재이도(日月災異圖)》가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 그는 양(梁)나라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의 휘하에 왕국상시(王國常侍)로 출사하였고, 4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줄곧 그의 막료로 지내며 아버지 안견원의 충절을 계승하였다.
안지추는 9세 때 아버지가 죽자 형 지의(之儀)에게 양육되었다. 12세 때 상동왕 소역을 따라간 강주(江州)에서 노장을 강연하는 소역의 문하생이 되었으나, 그의 취향은 아니었으므로 다시 《주례(周禮)》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 유가의 여러 책들을 널리 읽었다. 21세 때에는 난을 일으킨 후경(侯景)이 그의 장수 송자선(宋子仙), 임약습(任約襲)을 영주(郢州)로 파견하고 자사 소방제(蕭方諸)를 생포하자 안지추(顔之推)도 포로가 되어 피살될 지경이었으나 후경의 항대랑중(行臺郎中) 왕칙(王則)이 그를 살려 죄수로 건강(建康)으로 보냈다.
24세 때 서위(西魏)의 공격으로 양 원제(元帝)가 사망하고 양나라가 멸망하자 안지추는 장안(長安)으로 압송되었다가, 홍농(弘農)으로 보내져 이원(李遠) 밑에서 서한을 관장하였다. 26세 때 북제(北齊)의 업(鄴)으로 망명하였는데, 북제의 문선제(文宣帝)가 그에게 봉조청(奉朝請)의 직책을 주어 측근에서 시종하게 하였다. 북제 말에 이르러 그는 문예자문기관인 문림관(文林館)에 들어가 사도록사참군(司徒錄事參軍)이 되어 중서시랑(中書侍郞) 이덕림(李德林)과 함께 문림관의 업무를 총괄하고, 여러 문인들과 일종의 《수문전어람(修文殿禦覽)》을 공동 편찬하였다. 이러한 공을 높이 평가받아 안지추는 황제의 비서관인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승진하였다.
북제가 멸망하자 안지추는 다시 자신이 있었던 강릉 일대인 북주(北周)로 가서 어사상사(御史上士)가 되었다. 51세 때 수(隋)로 가서는 태학사(太學士)를 지내며 백관의 급여를 개정하는 일에 참여하고, 운서(韻書)인 《절운(切韻)》을 편찬하기도 하고, 《위서(魏書)》의 개정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안지추의 사망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590년 그의 나이 60여 세쯤에 중풍으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씨가훈》도 이 무렵에 집필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안사고(顔師古)는 그의 손자이며 서예가 안진경(顔眞卿)은 그의 5대손이다.
(5)주요저작:안지추는 생전에 문집(文集) 30권을 남겼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안씨가훈》 20편 외에 《환원지(還寃志)》 3권, 《집령기(集靈記)》, 《관아생부(觀我生賦)》, 《계성부(稽聖賦)》 등이 있으며, 《북제서(北齊書)》와 《북사(北史)》에 그의 전기가 기록되어 있다.
3. 서지사항
《안씨가훈》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는 제1편 〈서치(序致)〉에 안지추는 이 책을 쓰게 된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이제 다시금 이런 책을 짓는 까닭은 감히 사물에 법도를 세우고 세상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집안을 바로잡고 자손을 이끌고 타이르는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이 책이 너희들에게 여종이나 아내보다 지혜로운 것으로 미덥게 여겨지기를 바란다.……지난날의 가르침을 돌이켜 생각하고 몸속 깊이 새겼거니와, 이 책은 그저 눈으로 훑어보고 귀로 흘려듣던 옛 책의 교훈과는 사뭇 다른 것들이다. 그리하여 이 스무 편을 남기는 것이니, 너희 자손들이 나를 전철로 삼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에서 보면 안지추는 친근하고 자애로운 견지에서 자손들에게 교훈이 될 책을 지었음을 밝히고, 아울러 어릴 때 받았던 교육과 성장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고백함으로써, 이 책의 내용이 자신의 일생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그것이 자손들에게 귀감과 경계가 되길 희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씨가훈》이 정확히 언제 완성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책의 내용을 통해서 그 대략적인 시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589년 수(隋)가 남조(南朝)의 진(陳)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한 직후 관리의 급여 문제에 대해 토의한 자리에 안지추가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풍조(風操)〉에 보인다. 또 〈종제(終制)〉에서 자신의 나이가 이미 예순을 넘겼다고 하였는데, 그 시기는 590년 이후이다. 또 604년 수 양제(隋煬帝) 양광(楊廣)이 즉위한 이후에는 피휘하여 《광아(廣雅)》를 《박아(博雅)》로 기록하였는데, 〈면학(勉學)〉과 〈서증(書證)〉에서는 그대로 《광아》로 서술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책의 완성 시기를 짐작해보면, 《안씨가훈》은 수의 통일 이후 양제(煬帝)의 즉위 이전인 590~603년 사이에 집필이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안씨가훈》의 판본은 2권본과 7권본이 통행한다. 송나라 《숭문총목(崇文總目)》,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 등의 목록에서는 7권본으로 등록되어 있다. 청나라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는 2권본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여기는 《안씨가훈》에 불교에 대해 언급한 〈귀심(歸心)〉이 있고, 음운·훈고 등의 내용이 혼재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를 잡가(雜家)에 넣고 있다. 양본 모두 20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용도 별 차이가 없다. 《안씨가훈》의 현존하는 가장 이른 판본은 원대(元代) 염대전(廉臺田)이 송(宋)나라 순희(淳熙) 연간의 대주공고본(臺州公庫本)을 중인한 것이다. 순희 7년(1180)에는 심규(沈揆)의 《안씨가훈고증(顔氏家訓考證)》 1권이 부록으로 붙어 있는 판본이 간행되었는데, 선본(善本)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명청대(明淸代)에는 인쇄술이 급속히 발전해 판각이 보편화됨에 따라 《안씨가훈》 역시 수차례 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송본의 7권 20편이 명청대에는 대개 2권으로 간행되었다. 이때의 대표적인 판본으로는, 청나라 초기 포정박(鮑廷博)이 엮은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에 편입된 7권본이 있고, 이후로 독서가이며 주석가이자 교감가이기도 한 노문초(盧文弨)가 친구인 조희명(趙曦明)이 송본을 저본으로 해서 주석한 것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지부족재본도를 참고해서 중교본(重校本)을 출간한 포경당총서본(抱經堂叢書本)이 있다. 조희명(趙曦明)의 주와 노문초의 보주(補注)가 달린 이 책(일명 조주노보본(趙注盧補本))이 이후 대표적인 판본이 되었다. 1980년에는 왕리기(王利器)가 노문초의 포경당총서본을 저본으로 하고, 전대의 주요한 판본을 꼼꼼하게 교감해 완성한 《안씨가훈집해(顔氏家訓集解)》를 상해고적출판사에서 출간했는데, 이 판본이 현재 나온 판본 중에 가장 완비된 판본으로 평가되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표점본(標點本)이다.
4. 내용
《안씨가훈》에서 다루고 있는 20편의 편명과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서치(序致):서문, ②교자(敎子):자식 교육, ③형제(兄弟):형제관계, ④후취(後娶):재혼론, ⑤치가(治家):집안을 다스림, ⑥풍조(風操):예의범절, ⑦모현(慕賢):교우관계와 인재, ⑧면학(勉學):학문, ⑨문장(文章):문장론, ⑩명실(名實):명실론, ⑪섭무(涉務):실무론, ⑫성사(省事):전심론, ⑬지족(止足):분수론, ⑭계병(誡兵):병사론, ⑮양생(養生):양생론, ⑯귀심(歸心):불교론, ⑰서증(書證):고전고증, ⑱음사(音辭):음운론, ⑲잡예(雜藝):잡예론, ⑳종제(終制):유언.
안지추가 살았던 시대는 남쪽의 한족과 북쪽의 이민족이 장기간 대치하던 혼란한 시대로, 그는 자신의 고국인 양나라가 서위의 침입으로 무너지는 망국의 아픔을 경험했으며, 오랫동안 북쪽의 이국에서 낯선 문화를 접하며 살았다. 이러한 대전란의 시대를 살다 간 안지추는 남방과 북방의 서로 다른 문화를 경험하면서 어느 한쪽을 편벽되게 고집하지 않고 그 차이 속에서 옳고 참된 것을 좇아 끊임없이 고증했다. 그리하여 《안씨가훈》에는 유·불·도 사상이 두루 포괄되어 있고, 정치·사회·교육·언어·문학·예술 등 각 방면에서 무엇이 가장 옛 도리에 가까운 지를 알려주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안씨가훈》은 당시의 학술·교양·사상·문학·사회생활부터 언어·잡예(雜藝)까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가훈이다. 이 책은 개인생활의 지침만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타락한 남조 귀족사회를 비판하고 극단적으로 습속을 달리는 현학을 배격하였으며, 유교의 상식적인 합리주의를 사랑하여 변화하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실용의 학문을 권장하였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남북조 시대의 다양한 풍모를 실감나게 엿볼 수 있으며, 게다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한 속언이나 방언 등도 인용하고 있어 그 풍미를 한층 더 새롭게 맛볼 수 있다. 또한 《안씨가훈》의 상세하고도 구체적인 당대 사회의 묘사는 정사(正史) 이외에 별로 남아있지 않은 육조(六朝)의 사료(史料)를 보충하는 귀중한 문헌이기도 하다.
중국의 가훈서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대거 등장한다. 삼국시대 제갈량의 《계자서(誡子書)》, 혜강(嵇康)의 《가계(家誡)》, 동진(東晋) 시대 도연명(陶淵明)의 《책자(責子)》, 송대(宋代) 왕승건(王僧虔)의 《계자서(誡子書)》 등은 모두 중국 가훈서의 모태다. 안지추의 《안씨가훈》은 이러한 일련의 분위기 속에서 출현하여, ‘가훈’이라는 말을 일반화시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가훈의 비조로 손꼽힌다.
6. 참고사항
(1)명언
• “뛰어난 지혜를 가진 이는 가르치지 않아도 이룸이 있고, 극히 어리석은 이는 가르친들 나아질 것이 없지만, 보통사람은 가르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上智不敎而成 下愚雖敎無益 中庸之人 不敎不知也]” 〈교자(敎子)〉
• “형제가 화목하지 않으면 그 자식들도 서로 아껴주지 않는다. 그 자식들이 아껴주지 않으면 일가권속(一家眷屬)도 소원하고 야박해진다.[兄弟不睦 則子姪不愛 子姪不愛 則群從疏薄]” 〈형제(兄弟)〉
• “만약에 베풀면서도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면서도 인색하지 않을 수 있다면 훌륭한 것이다.[如能施而不奢 儉而不吝 可矣]” 〈치가(治家)〉
• “세상 사람들은 다들 사리(事理)에 어두워서, 귀로 듣는 것을 중시하고 눈으로 보는 것은 천시하며, 멀리 있는 것을 중히 여기고 가까이 있는 것을 가벼이 여긴다.[世人多蔽 貴耳賤目 重遙輕近]” 〈모현(慕賢)〉
•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지음에 옛적의 사례를 인용하려면 반드시 직접 눈으로 보고 배워야 할 것이니 귀로 전해들은 얘기를 믿어서는 안 된다.[談說製文 援引古昔 必須眼學 勿信耳受]” 〈면학(勉學)〉
(2)색인어:안씨가훈(顔氏家訓), 안지추(顏之推), 안사고(顏師古), 안진경(顏眞卿), 가훈(家訓), 계자(戒子), 유학(儒學), 불교(佛敎), 면학(勉學), 남북조(南北朝), 관아생부(觀我生賦).
(3)참고문헌
• 顔氏家訓(顔之推 撰, 中華元年(1912)刊)
• 顔氏家訓(안지추, 臺灣商務印書館)
• 안씨가훈(안지추 저, 유동환 역, 홍익출판사)
• 안씨가훈(안지추 저, 박정숙 역, 지식을 만드는 지식)
• 역주 안씨가훈1~2(정재서, 노경희, 전통문화연구회)
【함현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