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진(秦)나라 시황(始皇)의 재상 여불위(呂不韋)가 자신의 빈객 3,000여 명을 모아서 선진시대의 여러 학설과 고사·설화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사고제요(四庫提要)》에서는 〈자부(子部)〉의 잡가편(雜家篇)에 수록되었는데, 도가(道家)사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나, 유가(儒家)·병가(兵家)·농가(農家)·형명가(刑名家) 등의 설도 볼 수 있다. 또한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시사(時事)에 관한 것도 수록되어 있어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론서로서 후세 고증학자(考證學者)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26권이다.
2. 저자/편자
(1)성명:여불위(呂不韋)(B.C. 292~B.C. 235)
(2)자(字)·별호(別號):성(姓)은 강(姜), 씨(氏)는 여(呂), 이름은 불위(不韋). 여자(呂子)라 부르기도 한다.
(3)출생지역:위(衛)나라 복양(濮陽)(현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활현(滑縣))
(4)주요활동과 생애
원래는 양적(陽翟)(지금의 하남성 우주(禹州))의 대상인으로, 여러 지역을 다니며 장사해서 거금을 모은 전국시대 대부호였다. 그가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만났는데, 자초는 진나라 소왕(昭王)의 둘째 아들인 안국군(安國君)의 서자(庶子)였다. 이때 여불위에게는 여자가 있었는데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그 여자를 자초에게 바쳤고, 또 자초가 진나라로 귀국할 수 있게 도움을 제공하였다. 후일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 장양왕은 여불위의 은덕을 배신하지 않고 승상으로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였다. 장양왕에게는 영정(嬴政)이라는 태자가 있었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영정은 여불위와 그가 자초에게 바친 애첩 사이에 태어난 인물로 설명하고 있다.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태자인 영정이 왕위에 올라 진왕 정(政)이 되었는데, 진왕 정이 바로 뒷날의 진 시황(秦始皇)이다. 여불위는 상국(相國)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 중부(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중용되었다.
그러나 즉위 시 열네 살에 불과했던 진왕 정은 모후의 그늘 아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여불위가 정치를 주도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사기》에 의하면 이때까지 여불위와 모후의 밀통관계는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모후는 장양왕 사후에 여불위에게 계속해서 밀회를 요구했는데, 진왕 정이 자라면서 국모가 된 모후와의 불륜을 지속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여불위는 모후를 달래기 위해 노애(嫪毐)라는 사내를 모후에게 소개시키고 그를 환관으로 꾸며 후궁에 들였다. 태후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진왕 정이 이들의 관계를 눈치채자, 노애가 태자를 제거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극형을 당하였다.
이 사건을 기회로 진왕 정은 자신의 친정 체제를 구축하고, 여불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공적과 일족과의 관계 때문에 포기하고 대신 여불위는 관직을 사임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여불위는 자신의 봉토인 낙양으로 은퇴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불위가 낙양으로 돌아간 뒤에도 국내외의 많은 인사들이 그를 찾는 데 대해 불안을 느낀 진왕 정은 여불위에게 촉(蜀)으로의 강제 이주를 요구하였다. 촉으로 이주하던 여불위는 결국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5)주요저작 : 미상(未詳).
3. 서지사항
《여씨춘추》는 〈십이기(十二紀)〉의 춘하추동에서 ‘여씨춘추’라는 명칭이 생겼으며, 〈팔람(八覽)〉에서 이름을 따 《여람(呂覽)》이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말기에 위(魏)에는 신릉군, 초(楚)에는 춘신군, 조(趙)에는 평원군, 제(齊)에는 맹상군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그들을 사군자(四君子)라고 하여 그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은 천하의 유능한 인사들을 초빙하여 각각 수백에서 수천의 많은 빈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진(秦)의 재상인 여불위는 진이라는 강대한 국력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거느린 빈객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많은 돈을 들여 천하의 유능한 인사들을 진나라로 모아들였는데, 그 수가 3천인에 이르렀다.
여불위는 다양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 자신의 식객들에게 지시하여 각자가 보고 들은 사실들을 기록하게 하였는데, 그 기록은 20만 언(二十萬言)에 이르렀다. 여불위는 이렇게 모아진 자료를 편찬하여 하나의 책으로 만들고, 거기에 천지·만물·고금의 일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 《여씨춘추》라 이름 붙였다. 내용은 〈십이기(十二紀)〉·〈팔람 八覽〉·〈육론(六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성립시기에는 세 가지 이설이 있으니, 진시황 6년(B.C. 241), 진시황 7년(B.C. 240), 진시황 8년(B.C. 239)의 세 가지 설이다. 그러나 실제 편집 시기는 이와 달라서 《여씨춘추》 전체가 동시에 편집되지 않았다는 학설이 제기되어 있지만, 전국시대 말에 선진의 제가 사상을 다양하게 편집하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여씨춘추》는 진 왕조와 여불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때문에 오랜 기간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청대의 고증학 열풍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청대의 관리이자 학자였던 필원(畢沅)이 《여씨춘추신교정(呂氏春秋新校正)》을 통해 전면적인 교정 작업을 시도하여 전래되어 온 판본들의 오류를 잡아줌으로써 본격적인 연구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1984년 학림출판사(学林出版社)에서 출판한 진기유(陳奇猷)의 《여씨춘추교석(呂氏春秋校釋)》은 종래의 판본들을 망라해 대조하면서 일본인의 주석까지 포함하여 제가들의 주석을 검토하고 최근 학문의 연구 성과까지 참조하여 교정 작업과 주석 작업을 진행한 판본으로 현재로서는 주석의 완결판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이후 진기유는 이 책에 수정·보완작업을 하여 《여씨춘추신교석(呂氏春秋新校釋)》을 발표했다. 최근 출판된 왕리기(王利器)의 《여씨춘추주소(呂氏春秋注疏)》도 이에 비견할 만한 대작이라고 할 수 있다.
4. 내용
여불위는 완성된 《여씨춘추》를 진의 수도인 함양성 성벽에 진열해놓고, “이 책에 적힌 글 가운데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천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거기에 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훗날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고사가 유래되었다.
《여씨춘추》는 크게 세 부분으로 편집되어 〈십이기(十二紀)〉·〈팔람(八覽)〉·〈육론(六論)〉으로 되어 있고 〈십이기(十二紀)〉 뒤에 〈서의(序意)〉가 있다. 《사기》에 의하면 처음에는 〈팔람〉·〈십이기〉·〈육론〉의 순서로 되어 있었고 당시 논설로서 무게가 있는 〈팔람〉 부분의 비중이 높아서 《여람(呂覽)》으로도 불렸던 것인데 후일 지금과 같은 체제로 바뀌었던 것 같다.
〈십이기〉는 각 기가 다섯 편씩 모두 60편, 〈팔람〉은 각 람이 여덟 편씩 모두 64편, 〈육론〉은 각 론이 여섯 편씩 36편, 모두 합하여 16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다 〈십이기〉의 서론에 해당하는 〈서의〉가 추가되어 모두 161편인데 현재에는 〈팔람〉 가운데 첫 번째인 유시람의 한 편이 빠져 있어서 모두 160편으로 되어 있다. 〈십이기〉는 맹춘기(孟春紀)에서 계동기(季冬紀)까지 십이기로 구분하고 각 기(紀)의 아래에 다섯 편의 글을 수록하였다. 이 다섯 편 가운데 맨 처음은 모두 계절의 행사를 쓴 것으로 《예기》 〈월령〉과 비슷하고, 나머지 네 편은 정치와 도덕에 대한 기사와 논설이다.
다음으로 〈팔람〉은 여덟 개의 대강(大綱)에 여덟 편을 배치해서 모두 64개의 편으로 이루어진 잡박한 부분이다. 〈육론〉은 여섯 개의 논(論) 아래에 여섯 편씩의 글을 모아 36개의 편으로 구성했고, 내용은 〈십이기〉나 〈팔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은 제자백가의 사상을 종합하여 나온 책으로 현대식 개념으로 백과전서류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통치에 이용한다는 실용적인 목적에 따라 여러 논자들의 논설들을 모은 것이므로 논설집이라 보는 것이 낫다. 여러 사람들의 글들을 편집하다 보니 서로 모순된 내용이 수록된 예도 적지 않은데 다양한 논자들의 사상들을 종합할 수 있었던 것은 군주의 통치에 이용한다는 현실적인 목표가 있어서 가능하였다. 첫 부분의 핵심이 월령의 성격을 띤 〈십이기〉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적인 사상서로서보다 정치 이론서로서의 측면이 더 두드러진다.
5. 가치와 영향
《여씨춘추》는 편찬 시기가 전국시대 말로, 서술 내용 역시 진시황의 통일 직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적절하다. 또한 이 책은 천자의 위상, 천자를 중심으로 운용되는 의례와 통치 구조,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리된 제사 체계, 통합된 천하를 관통하는 지리관, 주변의 이민족에 대한 관심과 시야의 확대 등 앞으로 등장할 제국이 당면하게 될 문제에 대한 논의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씨춘추》는 이론에만 치우치지 않고 현실 정치에 더 접근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점은 유가 문헌인 《예기》의 통치술과 관련된 편들이 이론의 측면에 치우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또한 관직이나 관리 체계에 대한 서술은 단편적으로 인용된 《주례(周禮)》보다 훨씬 더 현실에 접근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당시의 통치 이론이 통일 제국의 출현과 함께 어떻게 현실화해가고 있었는가 하는 흥미로운 주제에 좋은 자료를 제공할 수 있고, 이 점이 《여씨춘추》가 지닌 또 큰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씨춘추》에는 음악의 역사와 함께 악기의 유래라든가 음률의 결정 방법, 특히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어 음악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외에도 《여씨춘추》는 천문학, 지리학, 음악, 농학, 의술 등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백과전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사람의 본성은 장수할 수 있는 것인데 재물이란 것들이 미혹하게 만들기 때문에 장수할 수가 없다.[人之性壽 物者抇之 故不得壽]” 〈맹춘기(孟春紀)〉
• “음악의 유래는 오래되었으니 도량(度量)의 차이에서 시작하였고, 만물의 근원인 태일(太一)에 근본을 두고 있다.[音樂之所由來者遠矣 生於度量 本於太一]” 〈중하기(仲夏紀)〉
• “백성을 가르치는 근본을 효라 하고, 효를 실천하는 것을 공양한다고 한다.[民之本敎曰孝 其行孝曰養]” 〈효행람(孝行覽)〉
• “행동은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중하지 않으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비록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게 된다.[行不可不孰 不孰 如赴深谿 雖悔無及]” 〈신행론(愼行論)〉
• “선비는 한쪽으로 기울어도 안 되고 파당을 지어서도 안 되며,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강해야 하고 비운 듯하면서도 실속이 있어야 한다.[士不偏不黨 柔而堅 虛而實]” 〈사용(士容)〉
(2)색인어:여씨춘추(呂氏春秋), 여람(呂覽), 여불위(呂不韋), 진시황(秦始皇), 장양왕(莊襄王), 십이기(十二紀), 팔람(八覽), 육론(六論), 노애(嫪毐).
(3)참고문헌
• 呂氏春秋(呂不韋 撰, 臺灣中華書局)
• 呂氏春秋(呂不韋 輯, 畢沅 輯校, 中華書局)
• 呂氏春秋(內野態一郞, 中村璋八 共著, 東京 : 明德出版社)
• 呂氏春秋校釋(陳奇獸 校釋, 學林出版社)
• 呂氏春秋新校釋(陳奇獸 校釋, 上海古籍出版社)
• 呂氏春秋注疏(王利器, 巴蜀書社)
• 여씨춘추(呂不韋 著, 鄭英昊 編譯, 자유문고)
• 여씨춘추 동양편(여불위 저, 정하현 역, 소명출판)
【함현찬】